오토 1세 [Otto I, 재위 936∼973]        700 ~ 900  2009. 4. 25.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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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프랑크 제국이 멸망하고 동유럽에 세워진 신성로마제국의 초대 황제. 그다지 중요한 인물은 아니지만 신성로마를 건국한 왕이라는 점에서 올려보았다. 대제라는 칭호는 역시 기독교 교황측에서 준 것이다. 콘스탄틴, 테오도시안이 받은거처럼. 즉 종교적인 의미 이상은 아니라는 뜻. 왜 대제라는 칭호를 받았는가 하면 기독교도들은 마치 자신들처럼 기독교를 신실히 믿으면 로마의 계승자가 되는것처럼 무뇌아 소리를 지껄였다(사실 로마는 기독교 국가가 아니었는데도). 그래서 누군가가 기독교 확립에 기여하면 기독교 교황이 멋대로 대제라던가 제국 칭호를 마음대로 붙여주었는데 그래서 프랑크 왕 카를로스(샤를 마뉴)에게 멋대로 서로마 황제라는 칭호를 붙여주고 서로마를 승계한다는 넉살 좋은 명분을 붙여주었다. 프랑크 왕국이 서로마라는 칭호로서 잠깐 존재했다가 프랑크 왕국이 멸망하니 이번에는 오스트리아 왕 오토 1세에게 기독교에 잘 하면 서로마 칭호 줄게.. 라고 해서 만들어진 나라가(샤를마뉴의 짝퉁 서로마를 잇는다는 명분) 뜬금 없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을 받게 된 것이다. 여러 독일지역 야만족 왕국들의 연합이 이름은 그럴사 하게 '신성 로마 제국'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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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1세 당시의 신성로마 영토

오토대제()라고도 불린다. 부왕 하인리히 1세의 유업을 이어받아 독일의 국가통일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처음에 부족 대공들의 분립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왕족을 대공과 왕령백()으로 임명했으나, 그들이 왕의 아들 루돌프를 선두로 부족 세력과 손을 잡고 반항하였으므로(루돌프의 난, 953∼954), 그 정책은 좌절되었다. 그러자 초부족적인 교회 세력과의 동맹을 시도, 주교 ·대수도원장을 왕권의 정치적 지주로 삼고, 그 교회령을 물질적 토대로 하는 방침(제국교회정책)을 확립하였다. 반왕권파()의 배후에는 서프랑크의 루이 4세가 있었는데, 오토는 3차의 원정에 이은 비제의 화약(940)과, 교황 사절의 출석을 얻어서 연 잉게르하임 주교구 회의(948)에 의하여, 이 방면에서의 정세를 안정시켰다.

동부에서도 잇딴 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작센 동방에 몇 개의 변경구를 설치하여 수비를 굳히는 한편, 955년에 아우구스부르크 근교인 레히펠트전투에서 마자르인(헝가리인)으로부터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은 내란을 극복한 직후에 거의 독일 전역에서 동원된 통일 군대의 승리로서, 왕권의 위신을 높이어 같은 시대의 사가인 비두킨트는 재빨리 그에게 ‘황제’의 칭호를 바쳤다. 이보다 앞서 951년, 오토는 제1차 이탈리아 원정을 시도하여, 이탈리아왕 로타르의 비아델하이트를 비()로 삼고, 이탈리아의 왕위를 얻은 뒤, 베렌가르 2세를 토벌, 이 기회에 황제 대관의 일로 교황 아가페투스 2세의 의향을 타진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그러나 여러 부족 대공에 대한 맹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또한 독일 교회에 대한 지배를 굳힐 필요에서, 교황 요한 12세의 파병 요청에 따라 다시 이탈리아로 출정, 962년에 교황으로부터 숙원의 제관()을 받았다(신성로마제국의 창시). 그것은 독일 왕권을 비잔틴 황제와 같은 격인 보편적 ·초독일적인 황제권으로 높이는 반면, 그 뒤의 역대 황제가 이탈리아 정책에 깊이 개입하는 화근의 씨앗을 뿌려, 최고 지배권을 둘러싼 교황권과의 운명적인 대결의 길을 열어 놓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교황의 윤허를 얻어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구를 설치하고(962), 동방 발전의 기초를 닦았고, 아들 오토 2세의 비로 비잔틴 황녀 테오파노를 맞아, 수교와 황제권의 상호 승인을 꾀하는(972) 등의 포석은 당시의 여러 조건하에서 최선의 선택이었다.

작센왕조 제2대 독일 국왕(936∼973), 작센왕조 제2대 국왕으로, 초대 신성로마 황제(재위 962∼973)이기도 하였으며, 오토대제라고도 한다. 이 왕조의 창시자 하인리히 1세의 지명과 여러 부족의 선거로 왕위에 올랐으나 국내에서는 부족 대공들이 독립하려는 경향이 강하였고 외적이 침입할 위협도 컸다. 오토는 북방에 슐레스비히의 마르크(邊境領)를 두고 데인족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동방에서는 작센의 동쪽 국경에 두 변경령을 설치해 게로와 헤르만빌룽을 마르크그라프(邊境伯)에 임명하여 원주민인 베네디족을 지배하도록 하였고 또 968년에 마크데부르크 대주교구를 신설하였으며, 그 밑에 많은 주교구를 두어 베네디인의 그리스도교화를 추진하였다. 또한 955년에는 마자르인의 침입을 아우크스부르크 근교 레히펠트에서 결정적으로 타파하여 그 위협을 근절시켰다. 또 서방에서는 로트링겐을 탈환하려는 프랑스왕의 기도를 좌절시켰을 뿐 아니라, 프랑스 국내의 정책분열에 조정자로 개입하는 등 그 실력을 과시하였다. 국내에서는 로트링겐 대공 기젤베르트, 프랑켄 대공 에버하르트 등의 반란을 진압하고 로트링겐 대공에는 사위인 콘라트, 슈바벤 대공에는 아들인 루돌프, 바이에른 대공에는 동생 하인리히와 혈연자를 배치하고, 작센과 프랑켄을 황제 직할지로 하여 왕권확립을 꾀하였다. 그러나 953∼954년 루돌프가 콘라트와 손잡고 반란을 기도하게 되자, 이 정책의 한계를 깨닫고 교회세력과 제휴하여 세속 제후를 억압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동생인 마인츠 대주교 브룬에게 로트링겐 통치를 위촉한 것을 비롯하여 측근 성직자들을 대주교·주교·제국수도원장으로 배치하고, 많은 영토와 특권을 부여해 국가통일의 지주로 삼았다. 이것을 제국교회정책이라고 하며, 작센왕조 및 초기 잘리에르왕조의 여러 왕들에 의하여 계승되었으나, 뒤에 서임권 다툼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오토의 왕권확립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이탈리아정책이었다. 951년 이탈리아왕의 미망인 아델하이트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제1차원정을 감행한 뒤, 그녀와 결혼하여 랑고바르트왕의 칭호를 얻었으나 국내에서 반란이 일어나 철병하였다. 961년 이탈리아 왕을 자칭하는 베렌가리오에 대한 교황 요한 12세의 구원요청을 받아 재차 이탈리아를 원정하고 이듬해 로마에서 교황으로부터 황제로 추대되었다. 이것이 신성로마제국의 탄생이다. 오토는 이 황제 자리를 비잔틴제국에서도 승인받기 위하여 오랫동안 외교교섭을 계속하여, 972년 비잔틴의 황녀 테오파노를 아들인 오토 2세의 왕비로 영입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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