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발해, 신라의 판도가 송나라, 요제국, 고려의 판도로 바꼈다.
거란(契丹)은 5세기 중엽부터 내몽골의 시라무렌 강 유역에 나타나 거주하던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족으로, 중국어 발음은 ‘키타이’(kitai)이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역사
돌궐 제국이 멸망하자 지배에서 벗어났고 자유롭게 세력을 확장하여 고구려 및 당제국과 대립하였다. 907년 야율아보기는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요나라를 세웠고 발해를 멸망시켰다. 요나라는 993년부터 1019년까지 고려에 쳐들어왔으나 패퇴했다. 거란문자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요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대체로 한족에 동화되었고,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했다. 서요(카라키타이)는 중앙아시아 쪽으로 옮겨갔다.
어원
중국의 고 영어식 표현인 캐세이(Cathay)와 러시아어로 중국을 의미하는 키타이(Китай, Kitay), 몽골어로 중국 또는 한족을 나타내는 햐타드 (Хятад, Hyatad)등은 모두 거란에서 유래한다. 13세기 이전 아라비아어, 페르시아어 문헌에 거란은 하타(우) 또는 히타(우)라 불렸다. 특히 중앙아시아 이란의 페르시아어 지리서 연대기에는 소그드어의 시대에서부터 중국 전반을 가리키는 치인(支那) 또는 “치니스탄”(震旦)( چينستان Chīnisān)이라는 호칭이 존재하고, 13세기 중반까지 북부 중국을 지칭하는 탐가쥬(탁발씨, طمغاج Ṭamghāj) 등의 단어도 사용되었다.
거란의 군주
요제국
중국의 역사
| |||||||
---|---|---|---|---|---|---|---|
신화와 고대 | |||||||
선사 시대 | |||||||
신화·삼황오제 | |||||||
하 기원전2000? – 기원전1600? | |||||||
상 기원전1600? – 기원전1046 | |||||||
주 기원전1122 – 기원전256 | |||||||
서주 | |||||||
동주 | |||||||
춘추 시대 | |||||||
전국 시대 | |||||||
제국의 시대 | |||||||
진 기원전221 – 기원전206 | |||||||
한 기원전206 – 서기220 | |||||||
전한 | |||||||
신 8 – 23 | |||||||
후한 | |||||||
삼국 시대 220–280 | |||||||
위, 촉, 오 | |||||||
진 265 – 420 | |||||||
서진 | |||||||
동진 | 오호 십육국 시대 304–439 | ||||||
남북조 시대 420 – 589 | |||||||
수 581 – 618 | |||||||
당 618 – 907 무주 690 – 705 | |||||||
오대십국 시대 907 – 960 |
요 916 – 1125 | ||||||
송 960 – 1279 |
|||||||
북송 | 서하 1038 – 1227 | ||||||
남송 | 금 1115 – 1234 |
||||||
원 1271 – 1368 | |||||||
명 1368 – 1644 | |||||||
청 1644 – 1912 | |||||||
현대의 중국 | |||||||
중화민국 1911 – 현재 | |||||||
중화인민공화국 1949 – 현재 |
요(遼, 916년 - 1125년)는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를 중심으로 중국 북쪽을 지배한 왕조였다. 초대 황제는 야율아보기이다.
938년에 요(遼)는 지금의 북경에 두 번째 수도를 건립했고 그것을 남쪽의 수도라는 뜻인 남경(南京)으로 불렀다. 요나라는 남경 석진부(南京析津府), 즉 연경(燕京)과 이전의 중경 대정부(中京大定府)와 상경 임황부, 카이펑 등의 수도가 있었다.
목차[숨기기] |
[편집] 역사
거란의 8부족은 9세기말 당나라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발흥하기 시작하였다. 916년 질라부(迭刺部)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모든 부족을 통합하여 거란국을 세웠다. 야율아보기는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여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를 도읍으로 한 후 서쪽으로는 탕구트·위구르 등 여러 부족을 제압했고, 동쪽으로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킴으로써 외몽골에서 동만주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했다.
2대 황제인 태종 때에는 주로 중국 경략에 국력을 쏟아부었다. 936년 후진(後晉)의 건국을 도와준 대가로 연운 16주(燕雲十六州)를 획득하고 국호를 "요"(遼)라 하였다. 946년 후진을 멸망시켜 대량일대 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요나라의 가혹한 통치는 현지 주민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결국 중국의 통치에 어려움을 느끼고 철수하였다.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다가 성종(聖宗) 때에 들어서 안정을 되찾았다. 성종은 송(宋)을 공격하여 1004년 전연의 맹(澶淵之盟)을 맺고, 송에서 받는 세폐(歲幣)로 재정을 확충했으며, 송과 무역하여 경제적·문화적으로 국력이 융성하게 되었다. 또한 성종은 정치조직과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공포하는 등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고려와 북만주의 여진을 침략하여 동북아시아의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성종 이후인 흥종(興宗)·도종(道宗) 때 황실의 내분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한 가운데 요나라는 동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 완옌부(完顔部)의 추장 아구다(阿骨打)가 세운 금나라(金)와, 연운 16주를 되찾으려는 송의 협공을 받아 1125년 황제 천조제(天祚帝)가 사로잡힘으로써 멸망당했다. 이때 황족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서쪽으로 망명하여 중앙 아시아 지역에 서요(西遼)를 건국했다.
[편집] 통치 구조
요나라는 점령지의 중국인과 발해인등을 통치하기 위해 북면관(北面官)·남면관(南面官)이라는 2중 지배 체제를 만들어냈다. 중국인과 발해인 지역을 통치하는 남면관에서는 당(唐)식의 군현제도를 그대로 모방했고, 북면관에서는 내륙 아시아의 초원지대에 살고 있던 유목민을 거란족의 관습법으로 다스렸다.
거란족 지배자들은 중국인 고문을 두고 중국식 행정기술을 본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부족적 주체성이 흐려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 부족 고유의 의식·음식·복제 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한자를 쓰지 않고 거란 문자를 고안해냈다.
'700 ~ 900'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교를 대하는 이슬람의 사악함 (25) | 2012.07.12 |
---|---|
마녀마남 사냥 (0) | 2010.03.27 |
비잔틴인들의 그리스로마 문화 대우 (0) | 2009.05.06 |
탈라스 전투(751) (0) | 2009.05.02 |
투르 푸아티에 전투 (732년) (0) | 2009.05.02 |
위구르 한국(위구르 칸국,Uyghur Khaganate) (0) | 2009.04.25 |
동양 유목민족의 대이동 (600 ~ 1000) (0) | 2009.04.25 |
오토 1세 [Otto I, 재위 936∼973] (0) | 2009.04.25 |
마자르족 [Magyars] (0) | 2009.04.25 |
블라키아족(vlach,루마니아인) (0) | 2009.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