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ㄴㄹ        1900  2011. 1. 11.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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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 정치깡패,경찰로 환생했는가
'피의 화요일'서막 연 곽영주와, '피의 수요일' 경찰청 상황실의 경찰총수
 
추광규 기자
49년전인 지난 1960년 4월 19일 광화문 경찰저지선. 시위대와 저지선과의 간격은 불과 10 미터였다. 이때 미친듯이 권총을 휘두르며 발사를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곽영주였다. 경무대 경호책임자인 경무관 곽영주의 이 같은 지시로 경찰들의 발포가 시작되었다.
 
"경무대의 어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시체가 나뒹굴었다. 그리고 달아나는 시위대를 뒤쫓은 경찰은 사정없이 이들을 구타하면서 끌어갔다. 이날 경무대 앞의 시위 희생자는 사망 21명, 부상 172명에 달했고 이로 인해 '피의 화요일'은 시작되었다.(4월 혁명 자료집-혁명재판)"

 
▶ 1960년 4월 19일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경찰    © 4.19혁명기념도서관

 
4.19와 경무대 현역 경찰관 '곽영주'
 
4.19혁명과 관련된 곽영주의 전설적인 '권력횡포'는 잘 알려져 있다. 자유당 말기 경무대 경호를 책임지는 경무관으로서 정치깡패를 교사하고 비호해 '피의 화요일'의 서막을 연 발포 명령자로서다.
 
곽영주와 관련된 평가는 매우 인색하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정치사찰'의 그 서막을 열었기 때문이다. (편집자 주: 정치 깡패의 대부분은 서북청년단과 비슷하게 대부분 그리스도인이었음.)
 
곽영주. 그는 1957년 '국민주권옹호 투쟁위원회 주최' 장춘단공원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던 야당 집회의 정보를 빼내 자유당을 비롯한 요로에 알린 후, 이정재와 그의 부하 유지광을 동원해 이 집회를 난장판으로 만들며 방해한 바 있다.
 
5월 25일 수만명의 청중이 운집한 가운데 조병옥 박사의 연설이 막 시작될려는 찰나 4,50명의 괴한들이 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괴한들의 난동이 이어졌지만 경호 경찰들은 팔짱만 낀채 수수방관했다. 괴한들은 이정재가 거느린 '화랑동지회'의 회원들이었고, 동원한 사람은 다름아닌 현역 경찰관 곽영주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곽영주의 정치개입은 점차 도를 더해 갔다. 급기야 그는  1960년 4월 18일 오후. 시위를 마친 고려대 학생들이 돌아가던 도중 100여명의 괴한들에 의해 집단 폭행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 학생들만 중경상을 입은게 아니라 이를 취재하던 기자 10여명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 데모대를 습격한 깡패들은 곽영주 지도하에 있는 임화수, 이정재, 유지광 등 정치깡패 들이었다. 
 
곽영주의 이 같은 행위는 그 다음날 한층 더해진다. 마침내 시민들을 향해 실탄을 발사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4월 19일 학생 시위대가 경무대를 향하여 밀려오자 곽영주는 발포명령을 내렸다. 곽영주는 결국 이 같은 죗값을 그 자신이 교수대 위에 올라서는 것으로 치뤄야만 했다. 1961년 12월 21일, 37살 나이의 현역 경찰관 '곽영주' 였다.
 
2009년 6월 10일 서울광장에 되살아난 '곽영주'
 
지난 10일 밤, 이정재의 정치깡패들이 되살아 났다. 복장이 바뀌었을 뿐이다. 경찰관 진압복이다. 이날,  서울광장 인근에서 시위대 해산 작전을 펼치던 경찰이 뛰어가던 시민의 머리와 목을 방패로 가격하는 장면이 한 언론사에 의해 고스란히 포착 되었다.
 
11일 <민중의소리>가 보도한 뉴스 동영상 속에서는,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었다. 화면속에서는 방패를 맞은 시민들 머리가 젖혀지고 거리에 나뒹굴었다. 여성들의 비명소리는 하늘을 찔렀다. 당시 폭행을 당한 시민들은 인도 쪽으로 뛰어가는 중이였고 손에 든건 노란 풍선 뿐이었다. 
 
이날 또 다른 정치깡패도 등장했다. 이 정치깡패도 복장은 경찰 진압복 차림이었다. 이 경찰 진압복을 입은 정치깡패는  <칼라TV> 리포터와 카메라맨을 쇠파이프 모양의 30㎝ 길이 ‘삼단봉’을 휘둘러 부상을 입혔다. 이 같은 폭행으로 장면을 전하던 방송 리포터는 허벅지를 맞고 쓰러졌다.
 
4.19 자유당정권의 정치깡패들의 손에 도끼와 쇠사슬이 들려 있었던데 반해 2009년 진압복을 차려입은 정치깡패들의 손에는 다름아닌 금속재질의 삼단 호신용 장비와 끝을 날카롭게 간 흉기와 다름없는 방패를 들고 있다는 차이 뿐이다. 바야흐로 59년만에 정치깡패들이 완벽하게 다시 환생한 셈이다.
 
 

▶2009년 6월 10일 인도위를 걷고 있던 집회참가자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찰  ©민중의소리

 
'1960년 정치깡패'와 '2009년 경찰복 입은 정치깡패'
 
정치깡패라는 것은 다름아닌 정치를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민간인의 복장을 입고 있던 또는 경찰제복을 입고있던 그 목적이 정치적인 수단으로서 야만적인 폭력이 동원 된다면 바로 그것이 정치깡패라는 것이다.
 
59년전 시위대를 향해 휘두르던 유지광을 비롯한 정치깡패 들의 폭력행위와 2009년 현재 진압복을 입은채 시위대를 향해 휘두르는 폭력행위의 차이는 무엇인가?
 
59년전 경무대로 밀려들던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발사해 수십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시위대를 폭행하면서 이를 취재하던 기자들에게 까지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던 바로 그 정치깡패와 2009년 현재 시위대를 촬영하는 기자들에게 까지 진압봉을 휘두르는 그 야만성의 차이는 무엇인가?
 
다를게 없다. 합법적인 공권력이 아닌 불법폭력으로 국민들의 인권을 짓밟고 공포와 위협을 가하는 집단으로서 이날 소위 경찰의 ‘질서유지 작전’은 합법적인 공권력 행사가 아니라 폭력범에 다르지 않은 난동이었기 때문이다.
 
정치깡패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면 법을 준수하는 경찰이 되었어야 할것이다. 바로 경찰관직무집행법에서 자세하고도 친절하게 경찰이 할 수 있는 행위를 적시해 놓았기 때문이다. 동법 제10조에는 중범죄자나 무기사용이 있는 상황에서의 경찰의 무기사용의 경우를 적시하며 이를 최소화 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경찰장비관리규칙 제82조에는 진압도구를 사용해서 머리 등 중요부위를 찍거나 가격하지 못하도록 되어있다. 하지만 이 같은 법률과 규칙을 준수 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경찰이 아닌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정치깡패'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경무대에 앉아 정치깡패들을 동원해 시위대를 두들기라고 전화기에 외치던 1960년 4.19 당시 경무관 곽영주와, 6.10 행사를 치루던 시위대를 강경진압하라며 무전기에 외치는 주상용 서울경찰청장과의 차이가 뭔가를 묻고 싶을 뿐이다.
 
샴 쌍둥이에 다름 아니다. 아니 59년전 정치깡패가 2009년 서울광장에 경찰복을 입고 환생했다고 해도 그리 틀린말이 아닐듯 싶다. 확실하게 하자. 2009년 우리 국민들은 정치깡패에게 국민의 천부적인 권력을 맡긴적은 결코 없다.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대학가는 온통 ‘4·19 마라톤’ 이야기다. 4·19혁명의 의미를 되새긴다는 의미로 하는 것이라는데, 젊음이 좋긴 좋은가 보다.

그러나 만개한 목련이나 라일락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듯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인 지난 1960년 4월 11일, 한국에서는 정말 ‘승만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金朱烈; 마산상고 1년)의 시체가 마산 중앙부두 200m 앞바다에서 떠오른 것. 그냥 시신이 떠오른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어린 학생의, 그것도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난동의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

1950년대 한국의 풍경은 혼란 그 자체다. 생활 기반이 전혀 없는 5백만 명의 월남인들과 실업자 증가, 농촌 경제 파탄에 따른 도농(都農)간의 격차로 사람들의 불만은 나날이 쌓여만 갔다. 특히 날로 증가하는 정경유착·부정부패와 미국의 경제 원조 감소에 따른 재정 위기, 만성적인 인플레이션 등은 점차 국민들의 원성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선거 구호가 나왔을 정도라 하니 이미 민심은 이승만 정권을 떠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2백만표를 얻은 진보당 조봉암을 1959년 7월 31일 공산당으로 몰아 사형시키고, 야당을 탄압하기 위해 국가 보안법을 강제로 통과시켜 버리는 등 정권 연장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이외에도 1959년에는 반공청년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시국 강연회 등에 투입, 반정부 인사 및 민주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경찰을 사(私)기관화해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데 이용하는 등 ‘힘’을 무기로 정치를 펴나가는 양태를 보인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대박’은 1960년 3월 15일에 있었다. 총투표자수의 10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얻은 나머지 실제 투표 결과보다 지지율을 낮추어 발표하는 등의 해프닝을 빚어낸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대통령 후보 이승만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한 ‘이기붕(李起鵬)을 위한 잔치’였다.

당시 제1야당이었던 민주당의 정통령 후보였던 조병옥(趙炳玉)이 선거 직전 위암으로 별세하기는 했지만, 정통령을 승계하는 부통령에 이기붕을 앉힐 필요가 있었기에 자유당이 부정 선거를 감수하게 된 것이다. (총 유권자 수 : 11,196,490명, 정통령후보 이승만 지지표 : 9,512,793표(84.96%), 부통령후보 이기붕 지지표 : 8,220,587표(73.42%))

특히 이 선거에서 집권당이었던 자유당은 공무원뿐만 아니라 온갖 관변단체를 동원해 1) 총 유효 투표수의 40%에 해당하는 표를 사전에 투표했고 2) 혼자가 아닌 몇 명씩 집단으로 투표를 진행하는 등 공개투표를 행했고 3) 야당 소속의 선거 참관인은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4) 투표장 내에 완장부대를 동원해 요상한(?) 분위기를 조성했고 5) 야당을 찍을 것 같은 유권자에게는 아예 투표권을 주지 않고 대리 투표를 실시한데다가 6) 야당이었던 민주당 지지표를 무효표로 만들기도 했고 7) 사복경찰관 등을 동원해 투표를 감시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완전무결한 부정 선거를 행한 셈이다.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증폭되어 가던 사람들의 불만은 3·15 부정선거를 통해 점화, 서울을 비롯한 대전과 대구, 부산, 마산 등 전국 각지로 번져 시위의 불길이 높이 타올랐다. 4·19혁명의 서막인 셈이다. 특히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으로 더욱 격화되기 시작한 시위는, 북마산 파출소 부근에서 김용실과 김삼웅, 김이구, 유경옥 등 여러 명이 경찰이 쏜 총에 죽거나 다치는 등 유혈 사태를 몰고 왔다.

4·19혁명 과정에서 2백명 가까이 사망하고 6천명 이상이 중경상을 입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경찰의 과잉 진압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전혀 사그라질 줄 몰랐고, 대통령 이승만은 “이 난동의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가 있다”는 담화를 발표하는 웃지 못할 촌극을 빚어내기도 한다.

‘몸통’은 하와이로, ‘깃털’은 저 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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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 오른 학도병, 힘없는 조국에 흐느끼다


드디어 4월 19일, 분노한 서울 시민들은 이승만이 머물던 경무대(景武臺; 현 ‘청와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경무대’는 그 이전의 이름)로 몰려가지만 역시 경찰의 발포로 수많은 이들이 다쳤다.

그러나 제 아무리 위세가 대단한 이승만이라고 해도 시대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일주일 후인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퇴서를 제출, 11년 9개월간 장악해온 정권을 외무장관 허정(許政)에게 넘기고 서울 대학로에 있는 이화장(梨花莊)으로 28일 하야(下野)한다.














▲ 국가보안법 파동에 따른 통행금지 조치가 내려진다.
ⓒ 4·19혁명기념도서관

‘몸통’이 하야 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인데 반해, ‘깃털’의 행방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깃털’ 이기붕과 그의 일가는 4월 25일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교수들의 시위로 재개된 학생 시위로 겁을 먹고 6군단 영내로 피신해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아 “이기붕이 해외로 망명했다”는 등의 설이 떠돌기도 했지만, 결국 경무대 별관에서 이기붕 일가의 변사체가 발견된다. 이 사건을 자결로 간주한 계엄사령부는 “금일(4월 28일) 아침 5시 40분 이기붕씨, 박마리아 여사, 장남 이강석, 차남 이강욱 군은 시내 세종로 1번지 소재 경무대 제36호 관사에서 자결했다.

이들의 유해는 자결 현장에서 검사와 의사의 검시를 마치고 수도육군병원에 안치중이며, 그 진상은 조사 중”이라고 발표한다. 총을 쏜 이는 당시 육군 장교였던 이기붕의 장남이자 이승만의 양자였던 이강석(李康石)으로 알려져 있다.

영욕의 현장에 들어선 도서관

이번에 찾아간 곳이 바로 이기붕이 살던 서울 종로구 평동(平洞) 166번지의 이른바 ‘서대문 경무대’로, 서대문 적십자병원과 강북삼성병원 사이에 위치한 이곳에는 현재 ‘4·19혁명기념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 1960년 4월 6일, 야당 국회의원들이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 4·19혁명기념도서관

4·19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27일부터 ‘4·19 혁명 희생자유족회’가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1963년 3월 8일 들어 이기붕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국가가 환수, 4·19혁명 관련 단체에 무상으로 대여함으로써 1964년 9월 1일 4·19혁명기념도서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4·19혁명이 일어난 지 근 4년만의 일이다.

현재의 건물은 1994년 2월 13일 들어 신축한 것으로, 4·19혁명기념도서관을 세운 이유에 대해 ‘4·19혁명 희생자 유족회’ 사무국장 나복순씨는 “4·19혁명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희생된 영령을 위로하고, 그 유자녀와 일반 학생들에게 공부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짧았던 행복, 긴 슬픔의 시작

그런데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과연 2003년 화사한 봄을 만끽하고 있는 우리에게 4·19혁명이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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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이제야말로 아무 두려움 없이

그놈의 사진을 태워도 좋다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인

지긋지긋한 그놈의 미소하는 사진을 -

대한민국의 방방곡곡에 안 붙은 곳이 없는

그놈의 점잖은 얼굴의 사진을

동회란 동회에서 시청이란 시청에서

회사란 회사에서

XX단체에서 00협회에서

하물며는 술집에서 음식점에서 양화점에서

무역상에서 개솔린 스탠드에서

책방에서 학교에서 전국의 국민학교란 국민학교에서 유치원에서

선량한 백성들이 하늘같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던 그 사진은

사실은 억압과 폭정의 방패이었느니

썩은 놈의 사진이었느니

아아 살인자의 사진이었느니

 

너도 나도 누나도 언니도 어머니도

철수도 용식이도 미스터 강도 유중사도

강중령도 그놈의 속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무서워서 편리해서 살기 위해서

빨갱이라고 할까보아 무서워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편리해서

가련한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서

신주처럼 모셔놓던 의젓한 얼굴의

그놈의 속을 창자밑까지도 다 알고는 있었으나

타성같이 습관같이

그저그저 쉬쉬하면서

할말도 다 못하고

기진맥진해서

그저그저 걸어만 두었던

흉악한 그놈의 사진을

오늘은 서슴지않고 떼어놓아야 할 날이다.

 

밑씻개로 하자

이번에는 우리가 의젓하게 그놈의 사진을 밑씻개로 하자

허허 웃으면서 밑씻개로 하자

껄껄 웃으면서 구공탄을 피우는 불쏘시개라도 하자

강아지장에 깐 짚이 젖었거든

그놈의 사진을 깔아주기로 하자. . .

 

민주주의는 인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자유는 이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아무도 나무랄 사람은 없다

아무도 붙들어갈 사람은 없다

 

군대란 군대에서 장학사의 집에서

관공리의 집에서 경찰의 집에서

민주주의를 찾은 나라의 군대의 위병실에서 사단장실에서 정훈감실에서

민주주의를 찾은 나라의 교육가들의 사무실에서

419후의 경찰서에서 파출소에서

협잡을 하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는

관공리의 집에서

역이란 역에서

아아 그놈의 사진을 떼어 없애야 한다

 

우선 가까운 곳에서부터

차례차례로

다소곳이

조용하게

미소를 띄우면서

 

영수가 기환아 천석아 준이야 만용아

프레지던트 김 미스 리

정순이 박군 정식이

그놈의 사진일랑 소리없이 떼어 치우고

 

우선 가까운 곳에서부터

차례차례로

다소곳이

조용하게

미소를 띄우면서

극악무도한 소름이 더덕더덕 끼치는

그놈의 사진일랑 소리없이

떼어 치우고 -

 

**

 

 

 

 

위의 시는

1960년4월26일, 이른 아침, 김수영 시인이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라는 제목으로 쓴 전문이다.

 

얼마나 통쾌한 시인가,

얼마나 미웠으면, 419가 미처 자리도 잡기 전 26일에 이승만 대통령을 이렇게 적라나하게 짓뭉개버렸겠는가.

얼마나 치가 떨렸으면, 대통령이 그놈이 되고 그 사진이 밑씻개, 개집 깔개로 되고 불쏘시개가 되었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이 시를,

김수영 시인이 이승만 대통령이 26일 오전10시30분에 학생대표를 만나 조건부 하야성명을

내기 몇 시간 전에 썼다는 점이다. 이승만은 27일에야 국회에 대통령직 사직서를 제출했다.  

말하자면 현직 대통령에 대한 사망선고를  온갖 조롱을 섞어 퍼부어 댄 것이다.

김수영 시인은 선견성에 넘쳐나는 천재임과 동시에 그 누구도 갖지 못한 엄청난 용기의 화신이었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글이 나올 수가 있겠는가!

이승만 정권이 몇 달만 더 지속되었어도 아마 김수영 시인은 고문실에 끌려가 시체가 되어 나왔을 게다.

 

419가 성립되기 전까지는 태극기와 나란히 전국 방방곡곡 모든 건물에는 이승만의 미소짓는 사진이 걸려 있었고, 

또 툭하면 요시찰인물로 교사들도 늘 감시당하는 처지였다. 자유당 정권을 서슴없이 비난하셨던 나의 선친은

남대구경찰서 요시찰대상 A급이어서 가끔 불려가 추달을 받곤 했었다. 

그런 시절에 경북중학을 거쳐 경북고등학생이 된 나는 <석간수>라는 "서클"의 "멤버"가 되어

<사상계>잡지를 돌려보거나 하면서 사회의식에 눈을 떠, 툭하면 방과 후에 선생들과 한바탕 설전을 벌리면

선생들은 할 말이 막혀 고개를 떨구기가 일쑤였다. 

 

그렇게 1학년 말을 지나는데, 일요일인 2월28일에도 환경미화니, 특별활동이니 하면서 전교생을 등교시킨다는 소문이 며칠 전부터 돌았다.

일요일인 2월28일 전공무원출근, 학생등교조치는 야당 부통령 후보의 대구수성천변 유세에

참가하지 못하게끔 하려는 자유당정권의 유치한 술책이란 걸 삼척동자라도 다 알고 있었다.

우리는 마침내 행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228데모 선두에 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먹깨나 쓰는 왈패들도 우리에게 동조하였다. 아침 조회시간에 전교생이 교정에 도열하여 교장선생이

연단에 올라서는 것을 신호로 우리는 행동에 들어가 연단의 교장을 비롯해 선생들을 왈패들이 연금한 다음, 

전교생이 와! 하고 교문으로 달려 갔으나 교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허나 무슨 소용이 있으랴, 육중한 철문이 수많은 학생들의 힘에 밀려 마치 다리가 놓여지듯 쓰러지고

그 위로 삽시간에 전교생이 달려나오는데.

 

그날은 일요일이라 우리는 일거에 텅빈 경북도청까지 달려들어가 점거하고 자유당정권을, 부정선거획책을 규탄하는

구호를 외쳐대다가 도청정문을 걸어잠군 경찰에 독안에 든 쥐처럼 졸지에 포로가 되었었다.

대로상에는 어느새 불자동차가 쉴새없이 왔다갔다하며 물대포를 도청 안으로 쏘아 대었다.

나는 곤봉으로 발을 얻어맞아 운동화 한 짝이 찢어지며 벗겨진 채 사력을 다해 탈출에 성공하여

인근 복잡한 동문동 시장 안 변소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어두워 질때까지 기다렸다.

당시 내무장관인 최인규는 경찰관들 조회시간에 <총은 쏘라고 준 것인데, 무슨 말이 많아!>라며 화를 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나돌고 있던 때였다. 또 삼인조 오인조 부정선거 조직을 짜는데 불평하는 교육공무원들을 모아놓고 

<머슴사는 주제에 주인이 하라면 해야지!>라며 엄포를 놓곤 하였다고 한다.  

데모라는 게 무언지도 모를 시절, 그런 소문을 들었던 나는 겁에 질려 있었다. 

어둑해진 밖으로 살그머니 나오니, 마침 어떤 시장 상인이 자기 집으로 데려가 다락방에 숨겨 주었다. 

너무나 피곤해 잠이 들었었는데, <학생, 내려와 밥먹어!> <경찰이 오면 우리 아들이라 할테니, 걱정말고 내려와!>. . .

인심이 천심이란 말을 이때 실감하였다. 진수성찬이었다.

밤 12시나 되어서야 집에 오니, 부모님들의 기쁨이야. . . 이렇게 419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런 수모를 겪었던 선생님들이 419직후 바로 교권을 지키기 위한

<교원노조운동>에 열을 올린 것은 너무나 당연한 역사의 귀결이라 할 것이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 . (중략). . .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김수영,

그는 건겅한 사회의식을 갖고  현실참여시인으로 종생한 우리 시대의 몇 안 되는

지식인혁명을 외친 불세출의 시인이다.  419를 맞이할 때마다 생각나는 그리운 시인이다.

ps: 한국에서 전교조가 최초로 창설된 지역은 대구이며, 박정희 형도 전교조 출신이었다.

ps2: 쓰레기 개엠병신(mbc)이 개주당을 찍지않은 지역을 연일 씹어대며, 연일 그 지역에 악의적 기사를 쏟아내는 교활하등한 조선그리스도교인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면 민노당에서 개주당으로 돌아섰다는 이유로 한나라 유교 개독당를 찍은 개라도를 옹호하고 있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하기사 이명박 장로를 찬양하는 단아 하등 소박 朝鮮 개독 엠병신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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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말아먹고 공포정치를 시행한 모든 책임은 조선찬양 반일 우파 이승만(개신교)-전두환(천주교)/민주당 조병옥(개신교),수구우파 놈현(천주교)에 있다..

한반도를 장악한 무능 조선그리스도교 세력이 그 악질적 행태를 좌파 박정희(불교)에 전가시켰을 뿐이야.

쓰레기 하등한 조선잔재를 처부수지 않으면 국가도 멸망하고, 그리스도교세도 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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