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한나라와 적대관계이지 관련이 없습니다.
조선 극우의 원래 특징이 반일 조선찬양 개독입니다..
사악하고 무능한 개독 한나라당.. 이승만-전낙지(세례명:베드로)-개영삼-놈현(천주)-이명박 으로 이어지는
교활과 무능과 공포의 반일 조선찬양 개독 극우
독재자 이승만이 기용하여 정치 입문하여.. 개승만 시다바리 역할로 당당히 정치에 입문한 개영삼.. 그러나 이승만과 관련 없는 좌파 박정희가 집권하자 박정희와 싸우며 친미적 태도 견지한 개영삼..
그러나 미국이 사주하여 박정희를 죽이고(원래 미국 공화당은 고문왕 개재규 장로를 왕으로 세우려다 개재규가 멍청해서 일이 틀어지니 개재규한테는 입막음하고 대신 박정희 대통령도 모르게 군부를 장악하던 전두환을 왕으로 세우고 이후 개영삼은 잠깐 쇼하다가 노태우 물러난 이후 베드로 두환과 손잡고 본색..
베드로 낙지 두환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뤄놓은 1)인프라 와 2)세계 3저 현상, 3)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핵무기를 미국에 팔아처먹어 누린 놈일 뿐, 베드로는 무능 그자체..
노태우는 국민직선제 부활을 시킨 명예로운 국민의 대통령임.
개영삼-전두환 무리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전두환의 반란으로 쫓겨난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 최규하 대통령을 추모하며..
군사독재한다고 부자된다고 착각하는 쓰레기들아, 아프리카의 개독국들(에티오피아,우간다등), 천주개독국 필리핀의 마르코스(미국의 원조 처먹고도 거지), 천주개독국 칠레의 피노체트, 정교개독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 모두모두 나라를 말아먹었다
박정희는 군사로 나라 잡았어도 군사와는 관련 없는 사람이다(박정희가 공포정치 안 했다), 공포정치한 이승만이 군인이었냐?
군부 독재 개소리 그만 해라,,
그리고 한나라 쓰레기들이 박정희 띄우는거나, 박정희에 대한 이미지 잘못되었다,, 그게 모두 개독교의 방식이지 (한나라,개주당쓰레기들이 번갈아 이미지 날조하는 것과 달리 박정희 대통령은 공포정치 안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파적 경제 안 좋아했다.)
한나라는 박정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나라의 두 기둥은 베드로(두환)와 김영삼이다..
저기 박정희의 이미지화 방식이 바로.. 내가 말한 개독교의 이미지화 방식 즉 박정희를 악의적으로 왜곡되게 묘사한 것..
이것을 다른 예로 바꿔보면, 이미지화로 인해 사람들이 그 이미지를 하는데 오히려 잘못된 길로 갔던것(놈현), '그리스도교'
이런식으로 이미지를 만든 다음 대입시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방식이다.. 물론 그리스도교는 서양과 관련없는 사악한 중동 사상일뿐..
이명박이 부도덕한 것이 군을 안 다녀와서라는데,, 왜 천주교도인 전두환은 군대 다녀와서 그짓거리 했냐?
이명박도 김영삼이 등용한 놈이고 이명박이 그리스도교계 우파 대표로 박정희에 시위하던 놈이다, 물론 반미하다가 박정희가 죽은 이후 미국이 세운 미국개 낙지 베드로 두환이 반란으로 집권하면서 그 개독세력이 모두 순수 조선인 그리스도인 전두환에게 붙었지..
한나라 알바들 박정희 안 좋아합니다,, 한나라 알바들이 추앙하는 것은 김영삼,전두환이고.. 김영삼은 지금의 이명박처럼 쇼를 위해 참았을 뿐입니다(경제가 망하니 뭔 짓거리할 위세가 안 서죠) 한나라 알바가 괜히 관련도 없는 박정희 괜히 앞세워 자랑하는거나 김영삼욕하는거나 모두 훼이크 쇼입니다..
박정희의 원수이자 무능한 공포정치 이승만을 찬양하고 있는 조선왕조찬양(유교) 개독 극우 조선 쓰레기들..
전두환, 김영삼 지금도 둘이 손잡고 뉴라이트 목사설교 들으러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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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저 새끼가 한 말의 요지가 뭐냐면 자기가 집권 해서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바로 섰다는거야.
근데 저 놈은 국가안전기획부(현재의 국정원) 안풍 사건, 북풍 사건은 물론, 자기를 욕했다고 KBS 부산라디오총국 PD를 안기부에 잡아다가 고문까지 했던 놈이다.
▣ 1994년 그 해 여름 - 조문 파동과 공안정국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무더웠다는 1994년 7월, 북한 주
석 김일성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남북정상회담을
보름 앞두고 사망한 김주석에 대한 조문 표시 여부를 둘러싸고 정
치권은 물론이고 전국이 몸살을 앓았다. 같은 시기 터져 나온 서강
대 박홍 총장의 ‘주사파 발언’은 언론을 통해 연일 확대 재생산됨으
로써 공안정국 조성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냈다. 바로 10년 전,
이 곳에서 벌어졌던 조문 파동과 사상시비를 뒤돌아본다. 사상과
이념의 자유, 그리고 그것에 대한 포용 수준이 그 사회 발전에 얼
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 김일성 주석 사망과 무산된 정상회담
1994년 7월 9일, 여성단체 지도자들과 오찬을 하던 김영삼 대통령
은 메모를 한 장 받은 뒤 얼굴이 굳어졌다. 1분간의 침묵 끝에 옆방
으로 간 그는 모처에 전화를 했다. 맨 먼저 전화를 건 곳은 국방부
장관이었다. 그는 당시 이병태 국방부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전군
비상경계태세를 지시한다. 곧바로 국가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되
었다. 휴전선 이북지역을 50여년간 통치한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
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보름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 한반도는 전쟁 위기의 정점에 있었다. 취임사에서 민족우선
주의를 표방했던 김영삼 대통령, 보수층은 물론 여당 내부의 반발
도 무시하고 이인모 노인을 송환하는 등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펼
쳤지만 북핵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될 무
렵, 카터 전 미대통령의 방북으로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인
결실을 맺었다. 이후 TV 생중계까지 합의되면서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감은 한껏 고조되었지만, 김일성 주석의 사망은 모든 것을 원
점으로 되돌렸다.
* 조문 파동에 휩싸인 대한민국
G7 정상회담을 위해 이탈리아에 있었던 클린턴 미대통령은 기자
회견을 열고 김일성 사망에 대한 애도를 표시했다. 또한 제네바에
서 북미 고위급 회담을 진행 중이던 갈루치는 북한 대표부를 찾아
가 조문을 했다. 이러한 미국의 태도에 대해 김영삼 대통령은 제네
바 한국대사를 통해 강력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미국은 외교적 수
단으로 조문을 선택했고 그 해 10월 제네바 합의에 서명했다.
남한 사회에서 조문 문제는 엉뚱한 형태로 불거졌다. 국회 외무통
일위에서 이부영 민주당 의원이 조문단 파견 용의를 물었던 것을
언론에서 일제히 문제삼은 것이다. 정치권뿐 아니라 재야, 학생운
동권에서도 조문과 애도 표명을 둘러싸고 극렬한 분열에 휩싸였
다. 일부 대학에선 분향소까지 마련돼 공안당국과 보수층을 한층
자극했다. 이부영 민주당 의원, 최환 공안부장, 박범진 민자당 대
변인, 구필모 상이군경회 기획실장 등 조문파동의 중심부에 있었
던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 조문 파동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 박홍과 주사파 그리고 신공안정국
온 나라가 조문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등장한 서강대 박홍 총장
의 ‘주사파 발언’. 그 한마디는 메가톤급 위력을 발휘했다. 단지 말
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사파 색출작업으로 이어지면서, 남한
사회는 급격히 공안정국으로 내달았다. 그 해 7,8월 두 달 동안 국
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 수는 120명으로 이는 94년 상반기
6개월 동안 구속된 사람과 맞먹는 수치. 주사파의 화살은 학문의
영역도 비껴나가지 않았다. 경상대 교양교재인 ‘한국사회의 이해’
가 이적표현물 판정을 받았고, 북한에서 장학금을 받았다는 명목
으로 몇몇 교수들은 안기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실제 박홍 총장
의 ‘주사파 발언’은 검찰 조사에서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지
만, 공안의 바람은 꺾일 줄 몰랐다.
* 공안정국이 남긴 것
- 상처는 10년을 넘어 계속된다
독일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당사자 A씨, 10년 전 그녀는 바이올리
니스트를 꿈꾸던 유학생이었다. 그러나 유학 중 만난 사람과 낙동
강 페놀 유출 사건을 이야기한 것이 국가기밀 누설로 적용 돼 3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청소년 단체 ‘샘’의 회원 40여명은 고
등학교 주사파로 지목돼 조사를 받았다. 주사파가 뭔 줄도 몰랐던
이들 대부분은 이후 자퇴를 하거나 전학을 해야 했다. 간첩 혐의
로 2년간 도피 생활을 해야 했던 이광철씨는 이제 17대 국회의원
이 되었지만, 그의 딸은 아직도 문단속에 철저하고 낯선 사람에 대
한 경계가 심하다. 이제는 누구도 이들이 입었던 상처에 관심을 갖
지 않지만, 그들은 여전히 10년 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잃어버린 5년
그 해 10월, 북한과 미국은 제네바 협정을 체결했고 남한은 미국
대신 경수로 건설 경비를 대기로 했다. 실질적인 회담은 북미간 이
루어졌고, 남한은 뒷돈만 댄 격이다. 2000년 성사된 남북정상회담
에서는 지체한 시간만큼 5억 달러 이상의 경비가 더 추가되었다.
남북 화해협력으로 가는 길목에서 뒷걸음질쳤기 때문에, 남북관계
에서 주도권과 입지를 스스로 축소시킨 채 5년이라는 시간을 허비
한 것이다. 또한 그동안 계속된 냉전의 분위기는 96년 잠수정 침
투 사건, 97년 총풍 기도 사건에까지 이어지면서 소모적인 남북대
결을 지속시키게 된다.
* 10년 후, 2004년 여름
올 4월 용천에서 일어난 대형참사에 보수 신문이나 한나라당마저
도 북한 돕기에 적극적이었다. 6월에는 남북 장성들이 회담을 가지
며 군사 문제를 조율했다. 10년 전에는 상상조차 어려운 일들이었
다. 또한 4.15 선거를 보면 선거철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색깔 시
비에도 크게 휘둘리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0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풍경들이 있다. 올해 들어 한
총련 관계자들이 닷새에 한 명씩 연행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인터
넷에 올라 있는 내용도 국가기밀이라는 판결로 통일연대처장 민경
우씨가 실형을 선고받았다. 국회 앞에서 외로운 1인 시위를 벌이
는 송두율 교수의 부인, 38년 만에 귀국한 그녀의 눈에 보이는 남
한사회는 70년대나 지금이나 별반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2004
년, 10년 전 그 날로부터 우리는 과연 얼마나 멀리 온 것일까?
▣ 프락치
1) ‘문민정부‘의 프락치, 백흥룡 - 안기부 직원의 프락치 공작 육
성 공개!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안기부 개혁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가
거세어지고 야당에서는 안기부법 개정안을 발의한 시점에서 공안
사건이 발생한다. 그 사건은 바로 김삼석 남매간첩단 사건! 93년 9
월 8일, 반전평화운동연합 연구위원 김삼석씨(당시 28세)와
백화점 직원이었던 여동생 은주씨(당시 24세)는 북한 간첩에 포섭
돼 공작금을 지원받는 등 간첩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기소된다. 이
듬해 오빠 김삼석씨에게 징역 4년, 동생에게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의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졌고 판결 이틀 뒤인 94년 10월 28
일, 독일 베를린에선 “나는 2년 동안 안기부 프락치로 활동하며 남
매간첩단 사건 조작을 도왔다”는 백흥용씨가 안기부의 프락치 공
작을 고백하게 된다.
‘문민정부시대에도 그 누구든 프락치의 범주 안에 들어갈 수 있다
‘는 사실을 보여준, 김삼석 남매간첩단 사건! 안기부의 프락치
였던 백흥룡씨와 <민변>의 인터뷰 비디오는 물론, 당시 백씨에게
프락치 활동을 강요하던 안기부 직원들의 얼굴 모습과 백흥룡씨
가 직접 녹음한 프락치 공작에 관한 충격적인 육성 고백을 <이제
는 말할 수 있다>에서 공개한다.
2) 어느 소년 프락치의 고백
- 미성년자를 활용해 ‘가짜 대학생’ 을 만들어라!
90년대 초, 겨우 15살의 나이로 안기부의 사주를 받고 광주 전남
대, 부산 경성대와 부산대, 서울 성균관대, 한양대 등 전국 각지를
돌며 3년간 운동권 학생들의 동향을 파악했던 한 소년이 있었다.
가치관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중학교 2학년 학생에게 돈을
미끼로 술과 담배를 가르치고, 폭행과 고문을 동반한 30여 일간의
프락치 교육으로 가짜 대학생을 만들어낸 공안 기관의 만행!
되돌릴 수 있다면, 그 시절을 다시 살고 싶다는 미성년자 프락치
(현재 29세)를 직접 만나 그의 3년간의 프락치 행적에 대한 고백
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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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민국 안기부의 프락치였습니다.” 1994년 10월 한 청년이 독일 베를린에서 양심선언을 한다. 그의 이름은 백흥룡. 백흥룡은 2년간 안기부의 프락치로 활동했으며 안기부 요원의 지시에 따라 1993년 9월 남매간첩단 사건을 조작했음을 시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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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석 김은주 남매는 1993년 9월 8일 남매 간첩단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연행된다. 각각 징역 4년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의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졌고, 나흘 뒤 백흥룡은 베를린 기자회견을 통해 안기부가 이 사건을 조작했음을 밝혔다. |
조선총독부 해체, 남대문을 숭례문으로 이름바꾸기, 말뚝 뽑기의 쾌거로 imf라는 위용을 달성한 영삼 장로
이승만->전두환->김영삼으로 이어지는 악의 그리스도교 라인
정치승 잡아낸다며 앵사미의 짓거리는 이승만 장로의 대처승 사건(사찰 재산 압류 사건)을 방불케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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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법 민사합의42부(재판장 조수현 부장판사)는 20일 지난 94년 `구국전위'사건 당시 간첩으로 몰려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 판결이 확정된 이광철(45.전주 시민행동21 공동대표)씨 가족이 "증거도 없이 기소전에 간첩이라고 발표한 것은 `피의사실 공표'에 해당한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이씨 가족에게 800만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에따라 앞으로 관련자 기소 이전에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수사기관의 관행에 제동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옛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94년 6,7월 `구국전위사건'을 발표하면서 이씨가 반국가단체에 가입했다고 언론에 밝힐 당시 확보한 증거는 추후 검찰조사 도중 번복된 류모씨의 진술 외에 법률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것이 없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그러나 마치 이씨의 구국전위 가입사실이 확정된 듯이 `전북지역책이00' 등의 표현을 사용해 이후 무죄로 판명된 이씨의 피의사실을 공표했다"며 " 안기부의 이런 피의사실 공표행위는 공공성이나 공익성이 있다 하더라도 진실성 관점에서는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국가는 이씨가 소송을 낸 시점이 피의사실이 공표되고 지명수배가 이뤄진 94년 7월 또는 9월부터 3년이 지나 손배 청구권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 사건의 경우 무죄 판결이 확정된 97년 7월11일이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때'여서 청구권이 있다고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94년 6월 안기부의 구국전위 사건 발표 당시 자신이 전북지역책으로 소개되자 도피했다가 96년 5월 안기부에 자진출석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돼 1심에서 징역 3년6월 및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으나 2,3심에서 "구국전위 상층인사들의 일부 진술 외에는 이 단체 가입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되자 소송을 냈다.
이씨는 재판후 "이번 판결은 공권력에 의해 파괴된 한 가족의 평화를 법원이 인권침해로 인정한 전향적 판결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번 판결을 계기로 공권력의 인권침해 사례가 재발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더욱 교묘해진 고문 - 정신적인 고문
3일간 잠을 안 재운 상태에서 가족들을 같은 방법으로 고문하겠다는 협박에 허위자
백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정화려씨(구국전위사건으로 구속),
일본호텔에서 북한과 내통을 했다는 안기부 요원들의 세뇌에 자신이 호텔로 들어가
는 환상을 보게 되고,
간첩이라고 시인해버렸다는 외국어대 박창희(국가보안법으로 구속) 교수도 정신적
인 고문을 받은 경험을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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