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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은 미트리다테스 대왕(Mithridates the Great).
?~BC 63 소아시아 판티카파이움.
아나톨리아 북부 폰투스의 왕(BC 120~63 재위).
강력한 지도력 아래 작은 주변도시들을 폰투스에 병합해 세력을 넓혔으며, 한때 소아시아에서 로마와 주도권을 다투었다.
그는 폰투스에서 6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미트라다테스라는 이름을 사용한 통치자였다. '미트라 신의 선물'을 뜻하며 종종 미트리다테스라고 잘못 표기되기도 하던 이 이름은 당대의 아나톨리아 통치자들이 흔히 쓴 이름이었다. 어린시절에 아버지 미트라다테스 에우에르게테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BC 120) 수년 간 어머니가 그를 대신해 통치했으나 BC 115년경 어머니를 폐위·투옥한 뒤 단독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미트라다테스는 장기간에 걸친 정복의 첫 활동으로 흑해 동안(東岸)의 크림과 콜치스에 원정군을 파견해 이 지역들을 폰투스 왕국에 합병했다. 케르소네소스타우리카와 킴메리 보스포루 지방(크림과 케르치 해협)에 사는 그리스인들에게는 미트라다테스가 자신들을 스키타이로부터 지켜주는 구원자였으므로 그들은 폰투스 군대의 보호를 받는 대신 기꺼이 자신들의 독립을 포기했다. 그러나 아나톨리아의 폰투스 영토는 미트라다테스 5세가 죽은 뒤 크게 줄어들어 있었다. 파플라고니아가 독립을 선언했으며 프리기아는 BC 116년경 로마의 아시아 속주(屬州)에 통합되었던 것이다. 미트라다테스는 먼저 파플라고니아와 갈라티아를 비티니아 왕 니코메데스 3세와 나누어 가졌고 뒤이어 카파도키아를 놓고는 니코메데스와 분쟁을 일으켰다. 이 2가지 일에서 그는 처음에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뒤에 로마의 연이은 개입(BC 95경, 92경)으로 이권을 모두 박탈당했다. 그는 겉으로는 말없이 승복했지만 속으로는 로마인들을 아시아에서 몰아낼 결심을 했다. 로마인들의 완전한 종복(從僕)이었던 비티니아 왕 니코메데스 4세를 쫓아내려고 한 첫번째 시도는 좌절당했다(BC 90경). 그러자 로마의 부추김을 받은 니코메데스는 폰투스에 쳐들어왔으며 미트라다테스는 로마인들에게 항의하다가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마침내 전쟁을 선포했다(BC 88).
미트라다테스는 니코메데스와 로마군을 쳐부숴 프로폰티스 및 에게 해변으로 몰아냈고 로마의 아시아 속주를 점령했으며, 소아시아 서부의 그리스 도시들 대부분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로도스 같은 몇몇 도시는 끝까지 저항했으며 그의 포위공격은 실패했다. 또한 그리스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으며 아테네와 몇몇 도시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로마 장군 술라는 그리스에서, 핌브리아는 아시아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전투에서 그의 군대를 패배시켰다(BC 86~85). BC 88년 미트라다테스는 아시아에 있는 로마와 이탈리아 주민들을 전원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이때 약 8만 명이 살해되었다고 함), 이것은 그의 범죄행위를 도운 그리스 도시들이 이 일로 인해 로마와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전쟁이 불리해지자 그는 이전에 그리스 도시들에 베풀었던 관용정책을 가혹한 정책으로 바꾸어 추방·살해·노예해방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협박수단을 동원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포정치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도시들은 승자인 로마 편으로 돌아섰다. BC 85년 패배가 뚜렷해지자 그는 다르다노스 조약으로 술라와 평화협정을 맺어 자신의 정복지를 포기하며 함대를 양도하고 거액의 배상금을 치르는 데 동의했다.
이른바 제2차 미트라다테스 전쟁은 로마 장군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가 BC 83년 무턱대고 폰투스를 침공했다가 다음해 격퇴당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적대행동은 미뤄졌으나 끊임없이 분쟁이 벌어지다가 BC 74년 결국 전면전이 일어났다. 미트라다테스는 칼케돈에서 로마 콘술(집정관) 마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를 패배시켰으나, BC 73년 루쿨루스에 의해 키지쿠스 바깥으로 쫓겨나고 추격당해 결국 BC 72년 사위 티그라네스와 함께 아르메니아로 피신했다. 루쿨루스는 BC 69년 티그라노케르타에서, 그리고 이듬해 아르타크사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뒤 자기 부관의 패전과 부대 내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궁지에 빠졌다. BC 66년 루쿨루스 대신 전쟁에 투입된 폼페이우스는 미트라다테스와 티그라네스를 모두 완패시켰다. 이후 미트라다테스는 BC 64년 킴메리보스포루스 반도에 있는 판티카파이움(케르치)에 자리잡고서 도나우 강을 거쳐 이탈리아를 침공할 구상을 하던 중 아들 파르나케스 2세가 이끄는 폰투스 군대의 반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독약을 먹고 자살하려다 실패하자 미트라다테스는 갈리아 출신의 한 용병에게 자신을 죽이도록 명령했다. 그의 시체는 폼페이우스에게 보내졌고, 폼페이우스는 그를 폰투스의 수도 시노페의 왕실묘지에 매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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