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파르마의 카르투지오 수도원에서 발견된 동판(좌)
영화 '아틸라'에서 '마르스의 검'을 쥐고 있는 아틸라(우).
교황 레오 1세와 아틸라의 회담(왼쪽이 레오 1세, 오른쪽이 아틸라)
‘아틸라 황제의 성’을 모형으로 만들고 있다. (사진 :로이터 제공)
훈족은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지역에 있던 민족인데 블레다와 아틸라의 형제 집권기때, 비로소 기틀을 잡았다. 그때에 페르시아와 스키타이등을 정복했고, 이들의 위력에 놀란 고트족, 부르고뉴, 스키타이 등이 훈족 세력에 합세했다.
오해할까봐 미리 말해두는 것은 300년대에 흑해에 정착한 훈족은 2개의 파로 분열되었고 서부 훈족은 계속 서쪽으로 진출한 반면 동부 훈족은 로마가 보낸 자객이 군주를 살해하자 분열되어 동쪽으로 다시 대이동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훈족의 일원으로 함께 싸웠던 백인계 기마민족인 스키타이족이나 게르만족인 부르군트족, 고트족 등의 일부 세력이 동부 훈족에 합세 하여 대이동을 게시한다. 이동 중에 혼혈이 이루어져 게르마노 훈족(White Huns)를 형성한다.
동부 훈족의 마지막 군주의 이름은 도나투스(Donatus)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스키타이가 지배하는 중앙아시아를 지나 5호16국 시대의 혼란한 중국 북부와 초원을 지나 지배력이 약한 미개국 고구려의 산간지역을 지나 한반도로 남하했다.
훈 족이 처음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왔을 때 동서 로마 중 먼저 동로마 제국을 공격했습니다. 422년 훈 족은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도나우 강 하류 지방을 공격하여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로부터 평화를 유지해 주는 대가로 해마다 금 350파운드를 조공을 받았습니다. 435년에는 오늘날의 세르비아를 가로지르는 모라바 강가의 마르구스에서 새로운 조약이 체결되어 동로마 제국은 이전의 금 350파운드에서 700파운드로 두 배의 금을 바쳐야 했고, 도나우 강가에서 훈 족과 동로마 양측이 안전을 보장하는 자유 시장을 열고, 로마가 억류한 모든 훈 족 포로를 넘기라는 훈 족의 요구에 따라야 했습니다. 440년 훈 족과 동로마는 다시 전투를 벌였다가 잠시 휴전했고, 이듬해 훈 족이 다시 동로마를 공격하여 나이수스, 세르디카, 필로폴리스를 함락시켰습니다. 결국 동로마는 보상금 액수를 더 늘리기로 약속했습니다. 443년 아틸라가 훈 족의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훈 족과 동로마의 전쟁은 더욱 더 치열해집니다. 447년 아틸라는 다시 동로마를 공격하여 70여 개에 이르는 도시를 점령하였습니다. 당시 훈 족의 전진속도는 전보다 느렸지만 파괴 정도는 훨씬 더 심했다고 합니다. 테오도시우스 휘하의 게르만 출신 장군인 아르네글리스쿠스는 군대를 이끌고 트라키아에서 훈 족을 맞아 결전을 벌여 훈 족에게 큰 타격을 입히긴 했지만 패배하여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승리한 아틸라는 아르네글리스쿠스군이 전초기지로 삼았던 트라키아 최대의 도시인 마르키아노플을 점령하여 파괴하고, 여세를 몰아 남하하여 그리스를 유린했습니다. 아틸라 군은 심지어 먼 옛날 페르시아군이 그리스군의 강한 저항에 부딪쳤던 테르모필레까지 진군했습니다. 그때 동로마가 해마다 지급하는 보상금의 액수는 이미 6000파운드로 올라가 있었지만 아틸라는 계속 혹독한 요구조건을 내밀었습니다. 그로 인해 동로마의 경제 상태는 심각한 위협에 빠졌고 또한 많은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피해를 견디다 못한 동로마는 아틸라에게 보내는 사절단에 자객을 포함시켜 아틸라를 암살하려고까지 하였으나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갑니다.(아틸라는 그 자객을 목에 100파운드의 금을 넣은 자루를 매게 하여 콘스탄티노플로 돌려보냅니다. 동로마 황제도 아틸라 살해 음모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입니다) 450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말에서 떨어진 부상으로 사망하여 마르키아누스가 새 황제가 되었는데, 그는 해마다 훈 족에게 보냈던 보상금 지급을 중단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아틸라의 관심은 동로마에서 서로마로 옮긴 때라 동로마의 그런 결정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아틸라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으며 동로마 전체를 헤짚고 다녔으나 서로마 제국 황제의 동생과의 에피소드로 인해 서로마로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카탈로니아 전투에서도 서고트족의 왕을 전사시켰고, 카탈로니아 전투 이후에 이탈리아 반도 본토로 처들어가 아퀼레이아라는 아드리아해 연안의 도시를 흔적도 없이 초토화시켰다.(훗날 이 곳의 주민들이 석호로 도망가 세운 것이 베니스 공화국이다.) 만약 아틸라가 서로마로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면 동로마제국 자리에는 훈제국이 세워졌을 것이다. ------------------- |
아시아 민족 중 최초로 유럽을 정복한 민족인 훈족의 업적 중 가장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훈족이 유럽을 정복하기 시작하던 5 세기경의 로마는 당초의 그들의 신인 로마신을 버리고 기독교(유럽의 원래 종교는 로마, 그리스신을 섬기는 종교이며 넓게는 카르타고 신도 포함되며 기독교는 중동의 종교이다.)를 받아들이면서 각종 지진과 가뭄 등으로 급격히 쇠약해지고 있었다.
훈족은 당시 유럽정복에 압서 중앙아시아의 여러 민족들과 페르시아를 정복하여 주변의 수많은 민족들이 훈족과 친해지려 애썼고 실지로 많은 민족들이 훈족의 편에 가담했으며 부족들이 바치는 각종 호화로운 사치품들과 공물들이 훈족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훈족의 지도자였던 블레다가 지지를 받고 있던 동생 아틸라가 정권을 잡을 것을 두려워 하여 살해하려던 음모가 발각되자. 아틸라는 형인 블레다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훈족은 다뉴브 강의 현재 헝가리 일대의 트란실바니아를 거점으로 동로마 제국(이후의 비잔틴 제국)을 쳐들어 갔고 순식간에 그리스와 발칸의 도시들은 점령되었으며(동로마 제 1의 목재 생산지로 유명했던 나이서스라는 도시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후 훈족과 교섭을 하러 온 동로마 사신이 이곳을 찾았을 때 도시 내부에서 시체썩는 냄새가 진동해 도시 성벽 바깥에서 캠프를 쳐야 할 정도였다. 그 외, 아드리아노플, 소피아, 디라치움, 테살로니카 등 수많은 도시가 훈족에게 점령되었다.) 이윽고 역사상 한 번도 점령이 된 적이 없는 최강의 요새 도시이자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이 훈족에게 점령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 때 훈족은 이전까지의 급습이 아니라 공성전을 사용하여 포위망을 좁혀가며 서서히 정복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훈족은 엄청난 보호세를 받는 조건으로 점령을 해제했다.만약 다른 일이 없었다면 훈족은 동로마를 멸망시키고 계속 그리스, 헝가리, 동유럽,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서로마 제국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에게는 아우구스타 호노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답답한 왕궁 생활을 이기지 못 한 그녀가 아틸라에게 보낸 청혼서가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아틸라는 호노리아의 청혼을 거절하였으나 그녀의 집요한 요청에 결국 승락하였으나 문제는 다른 것에 있었다.
아틸라가 결혼식의 지참금으로 갈리아를 요구한 것이다. 갈리아는 현재의 프랑스, 스위스, 독일의 일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광대한 영토였고 서로마 제국 영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곳이었다.
훈족과 동맹으로 편안히 지내고자 했던 서로마 제국으로서는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이것은 거부되었고
아틸라는 동로마를 완전히 지배하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서로마 제국을 치기로 마음먹었다. 훈족은 그들의 충성스러운 여러 게르만 부족과 고트족과 연합하여 갈리아로 처들어갔고 로마의 동맹이었고 갈리아를 지키고 있던 프랑크족과 부르고뉴(부르군트족)의 군대는 격파되 산산히 흩어졌다. 메츠, 랑스, 칸, 파리가 점령되고 이윽고 마지막 로마와 그 동맹의 최후의 거점인 프랑스 남부 오를레앙에 다달았다.
훈족이 거의 오를레앙을 포위할 즘, 말기 로마제국의 명장으로 알려진 아이티우스 장군이 이끄는 대규모 최정예 군대가 오를레앙에 당도했다. 아이티우스는 어렸을 적에 제국황실에 의해 볼모로 보내져 훈족에게서 길러졌으므로 훈족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전술을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이 최초의 세계 대전이라 할 수 있는 '카탈로니아 전투'이다.
각지에서 모여든 고트족, 게르만족, 프랑크족, 로마, 훈족의 연합군이 로마와 훈족의 두 편으로 나누어 싸운 이 전투에서 하룻동안 적게 잡아서 15만, 최대 50만에 이르는 군대가 죽었으며 이 싸움은 몇 일동안 밤낮없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게르만족의 군대는 밤낮으로 시신을 화장해야 했으며, 훈족이 진군한 다뉴브강에서 갈리아에 이르는 영토에 장대에 꽂힌 해골들이 길게 늘어섰다.
이 전투는 몇 일간에 걸쳐 밤낮으로 계속되었고 시냇물은 넘쳐흐르는 피로 급류로 변해버렸고, 죽은 영혼들이 이후에도 계속 싸웠을 정도로 치열한 전쟁이었다.
로마의 편에 가담했던 서고트족의 테오도리쿠스왕이 전사하자 서고트족은 퇴각했으나 어느쪽도 승기를 잡지 못 하고 싸움은 계속되었다.
결국, 훈족은 주술사의 점으로 전쟁을 마치기로 결정하고 전쟁을 그만두었다.
로마와 훈족 모두 거의 모든 전력을 상실한채, 승자도 없이 전쟁은 끝이 났으나 로마의 훈족저지는 어쨌건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런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로마는 거의 모든 병력을 상실한 훈족이 더 이상 갈리아로 처들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지만
훈족은 바로 다음 겨울 알프스를 넘어 로마의 심장부를 공격하였다. 바로 이탈리아 반도이다.
훈족은 비록 완전한 지배권을 획득하지는 못 했지만 갈리아와 이전의 지배 지역에서 약탈한 재원으로 곧바로 강력한 군대를 만들 수 있었다.
아이티우스가 이탈리아에 당도했을 때는 서고트족도 도와주지 않는 참담한 상황에서 싸우게 된다.
훈족군은 파죽지세로 이탈리아 반도로 처들어갔고 '난공불락의 해안요새'로 불리던 아퀼레이아가 훈족의 처음 상대가 되었다. 아퀼레이아는 철저히 파괴되었다.(이 도시는 영원히 사라졌고 이 도시에서 주변 석호로 피난을 간 난민들이 이후 '베니스 공화국'을 세웠다.)
아퀼레이아에 이어 파비아, 피첸자, 베로나, 만토바, 밀라노가 전부 훈족에게 점령 되었으며 이탈리아의 북부는 완전히 아틸라의 수중에 들어갔다.
아틸라가 로마제국군을 격파하고 로마제국의 수도 라벤나로 입성하려던 순간, 발렌티니아누스를 대신해 전권을 쥐게된 교황 포페 레오가 아틸라와 회담을 가질 것을 제의했고 교황은 아틸라가 획득한 지배지에서의 교회와 사원의 재원의 훈족의 지배권(훈족은 무신론 민족이었다.)을 인정해주었고 호노리아 대신 어느 게르만족 여자를 호노리아로 속여 주었다.
그러나 그 여자와의 결혼 첫날밤 아틸라는 여자에게 독살당하고 말았고
영원할 것 같았던 역사상 최강의 민족 훈족의 정복도 8년만에 막을 내리고 만다.
PS: 사실 카탈로니아 평야에서의 전투는 2대1싸움으로 훈족이 졌다고 볼 수도 없으며 훈족이 동로마 원정을 할 때 동로마의 수많은 주요도시들 이를 테면, 테살로니카, 아드리아노플, 소피아, 타치아스같은 수많은 도시들이 아틸라에게 정복되었다. 게다가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에서는 아틸라가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코 앞에 두고 동로마 황제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의 보호비를 해마다 받는다는 계약을 얻어내고 철수 하고 얼마 뒤 서로마 원정을 한 것이다. 아이티우스와 고트족의 인해전술이 아니었다면 세계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이미 그 전에 수많은 도시들이 훈족에게 점령된 상태였다.
훈족은 한걸레-배달 원숭이들과는 관계가 없죠.. 환빠들아 작작해라. 환빠새끼들이 훈족 아틸라는 한민족이라고 구라치고 신라는 흉노냐? 쓰레기같은 환빠놈들아. 세계변방 척박한 만주땅 조금 처먹었다고 고구려를 세계최강이네 하는 환빠들 꼬라지 보면 대책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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