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레리우스 (로마제국 황제, 재위 305~311) 300 ~ 400 2009. 4. 24.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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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아누스 황제를 제외한다면 로마제국에서 최후까지 정통 로마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일 것이다.
그의 죽음이 로마제국 전체와 역사에 얼마나 끔찍한 비극을 불러 왔는가.
로마제국의 동부 지역의 부제(Caesar).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충신, 298년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정벌하고 페르시아 황후와 황태자들을 포로로 잡았다. 도나우강변에 웅거하던 고트족등 야만족을 격퇴하여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게 조언하여 기독교 토벌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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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재위 285~305)는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재위 286~305)를 공동 황제(Augustus)로 지명해 동서로 나누어 통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갈레리우스(Galerius)와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재위 293~306)를 각각의 부황제(Caesar)로 지명하여 제국을 넷으로 나누어 방위를 책임지는 사분(四分) 통치제를 시행하였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황제가 되었고, 세베루스(Severus, 재위 305~307)와 막시미누스(Maximinus, 재위 305~313)가 부황제가 되었다. 306년 콘스탄티우스가 죽자 갈리아(Gallia)의 군대는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280?~337)를 황제로 선포하였지만, 제국의 동부을 통치하던 갈레리우스는 세베루스(Severus)를 서부의 황제로 임명했다. 그러자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Maxentius, 재위 306~312)는 로마에서 스스로를 황제로 선포하고, 아버지 막시미아누스도 다시 황제로 복귀시킨 뒤에 307년 세베루스를 죽였다. 이로써 로마제국은 심각한 정치적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리키니우스(Licinius)는 308년 11월 11일 세베루스를 대신해 갈레리우스에 의해 서부의 황제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막센티우스가 이탈리아, 스페인, 아프리카 지역을, 콘스탄티누스 1세가 갈리아와 브리타니아(britnnia)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헝가리 서부와 오스트리아 동부 지역인 판노니아(Pannonia) 등 일부 속주(屬州)만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311년 갈레리우스가 죽은 뒤에는 동부 지역의 통치권을 둘러싸고 막시미누스와 대립하였다.
312년,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가 막센티우스(Maxentius)를 죽이고 서부의 통치권을 장악하자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 동맹을 추진하였다. 313년 2월, 리키니우스는 메디오라눔(Mediolanum, 지금의 Milano)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異腹) 누이인 콘스탄티아(Flavia Julia Constantia, 293~330?)와 결혼했고, 신앙의 자유와 빼앗은 교회 재산의 반환 등을 밝힌 ‘밀라노칙령(Edict of Milan)’을 콘스탄티누스 1세와 함께 발표하였다. 그리고 313년 4월, 막시미누스가 발칸반도의 남동부인 트라키아(Thracia)를 공격해오자 추룰룸(Tzirallum) 전투에서 이를 물리쳤다. 소아시아(Anatolia)로 퇴각한 막시미누스가 병으로 죽어 리키니우스는 동부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이후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로마제국 사상 처음으로 허용하는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게 되며 헬레니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의 죽음이 로마제국 전체와 역사에 얼마나 끔찍한 비극을 불러 왔는가.
로마제국의 동부 지역의 부제(Caesar).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충신, 298년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정벌하고 페르시아 황후와 황태자들을 포로로 잡았다. 도나우강변에 웅거하던 고트족등 야만족을 격퇴하여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게 조언하여 기독교 토벌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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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로마제국의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재위 285~305)는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재위 286~305)를 공동 황제(Augustus)로 지명해 동서로 나누어 통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갈레리우스(Galerius)와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 재위 293~306)를 각각의 부황제(Caesar)로 지명하여 제국을 넷으로 나누어 방위를 책임지는 사분(四分) 통치제를 시행하였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가 황제가 되었고, 세베루스(Severus, 재위 305~307)와 막시미누스(Maximinus, 재위 305~313)가 부황제가 되었다. 306년 콘스탄티우스가 죽자 갈리아(Gallia)의 군대는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280?~337)를 황제로 선포하였지만, 제국의 동부을 통치하던 갈레리우스는 세베루스(Severus)를 서부의 황제로 임명했다. 그러자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Maxentius, 재위 306~312)는 로마에서 스스로를 황제로 선포하고, 아버지 막시미아누스도 다시 황제로 복귀시킨 뒤에 307년 세베루스를 죽였다. 이로써 로마제국은 심각한 정치적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리키니우스(Licinius)는 308년 11월 11일 세베루스를 대신해 갈레리우스에 의해 서부의 황제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막센티우스가 이탈리아, 스페인, 아프리카 지역을, 콘스탄티누스 1세가 갈리아와 브리타니아(britnnia)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헝가리 서부와 오스트리아 동부 지역인 판노니아(Pannonia) 등 일부 속주(屬州)만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311년 갈레리우스가 죽은 뒤에는 동부 지역의 통치권을 둘러싸고 막시미누스와 대립하였다.
312년,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가 막센티우스(Maxentius)를 죽이고 서부의 통치권을 장악하자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와 동맹을 추진하였다. 313년 2월, 리키니우스는 메디오라눔(Mediolanum, 지금의 Milano)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이복(異腹) 누이인 콘스탄티아(Flavia Julia Constantia, 293~330?)와 결혼했고, 신앙의 자유와 빼앗은 교회 재산의 반환 등을 밝힌 ‘밀라노칙령(Edict of Milan)’을 콘스탄티누스 1세와 함께 발표하였다. 그리고 313년 4월, 막시미누스가 발칸반도의 남동부인 트라키아(Thracia)를 공격해오자 추룰룸(Tzirallum) 전투에서 이를 물리쳤다. 소아시아(Anatolia)로 퇴각한 막시미누스가 병으로 죽어 리키니우스는 동부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이후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로마제국 사상 처음으로 허용하는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게 되며 헬레니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연도 |
황제 |
박해의 유형 및 범위 |
대표적인 순교자 |
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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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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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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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1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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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1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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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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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2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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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2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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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2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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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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