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의 역사(유대경 신화 포함) 세계사 개관 2009. 4. 20.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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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렷한 정부" 가 없는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수시로 주변국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사실 국제법이 없는 시대에,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요충지에 자리한 젖과 꿀이 흐르는 유망한 부동산이 평화로이 소수 민족에게 독점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스라엘은 원주민들의 도시국가나 이집트 인, 아람인 등의 빈번한 공격에 노출되었으며, 상당 기간 동안은 종속 상태에 놓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BC 1030년 경에 왕정 제도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1세대만에 왕가가 뒤바뀌고, 3대가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12지파 가운데 10개 지파가 연합해 기존 왕가를 무시하고 북방 이스라엘 왕조를 열어 버리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다른 열 지파와 분리된 두 지파-유다와 벤자민은 별개로 남방에 "유대 왕국" 을 설립했는데, 이후 북방 이스라엘의 민족은 사마리아인으로, 남방 유대의 민족은 유대인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현대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유대인들은 유대 왕국의 후손에 해당한다.
북방 이스라엘은 독자적인 왕조를 이어나가다 BC 722년 경에 앗시리아의 살마네세르 5세에게 패망하고 대다수의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져 역사상에서 종적을 감췄다.
분열된 유대 왕국 역시 순탄한 역사를 걷지는 못했다. 이집트, 앗시리아 등 다양한 국가들이 유대를 공격했으며, 대부분의 경우 정치적 종속을 택하거나 공물을 바치며 가까스로 위기를 극복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BC 597 년에는 그런 치욕스런 행운조차 따르지 않았다.
당대 최강국이었던 신 바빌로니아, 칼데아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 왕에게 침공당한 유대 왕국은 수도 예루살렘을 함락당하고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압송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바빌로니아 군이 퇴각한 이후 유대 왕국은 이집트의 세력권에 들어가 바빌로니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는데, 바빌로니아는 이에 BC 586년 재침공으로 응수했다.
이 공격에서 예루살렘 성은 물론 제정일치 사회의 정신적 근원이었던 성전산의 성전까지 모두 파괴되었고, 왕족과 주요 관리, 각종 재물은 물론 성전의 기물, 성물까지 모조리 약탈당해 수도 바빌론으로 넘어가 버렸다.
또한 BC 582 년에는 다시 병력을 동원해 예루살렘과 그 인근에 집중되었던 유대 왕국의 엘리트와 많은 국민들을 바빌로니아 본토로 압송하고, 다수의 현지민도 정치적 결집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흩어버리는 강력한 탄압 정책을 추진했다.
이때 최초의 대규모 예리다(Yeridah, 유대인의 이주) 히브리어로는 Galut 라 불리는 유대인의 타국 유배와 현지 정착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때 모든 유대인들이 고향에서 쫒겨나거나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것은 아니었다.
압송된 포로는 일부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바빌로니아가 몇 차례에 걸쳐 압송한 포로들에 대한 제한적 귀향을 승인함에 따라 상당수가 고향으로 돌아갔고 (이런 귀향은 알리야Alyah 라고 한다) 그보다 많은 수가 자발적으로 바빌론 거주를 택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 예리다와 유수의 형성이 가지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종교적 약속을 상징하는 예루살렘과 성전의 함락, 영광이 약속되었던 유대 왕조의 멸절과 같은 종교-정치적 충격과, 유배사회에서 경험하게 된 강렬한 탄압은 유대교에게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약속된 땅-카나안이나 성전에서 바치는 희생 제물과 같은 종래의 종교의식에서 강제로 분리되자, 기존의 유대교적 종교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성전과 제사장과 희생제물" 로 대표되는 기존의 종교적 연결을 대신하기 위해 지역 회당이 형성되고, 기도가 크게 확산되었다.
또한 유배된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다니엘, 예제키엘 등의 선지자들이 출현해, 기존의 "선택받은 민족" 에 대한 가르침을 현세의 고난과 연결하기 위해 묵시론이나 구원론, 그리고 그에 대한 예언과 같은 양식을 도입했는데, 이런 특성들은 이때부터 후기 유대교의 주요한 형식들로서 유대교 내에 정착되기 시작했다.
이런 종교적 변화는 국가와 성전이라는 사회적 종교적 구심점을 잃은 상황에서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은 BC 538년에 유대인 제룹바벨이 간청한 대규모 귀향과 성전 재건을 승인했는데, 이를 통해 유대인들은 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성전의 복원이 가능해졌다는 의미에서 기존의 소규모 귀향 사례와 구별된다.
하지만 성전이 다시 세워지고 희생제물을 태우는 연기가 다시 피어오르긴 했어도 여전히 유대는 페르시아의 속령이었다. 유대 왕조는 사실상 그 명맥이 다했으며 유대 지방의 실질적인 통치자는 예루살렘의 왕좌에 앉은 다윗의 후손이 아닌 페르시아의 총독이었다.
성전 재건으로 종교적-민족적 정체성은 (제한적으로나마) 회복했어도, 주권만은 회복하지 못한 것이다.
한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끄는 마케도니아가 BC 331 년에 페르시아를 완전히 패퇴시킴에 따라, 유대 지방은 자연스레 헬레닉(그리스인들이 오리엔트를 정복하면서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과 그리스(헬레니즘)화 된 오리엔트 지역을 이름.)에 편입되었고, 유대인들도 헬레닉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었다.
페르시아 시절부터 해안에 살던 원주민들이나 페니키아인들이 유대인들을 강제로 잡아 헬레닉 세계에 노예로 판매하곤 했으나, 마케도니아 점령기 이후의 유대인 확산은 노예가 아닌 직업 차원에서 이뤄졌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헬레닉 문명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다신교 문명권 답게 신앙의 강요와 신전 약탈을 승자의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던 그리스인들의 행동은 무장저항을 포함한 유대인들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다. 실제로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그리스의 정책에 강경히 반발하는 유대인들을 진압하며 (이때 또 한번 예루살렘이 정복당했다) 많은 유대인들을 이주시키거나 포로로 잡아가 현지에 정착시켰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적으로 유출된 유대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 시절부터 차츰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그들의 왕과 지휘관이 납득하는 범주 내에서 공동체를 구성하고 종교 의식을 치렀다.
이는 이미 바빌로니아 유수 당시 바빌론에 형성되었던 유대인 공동체와 유사한 것으로, 이런 민족 집단의 형성을 통해 유대인들은 국가를 잃고 그리스식 이름을 사용하면서도 지역/집단 내의 공동체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한편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 등의 그리스 지배자들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유대나 옛 바빌로니아 지방에서 다수의 유대교 성직자들을 각지로 강제 이주시키곤 했는데, 이런 유대교 성직자의 확산은 결과적으로 유배지 인근에 형성된 유대인 소집단의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형성되기 시작한 헬레닉 세계의 이주된 유대교 는 노예, 용병을 시작으로, 유대 밖으로 자발적 의사에 따라 이주한 농부나 수공업자, 상인 등의 이주로 크게 확산되었으며, 현지에서도 유대교의 고유 의식인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유대교는 기본적으로 민족 종교이지만, 개종을 통해 유대신앙을 받아들일 경우 유대교로 인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 본국에서 정책을 내려보내면 유대에서는 대책을 세우는 사회적 대립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특히 셀레우코스 왕조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곳에 제우스 신전을 세우려 하자, 유대인들은 대제사장 마카베오의 가문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BC 165년에 하스몬 왕조(Hasmonaean Dynasty) 라는 독립국을 세웠다.
그러나 420년만에 세워진 이 유대인 독립국은 백여년이 지난 BC63년 로마에 의해 정복당했고, 유대 지방은 다시 로마의 속령으로 전락했다.
이에 따라 바빌론 유수(대이주) 형성시 시작된 묵시론과 구원론은 점차 그 형태를 극화하여 유대인을 고난에서 구원하고 이스라엘을 영원한 영광의 신치국(이라 쓰고 이상사회라 읽는다)으로 완성할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형태로 변해 갔다.
이런 종교관은 유대인들의 적극적인 대 로마 항쟁으로 이어졌다. 이 기간에 로마에 대항해 민족적 무장항쟁을 시도했던 열심당 등의 강경파 집단이 형성되었으며, 이들은 산발적 저항을 거쳐 AD 66년에 유대 전역에 걸친 대 로마 항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로마는 6만에 이르는 대병력을 투입해 유대지역 전역을 일소해 버렸으며, 유대 지방의 사회-종교적 구심점인 예루살렘과 중건된 성전조차도 티투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 10군단 프레텐시스에게 점령당해 폐허로 변해 버렸다.
얼마 남지 않은 유대인 저항군은 마사다 요새로 들어가 항거를 계속했지만 이마저도 AD 72년에 10군단 지휘를 승계한 플라비우스 실바의 맹공에 무너졌고, 마사다 점령을 마지막으로 1차 유대-로마 전쟁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티투스 황제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는 중건된 성전의 파괴라는 측면에서 바빌로니아의 BC 586년 공격에 비견되곤 하지만, 성전은 파괴되었어도 여전히 유대지방의 저항의지는 남아 있었다.
AD 115년에도 2년에 걸친 유대인들의 반란이 있었으며, 이를 계기로 로마는 아예 유대 지역에 강력한 2개 군단을 주둔시켜버렸다.
AD 130년대 초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로마 전토에 할례 금지령을 내렸는데, 할례를 민족적 종교적 필수 의식으로 받아들이던 유태인들은 이 지시에 크게 반발했으며, AD 132년에 유대 지방에서 바르 코크바(벤 코제바, 바르 코제바, 도는 벤 코지바라 불린다)가 잔존 유대인들을 이끌고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가장 존경받던 랍비 아키바는 바르 코크바를 메시아로 선포하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135년에 브리타니아 총독 율리우스 세베루스 장군에게 5군단 마케도니아와 11군단 클라우디아 등을 위임해 유대 지방을 정벌하도록 했다.
3차 유대-로마 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에서 엉성하게나마 재건되려던 예루살렘이 다시 한번 파괴당하고 그 과정에서 50만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살해당하거나 공개 처형 되었으며, 반란의 핵심 인물이었던 바르 코크바와 랍비 아키바 역시 로마군에게 살해당했다.
로마는 이를 계기로 유대인의 성전 재건이 완전히 불가능하도록 예루살렘 시가지에는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라는 시가지를 구성하고, 유대인들의 아엘리아 카피톨리나 출입은 1년 중 단 하루, 즉 성전파괴일 (아브월 9일) 에만 허용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후 여력이 되는 유대인들은 아브월 9일마다 유일하게 남은 옛 예루살렘의 흔적인 서쪽 성벽에 모여 통곡하는 관습이 생겼다.
또한 이후 로마는 유대(Judaea) 라는 이름을 완전히 버리고, 팔레스티나(팔레스타인)이라는 옛 이름을 부활시켰다. 유대라는 이름이 2000년 만에 지도 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소실, 두 차례 반란의 처참한 패배는 유대교의 형태를 크게 변화시켰다.
파괴된 성전을 대신해 바빌론 유수때와 같은 "기도" 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으며, 이를 위해 공식적인 기도문들과 시간과 상황에 맞는 기도의 형식과 같은 현대 유대교의 기본 형식이 채택되기 시작했다.
이때 유대인의 종교적 지도자였던 야브네의 가말리엘은 이전까지 내려오던 기도문을 정리해 공식화 했는데, 그가 정리한 기도문 가운데 하루 세 번 기도하도록 명시된 Shemoneh Esreh (18구 기도문)은 메시아의 도래와 이스라엘로의 귀환, 예루살렘의 회복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유대교의 신앙에 "귀향 Alyah" 의 소망이 직접적인 형식으로 포함된 첫 사례였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시대와 달리, 이 당시에는 유대지방에 거주하는 유대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로마 세계 각국에 퍼져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현지 태생이었으며, 지역별로 유대인 공동체를 구성하며 유대인의 종교와 생활 양식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안정된 생활권을 확보한 현지의 생활을 버리고 잦은 반란으로 인해 피폐화된 유대로 돌아갈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다.
당장 바빌론 점령 이후 하스몬 왕조 일백여년과 짧은 반란기를 제외하면 어느 순간도 독립국가로 남지 못했던 그들로서는 독립국가에 대한 뚜렷한 인상을 잡는것 부터가 쉽지 않다는 것도 문제였다.
또한 최전성기를 향해 달려가는 로마에 대항해 유대인들이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그들의 메시아가 대지에 서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많은 랍비들은 팔레스타인-옛 이스라엘을 인간의 힘으로 되찾아야 할 곳이 아닌 "메시아 이후 돌아갈 약속의 땅" 으로 가르쳤다. 이런 경향은 유대교의 성격을 점차적으로 멜랑콜릭한 방향으로 몰아갔다.
물론 그 사이에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려 18세기 초에는 덴마크에서 태어난 유태인 출신 상인인 올리거 파울리 Oliger Paulli 는 흑해와 홍해 사이에 유대왕국을 세워 전 유럽의 유대인을 그곳에 이주시키자는 제안을 했으며, 이 주장은 무려 기독교권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했다.
1세기 후에는 나폴레옹이 민법전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일반인과 대등한 법적 권리를 부여함과 동시에, 1799년에는 팔레스타인의 소유권이 유대인에게 있음을 선언하기도 했다.(비기독교인이었던 나폴레옹이었기에 이것은 기독교를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였음.)
1825년에는 미국 독립 50주년 기념으로 유대계 미국인 모르데카이 마누엘 노아 Mordecai Manuel Noah 가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에 위치한 그랜드아일랜드라는 섬을 점유해 아라라트Ararat 라는 유대인 자유도시 건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무려 잃어버린 10지파(사마리아를 뜻한다) 까지 포함한 노아의 원데한 계획은 노아가 아라라트에 도시를 세운다는 언어유희적 센스는 훌륭했으나 현실적으로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았고, 끝내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심지어 미국의 유태인 종교지도자 모임인 미국 랍비 중앙 협의회는 1885년에 유대인들이 더 이상 이스라엘로 귀환할 소망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피츠버그 강령을 선포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이 근 1900여년 전에 잃어버린 약속된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또다른 계기가 필요했다.
사실 국제법이 없는 시대에,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요충지에 자리한 젖과 꿀이 흐르는 유망한 부동산이 평화로이 소수 민족에게 독점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스라엘은 원주민들의 도시국가나 이집트 인, 아람인 등의 빈번한 공격에 노출되었으며, 상당 기간 동안은 종속 상태에 놓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BC 1030년 경에 왕정 제도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1세대만에 왕가가 뒤바뀌고, 3대가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12지파 가운데 10개 지파가 연합해 기존 왕가를 무시하고 북방 이스라엘 왕조를 열어 버리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다른 열 지파와 분리된 두 지파-유다와 벤자민은 별개로 남방에 "유대 왕국" 을 설립했는데, 이후 북방 이스라엘의 민족은 사마리아인으로, 남방 유대의 민족은 유대인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현대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유대인들은 유대 왕국의 후손에 해당한다.
북방 이스라엘은 독자적인 왕조를 이어나가다 BC 722년 경에 앗시리아의 살마네세르 5세에게 패망하고 대다수의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져 역사상에서 종적을 감췄다.
분열된 유대 왕국 역시 순탄한 역사를 걷지는 못했다. 이집트, 앗시리아 등 다양한 국가들이 유대를 공격했으며, 대부분의 경우 정치적 종속을 택하거나 공물을 바치며 가까스로 위기를 극복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BC 597 년에는 그런 치욕스런 행운조차 따르지 않았다.
당대 최강국이었던 신 바빌로니아, 칼데아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 왕에게 침공당한 유대 왕국은 수도 예루살렘을 함락당하고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압송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바빌로니아 군이 퇴각한 이후 유대 왕국은 이집트의 세력권에 들어가 바빌로니아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는데, 바빌로니아는 이에 BC 586년 재침공으로 응수했다.
이 공격에서 예루살렘 성은 물론 제정일치 사회의 정신적 근원이었던 성전산의 성전까지 모두 파괴되었고, 왕족과 주요 관리, 각종 재물은 물론 성전의 기물, 성물까지 모조리 약탈당해 수도 바빌론으로 넘어가 버렸다.
또한 BC 582 년에는 다시 병력을 동원해 예루살렘과 그 인근에 집중되었던 유대 왕국의 엘리트와 많은 국민들을 바빌로니아 본토로 압송하고, 다수의 현지민도 정치적 결집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흩어버리는 강력한 탄압 정책을 추진했다.
이때 최초의 대규모 예리다(Yeridah, 유대인의 이주) 히브리어로는 Galut 라 불리는 유대인의 타국 유배와 현지 정착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때 모든 유대인들이 고향에서 쫒겨나거나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것은 아니었다.
압송된 포로는 일부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바빌로니아가 몇 차례에 걸쳐 압송한 포로들에 대한 제한적 귀향을 승인함에 따라 상당수가 고향으로 돌아갔고 (이런 귀향은 알리야Alyah 라고 한다) 그보다 많은 수가 자발적으로 바빌론 거주를 택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 예리다와 유수의 형성이 가지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았다.
종교적 약속을 상징하는 예루살렘과 성전의 함락, 영광이 약속되었던 유대 왕조의 멸절과 같은 종교-정치적 충격과, 유배사회에서 경험하게 된 강렬한 탄압은 유대교에게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약속된 땅-카나안이나 성전에서 바치는 희생 제물과 같은 종래의 종교의식에서 강제로 분리되자, 기존의 유대교적 종교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성전과 제사장과 희생제물" 로 대표되는 기존의 종교적 연결을 대신하기 위해 지역 회당이 형성되고, 기도가 크게 확산되었다.
또한 유배된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다니엘, 예제키엘 등의 선지자들이 출현해, 기존의 "선택받은 민족" 에 대한 가르침을 현세의 고난과 연결하기 위해 묵시론이나 구원론, 그리고 그에 대한 예언과 같은 양식을 도입했는데, 이런 특성들은 이때부터 후기 유대교의 주요한 형식들로서 유대교 내에 정착되기 시작했다.
이런 종교적 변화는 국가와 성전이라는 사회적 종교적 구심점을 잃은 상황에서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은 BC 538년에 유대인 제룹바벨이 간청한 대규모 귀향과 성전 재건을 승인했는데, 이를 통해 유대인들은 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성전의 복원이 가능해졌다는 의미에서 기존의 소규모 귀향 사례와 구별된다.
하지만 성전이 다시 세워지고 희생제물을 태우는 연기가 다시 피어오르긴 했어도 여전히 유대는 페르시아의 속령이었다. 유대 왕조는 사실상 그 명맥이 다했으며 유대 지방의 실질적인 통치자는 예루살렘의 왕좌에 앉은 다윗의 후손이 아닌 페르시아의 총독이었다.
성전 재건으로 종교적-민족적 정체성은 (제한적으로나마) 회복했어도, 주권만은 회복하지 못한 것이다.
한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끄는 마케도니아가 BC 331 년에 페르시아를 완전히 패퇴시킴에 따라, 유대 지방은 자연스레 헬레닉(그리스인들이 오리엔트를 정복하면서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과 그리스(헬레니즘)화 된 오리엔트 지역을 이름.)에 편입되었고, 유대인들도 헬레닉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었다.
페르시아 시절부터 해안에 살던 원주민들이나 페니키아인들이 유대인들을 강제로 잡아 헬레닉 세계에 노예로 판매하곤 했으나, 마케도니아 점령기 이후의 유대인 확산은 노예가 아닌 직업 차원에서 이뤄졌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헬레닉 문명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다신교 문명권 답게 신앙의 강요와 신전 약탈을 승자의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던 그리스인들의 행동은 무장저항을 포함한 유대인들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다. 실제로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그리스의 정책에 강경히 반발하는 유대인들을 진압하며 (이때 또 한번 예루살렘이 정복당했다) 많은 유대인들을 이주시키거나 포로로 잡아가 현지에 정착시켰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적으로 유출된 유대인들은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 시절부터 차츰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은 그들의 왕과 지휘관이 납득하는 범주 내에서 공동체를 구성하고 종교 의식을 치렀다.
이는 이미 바빌로니아 유수 당시 바빌론에 형성되었던 유대인 공동체와 유사한 것으로, 이런 민족 집단의 형성을 통해 유대인들은 국가를 잃고 그리스식 이름을 사용하면서도 지역/집단 내의 공동체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한편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 등의 그리스 지배자들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유대나 옛 바빌로니아 지방에서 다수의 유대교 성직자들을 각지로 강제 이주시키곤 했는데, 이런 유대교 성직자의 확산은 결과적으로 유배지 인근에 형성된 유대인 소집단의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형성되기 시작한 헬레닉 세계의 이주된 유대교 는 노예, 용병을 시작으로, 유대 밖으로 자발적 의사에 따라 이주한 농부나 수공업자, 상인 등의 이주로 크게 확산되었으며, 현지에서도 유대교의 고유 의식인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유대교는 기본적으로 민족 종교이지만, 개종을 통해 유대신앙을 받아들일 경우 유대교로 인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 본국에서 정책을 내려보내면 유대에서는 대책을 세우는 사회적 대립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특히 셀레우코스 왕조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곳에 제우스 신전을 세우려 하자, 유대인들은 대제사장 마카베오의 가문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BC 165년에 하스몬 왕조(Hasmonaean Dynasty) 라는 독립국을 세웠다.
그러나 420년만에 세워진 이 유대인 독립국은 백여년이 지난 BC63년 로마에 의해 정복당했고, 유대 지방은 다시 로마의 속령으로 전락했다.
이에 따라 바빌론 유수(대이주) 형성시 시작된 묵시론과 구원론은 점차 그 형태를 극화하여 유대인을 고난에서 구원하고 이스라엘을 영원한 영광의 신치국(이라 쓰고 이상사회라 읽는다)으로 완성할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형태로 변해 갔다.
이런 종교관은 유대인들의 적극적인 대 로마 항쟁으로 이어졌다. 이 기간에 로마에 대항해 민족적 무장항쟁을 시도했던 열심당 등의 강경파 집단이 형성되었으며, 이들은 산발적 저항을 거쳐 AD 66년에 유대 전역에 걸친 대 로마 항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로마는 6만에 이르는 대병력을 투입해 유대지역 전역을 일소해 버렸으며, 유대 지방의 사회-종교적 구심점인 예루살렘과 중건된 성전조차도 티투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 10군단 프레텐시스에게 점령당해 폐허로 변해 버렸다.
얼마 남지 않은 유대인 저항군은 마사다 요새로 들어가 항거를 계속했지만 이마저도 AD 72년에 10군단 지휘를 승계한 플라비우스 실바의 맹공에 무너졌고, 마사다 점령을 마지막으로 1차 유대-로마 전쟁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티투스 황제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는 중건된 성전의 파괴라는 측면에서 바빌로니아의 BC 586년 공격에 비견되곤 하지만, 성전은 파괴되었어도 여전히 유대지방의 저항의지는 남아 있었다.
AD 115년에도 2년에 걸친 유대인들의 반란이 있었으며, 이를 계기로 로마는 아예 유대 지역에 강력한 2개 군단을 주둔시켜버렸다.
AD 130년대 초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로마 전토에 할례 금지령을 내렸는데, 할례를 민족적 종교적 필수 의식으로 받아들이던 유태인들은 이 지시에 크게 반발했으며, AD 132년에 유대 지방에서 바르 코크바(벤 코제바, 바르 코제바, 도는 벤 코지바라 불린다)가 잔존 유대인들을 이끌고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가장 존경받던 랍비 아키바는 바르 코크바를 메시아로 선포하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135년에 브리타니아 총독 율리우스 세베루스 장군에게 5군단 마케도니아와 11군단 클라우디아 등을 위임해 유대 지방을 정벌하도록 했다.
3차 유대-로마 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에서 엉성하게나마 재건되려던 예루살렘이 다시 한번 파괴당하고 그 과정에서 50만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살해당하거나 공개 처형 되었으며, 반란의 핵심 인물이었던 바르 코크바와 랍비 아키바 역시 로마군에게 살해당했다.
로마는 이를 계기로 유대인의 성전 재건이 완전히 불가능하도록 예루살렘 시가지에는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라는 시가지를 구성하고, 유대인들의 아엘리아 카피톨리나 출입은 1년 중 단 하루, 즉 성전파괴일 (아브월 9일) 에만 허용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이후 여력이 되는 유대인들은 아브월 9일마다 유일하게 남은 옛 예루살렘의 흔적인 서쪽 성벽에 모여 통곡하는 관습이 생겼다.
또한 이후 로마는 유대(Judaea) 라는 이름을 완전히 버리고, 팔레스티나(팔레스타인)이라는 옛 이름을 부활시켰다. 유대라는 이름이 2000년 만에 지도 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소실, 두 차례 반란의 처참한 패배는 유대교의 형태를 크게 변화시켰다.
파괴된 성전을 대신해 바빌론 유수때와 같은 "기도" 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으며, 이를 위해 공식적인 기도문들과 시간과 상황에 맞는 기도의 형식과 같은 현대 유대교의 기본 형식이 채택되기 시작했다.
이때 유대인의 종교적 지도자였던 야브네의 가말리엘은 이전까지 내려오던 기도문을 정리해 공식화 했는데, 그가 정리한 기도문 가운데 하루 세 번 기도하도록 명시된 Shemoneh Esreh (18구 기도문)은 메시아의 도래와 이스라엘로의 귀환, 예루살렘의 회복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유대교의 신앙에 "귀향 Alyah" 의 소망이 직접적인 형식으로 포함된 첫 사례였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시대와 달리, 이 당시에는 유대지방에 거주하는 유대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로마 세계 각국에 퍼져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현지 태생이었으며, 지역별로 유대인 공동체를 구성하며 유대인의 종교와 생활 양식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안정된 생활권을 확보한 현지의 생활을 버리고 잦은 반란으로 인해 피폐화된 유대로 돌아갈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다.
당장 바빌론 점령 이후 하스몬 왕조 일백여년과 짧은 반란기를 제외하면 어느 순간도 독립국가로 남지 못했던 그들로서는 독립국가에 대한 뚜렷한 인상을 잡는것 부터가 쉽지 않다는 것도 문제였다.
또한 최전성기를 향해 달려가는 로마에 대항해 유대인들이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그들의 메시아가 대지에 서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많은 랍비들은 팔레스타인-옛 이스라엘을 인간의 힘으로 되찾아야 할 곳이 아닌 "메시아 이후 돌아갈 약속의 땅" 으로 가르쳤다. 이런 경향은 유대교의 성격을 점차적으로 멜랑콜릭한 방향으로 몰아갔다.
물론 그 사이에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려 18세기 초에는 덴마크에서 태어난 유태인 출신 상인인 올리거 파울리 Oliger Paulli 는 흑해와 홍해 사이에 유대왕국을 세워 전 유럽의 유대인을 그곳에 이주시키자는 제안을 했으며, 이 주장은 무려 기독교권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했다.
1세기 후에는 나폴레옹이 민법전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일반인과 대등한 법적 권리를 부여함과 동시에, 1799년에는 팔레스타인의 소유권이 유대인에게 있음을 선언하기도 했다.(비기독교인이었던 나폴레옹이었기에 이것은 기독교를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였음.)
1825년에는 미국 독립 50주년 기념으로 유대계 미국인 모르데카이 마누엘 노아 Mordecai Manuel Noah 가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에 위치한 그랜드아일랜드라는 섬을 점유해 아라라트Ararat 라는 유대인 자유도시 건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무려 잃어버린 10지파(사마리아를 뜻한다) 까지 포함한 노아의 원데한 계획은 노아가 아라라트에 도시를 세운다는 언어유희적 센스는 훌륭했으나 현실적으로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았고, 끝내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심지어 미국의 유태인 종교지도자 모임인 미국 랍비 중앙 협의회는 1885년에 유대인들이 더 이상 이스라엘로 귀환할 소망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피츠버그 강령을 선포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이 근 1900여년 전에 잃어버린 약속된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또다른 계기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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