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변천        세계사 개관  2009. 4. 21.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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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일어났던 문명을 말합니다.
메소포타미아란 '두 강 사이의 땅'이란 뜻으로 비옥한 반달 모양의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유역을 말합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지리적 요건 때문에 외부와의 교섭이 빈번하여 정치·문화적 색채가 복잡하였습니다.
폐쇄적인 이집트 문명과는 달리 두 강 유역은 항상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교체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에 전개된 문화는 개방적, 능동적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변천]

1. 수메르 도시국가 (BC 3000)

수메르인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동부 산악 지대에 살다가 메소포타미아 남부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원래 거주지에 있을 때부터 어느 정도 문명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는 금속과 돌을 함께 사용하는 문명이 알루바이드, 우르크 등과 같은 지역을 중심으로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
여기에 수메르인들이 나타난 것은 B.C3000년경이었다.

정치 - 왕은 신의 대리자로서 최고의 사제가 되었으며, 신권 정치가 실시되었다.
신관, 관료, 전사 등이 지배 계층이었습니다.
지구라트(Ziggurat)라는 큰 탑을 가진 신전이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경제 - 교역이 일어남에 따라 상인이나 공인도 나타나게 되었다.
법전 - 세계 최고의 성문법인 수메르 법이 1947년부터 발굴되었다.


2. 아카드 왕조 (BC 2300)

아카드인(셈족)은 우르에 근거지를 두고 수메르인 주위에 살았었습니다.
B.C 2350년경 아카드인이 수메르인을 정복하고 처음으로 통일 왕국을 세웠으나 오래 지탱하지 못하였다.


3. 고 바빌로니아, 아무르 시대 (BC 1800)

아무르인들이 다시 이 지역을 통일하고 바빌론에 도읍지를 정하고 바빌로니아 왕국을 건설하였다.
함무라비(Hammurabi) 대왕은 B.C 18세기경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고 '함무라비 법전'을 편찬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다.
 

4. 인도 유럽 어족의 침입 (BC 1550)

B.C 16세기에 오리엔트 최초의 철기 사용자인 히타이트 인이 침입해 들어와 바빌로니아 왕국을 위협한 후
카사이트인이 진출하여 바빌로니아를 지배하였다.


5. 앗시리아의 통일 (BC 689)

그 뒤 이 지역은 오랫동안 분열과 혼란이 계속되다가 앗시리아에 의해 통일되었다.
북 이스라엘은 B.C.722년에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합니다.

6. 바빌론 재 통일, 신 바빌론 제국 (BC 612)

바빌론의 느브갓네 살 왕은 B.C. 612 년에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를 정복하였습니다.
B.C. 586년에 남 유다는 바빌론에 점령당하고 포로로 끌려갑니다.
 

7. 페르시아 지배 (BC 539)

페르시아(고레스 왕)와 메대의 연합군은 B.C. 539년에 바빌론을 정복하였습니다.
고레스왕의 허가 하에 유대인은 B.C. 538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8. 알렉산더 대왕의 바빌론 정복 (BC 331)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통일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합니다.
이 후로는 헬라 문화가 유입되고 회교 문화가 형성되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특색을 잃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사회]
수메르 인의 문명이 토대가 되었고 아카드(샘족), 아무르 인들의 문명이 가미되었습니다.
화폐는 쓰이지 않아서 물물 교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종교]
메소포타미아의 종교는 다신교로 신전에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인신 제사도 행해졌습니다.
점성술과 부적 현세의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로서 발전하였습니다.

메사포타미아 종교의 가장 큰 특색은 성교를 신성시 한다는 점입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왕이 1년에 한 차례 정도 여사 제나 '이슈타르'(메소포타미아 종교에 등장하는 전쟁과
성애의 여신) 같은 사랑의 여신과 성관계를 맺었습니다.
이유는 풍요롭고 안녕한 한 해 와 왕의 성공적 통치를 기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메소포타미아인은 여사제, 어찌보면 창부라고도 할 수 있는 그들에게 본성을 치료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과학] 점성술, 천문학, 태음력, 7요제, 60진법, 24시간, 360도 등이 나타났습니다.  

 

[문자]

수메르인은
쐐기 문자(설형 문자)를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점토판에 갈대로 찍어 썼는데 표음 문자로 발전했습니다.
페니키아 인들이 사용한 문자는 오늘날 알파벳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건축]

궁전과 신전 건축에 아치(arch)와 둥근 천장(dome)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돌이 매우 귀했습니다.
그래서 수메르인들은 벽돌로 건축하였으며 그 벽돌을 이용하여 물을 끌어오기 위한 커다란 수로도 건설하였다.

 

[문학]
메소포타마아의 문학은 주로 신화를 토대로 한 것입니다.
여러 신화와 전설들은 각 도시의 건설자, 유명한 왕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중 유명한 것이 우루크시의 왕이었던 '길가메쉬'에 관한 서사시입니다.



2. 수메르 도시국가 (B.C. 3000년)

수메르인은 인류 최초로 도시와 학교를 건설했습니다.
도시에서는 정치·경제·군사·생활 등이 모두 신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므로 신전 국가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12진법과 태음력을 사용하였고 수메르법이라는 법전도 만들었습니다.


수메르인의 언어는 명사에 조사를 붙혀 주어나 목적어로 쓰는 교착어를 사용합니다.
교착어는 우랄 알타이 어족의 특징이고, 터키, 몽고, 한국 일본이 이에 속합니다.

인류의 언어는 3가지로 나뉘는데 고립어, 교착어, 굴절어입니다.
고립어는 단어의 변화가 없고 문법적 관계가 어순에 의해서만 결정되며 중국어가 이에 속합니다.
중국어로 '나는 책을 읽는다'를 표현하면 '나 읽는다 책'이 됩니다.

굴절어는 단어 자체의 형태 변화로 문법적 특성을 나타내며 인도유럽어족, 라틴어, 셈어족이 이에 속합니다.
영어도 처음엔 굴절어여서 대명사는 he-him으로 변화되고 동사는 go-went-gone으로 변환됩니다.
그러나 stone 같은 일반명사는 형태변화를 하지 않아 고립어의 특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세가지 언어 중 고립어는 뜻이 분명치 않고, 굴절어는 외워야할 단어가 너무 많지만, 교착어는 한 단어에
문법적 위치에 따라 접미사만 바꿔주면 되니 간단하고 뜻이 명확하므로 가장 우수한 언어라 할 수 있습니다.

수메르인들은 지구라트
(Ziggurat)라는 원형 고층 성전에서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는 기독성경에 나오는 바벨탑과 유사합니다.
또한 이 지역에는 셈족, 수메르족, 인도유럽인 등 세계 인종의 근간이 되는 민족이 모여 살아서 이를 뒷바침
해 줍니다.

수메르은 인류 최초로 문자를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사물의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였으나, 이것이 점차 간결화되어서 나중에는 쐐기 모양의 부호로 뜻을
나타내는 설형(楔形)문자가 되었습니다.
수메르인들은 진흙을 빚어서 말린 점토판에 굵은 갈대펜으로 긁어서 문자를 기록했습니다.

수메르 문명에서 특이한 점은 성경과 매우 유사한 신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의 천지창조, 에덴 동산, 바벨탑 이야기, 구원자, 부활 등과 비슷한 신화를 갖고 있습니다.
모세가 쓴 창세기가 B.C. 1440년에 쓰여졌으므로 창세기 보다 1000년 전에 쓰여진 수메르 신화는 성경이 당시 오리엔트 종교들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음을 보여줍니다.

 

* 수메르 신

수메르의 신은 수천 가지에 이르며 이름만 바뀌어서 바빌론에서도 섬겨졌습니다.(괄호안은 나중 이름)
수메르의 3대 신은 안, 엔키, 엔릴 입니다.
황소, 독수리, 사자, 염소, 반인 반수, 용, 태양신은 을 상징한다는 것을 염두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물고기, 말은 를 상징합니다.

a) 안 (아누)

모든 신의 아버지이자 모든 신의 아버지입니다.
뿔이 달린 머리 장식이 있고 커다란 황소로 표현됩니다.


b) 엔릴 (마르두크, 벨)

하늘 신 안이 땅의 여신 키와 결혼해 낳은 자식으로 바람의 신입니다
마르두크는 번개의 신이자 바빌론의 민족신으로 주인님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신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1세 때 50개의 이름을 가진 최고의 신이었고, 지구라트 꼭대기에 마루두크 사당이
있었습니다.

마루두크의 별은 주피터이고 그의 성스러운 동물은 말, 개, 갈라진 혀를 가진 용입니다.
그는 마차를 타고 다니고 웃옷에 별이 있고, 손에 홀을 들고 있으며 벼락을 가지고 다닙니다.
페니키아에서는 바알신으로 섬겨졌고 유대인들도 바알신을 믿었습니다.

은 하늘 신의 아들로 불림 받는 것을 좋아하고, 용의 형상을 하고 홀을 가지고 있다면
벼락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그리스 제우스와 흡사한 모양입니다.


c) 엔키 (에아)

하늘 신 안과 지하수 여신 남무 사이에 태어난 물과 지혜의 신으로 신들의 노예인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반 염소 반 물고기의 모양이며 마법과 주문을 관장합니다.


d) 이슈쿠르

비와 뇌우를 관장하는 신으로 큰 황소로 표현됩니다.
번개와 삼지창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지창을 가지는 것은 그리스 신화의 포세이돈과 같은 모습입니다.


e) 아다드

날씨를 담당하는 신으로 비와 태풍을 주관합니다.
황소와 사자를 제물로 받으며 그에게는 6이 신성한 숫자입니다.


f) 샤마시

태양신으로 정의와 공평의 신입니다.
바빌론의 함무라비왕은 그에게서 법전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팡이와 반지를 가지고 있고 왕좌에 앉아 있고 선견자 역할을 합니다.


g) 네르갈

땅과 전쟁의 신으로 전염병과 굶주림과 파괴의 신입니다.
힌두교의 공포와 파괴의 신인 시바와 닮았습니다.


h) 난나 (신)

달의 신으로 상징은 초승달입니다.
4개의 뿔을 가지고 있고 수염을 휘날리는 노인으로 묘사됩니다.


i) 이난나 (이슈타르)

위 사진 왼쪽은 수메르 신 이난나이고, 가운데는 우르 지역에서 믿던 이난나이고, 오른쪽은 바빌론 여신
이슈타르입니다.
이난나는 달의 신 난나의 딸로 전쟁과 성애의 여신입니다.
금성에 해당하며 질투의 여신, 다산의 여신, 육체적 사랑을 즐기는 즐기는 여신입니다.
죽음과 재난의 여신이기도 해 이중성을 가지고 있으며 원 안에 6,8,16개의 광선을 발하는 별이 상징입니다.
이슈타르의 숭배지 에레크는 창녀들로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성교를 신성시해 성전 안에서 여사제와 성교를 즐기는 것을 신성시 했으며 메소포타미아 문화권인 페니키아도
이를 따랐습니다.
그리스와 로마도 이에 영향을 받아 자유로운 성생활과 그룹 성교를 자연스럽게 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여신이 흥분하고 땀을 흘리면, 비도 많이 오고 농사도 잘 된다고 생각하여, 공식적인 매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슈타르는 페니키아와 그리스로 가서 아프로디테가 되었고 로마로 가서는 비너스가 되어 관능의 여신이 되었습니다.



3. 아카드인 (셈족) (B.C. 3000년)


셈족은 우르 지역을 중심으로 수메르인과 함께 번창했습니다.
셈족은 유목민으로 유대인과 아랍인의 조상이 됩니다.

우르 지역에 있던 가나안 땅으로 옮겨와 유대인의 조상이 됩니다.

19세기부터 우르 지역이 발굴되었는데 그들이 고도의 문명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위 사진 왼쪽은 발굴된 우르의 도시 모습이고, 가운데는 점토판 지도이며, 오른쪽은 금속 공예품입니다.
우르에는 정밀한 수로가 있어 상하수도 시설이 완비되었고, 수천개의 방이 있는 건물이 있었습니다.
셈족은 B.C. 2300년에 수메르 도시 국가를 정복하고 처음으로 통일 왕국을 세웁니다.



4. 바빌론 (B.C. 1800)
아무르인들이 다시 이 지역을 통일하고 바빌론에 도읍지를 정하고 바빌로니아 왕국을 건설하였습니다.

a) 함무라비 법전


함무라비(Hammurabi) 대왕은 B.C 18세기경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고 '함무라비 법전'을 편찬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왕이 태양신으로부터 받았다고 발표하고, 그림까지 그려 넣은 것으로 보아


b) 길가메쉬 서사시

길가메쉬 서사시는 세계 최초의 서사시로 길가메쉬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죽음을 거부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그리스의 일리야드나 오딧세이에도 영향을 줍니다.
원래는 수메르 시대에 만들어졌으나 바빌론 시대에 완성됩니다.

위 사진은 수메르의 도시 국가 우룩을 통치했다는 길가메쉬 왕으로 왼손으로 새끼 사자를 안고 있습니다.
이 서사시는 헬라클레스 같은 영웅담에도 영향을 줬고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뉴에이지적 사상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홍수 심판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리스 신화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
유태인들이 성경을 만들 마지막 시기에 길가메쉬 서사시에 나오는 이부분을 모방하여 성경을 편집하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대홍수이지요.



5. 앗시리아 (B.C. 689에 통일)


a) 역사

 앗시리아는 도시국가로 B.C. 2300년 경부터 존재했으며, 티그리스강 상류에 위치했고,
대부분 셈족으로 이루어졌으며 니네베(니느웨) 성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앗시리아의 조상은 노아의 아들 셈의 한 아들인 앗수르(Asshur)입니다(창세기 10/22).
원래 메소포타미아 왕들의 지배를 받았지만 기원 전 18세기부터는 왕국을 형성합니다.
기원 전 960년부터 350년간 앗시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제국을 형성합니다.


위 사진 왼쪽은 앗시리아 병사, 가운데는 왕의 행렬. 오른쪽은 앗시리아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아수르-단 2세(Ashur-dan Ⅱ 993-910 BC) 전성시대를 개막한 위대한 전사로 거의 매년 정복에 나서 피를 강 같이
흘렸고 시체를 산 같이 쌓았다고 전해집니다.
그 세력이 동서로는 인도에서 이집트,남북으로는 아라비아에서 러시아에까지,그들의 말마따나 멀리 산봉우리가
줄지어 선 곳으로부터 해가 지는 왼쪽 바다에까지’ 미쳤습니다.

티글랏필레셀 3세(Tiglath-Pileser Ⅲ B.C, 745-727): 구약성경에 불(Pul)로 불리우는 앗시리아 최대의 왕 가운데
하나로 전성기를 이룩했습니다.
그는 북방 이스라엘의 므나헴(752-742 BC)에게서 조공을 받았으며, 베가(742-740 BC)때에는 북방
이스라엘을 다시 침략하여 북방 영토를 점유한 후 앗시리아의 므깃도 도(道)에 예속시켜 버리고 백성들을
이산(離散)시켰습니다(대상 5:26).
유다왕 아하스의 긴급 요청으로 기원전 732년 다메섹을 치고 왕 르신을 죽이기도 했으며(왕하 16:7-9), 북방
이스라엘의 베가를 물리치고 호세아(732-722 BC)를 왕으로 올리기도 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이사야 7장
16절과 8장 4절 예언의 성취이기도 했습니다.


살만에셀 5세 (Shalmaneser Ⅴ·727-722 BC): 이 때 이집트는 북방 이스라엘의 호세아를 꼬득여서 앗시리아에
반역하도록 조장하자 사마리아를 3년 간 포위한 끝에 기원전 722년 그가 죽기 직전 이를 함락하여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왕하 17:1-6).


산헤립(Sennacherib 705-681 BC) 사르곤 2세의 아들로 각처의 반역을 무자비하게 대처하여 기원전 689년에는
바빌론성을 짓밟았습니다.
기원전 701년에는 서부 원정에 나서서 시리아와 팔레스틴의 왕들을 징벌하고 반역을 주도한 유다왕 히스기야를
징치하기 위해 우선 요새인 라기스를 비롯하여 수많은 유다의 도시들을 유린했습니다.
후에 재침한 산헤립은 유다를 끝장내려 하여 예루살렘까지 접근했으나 이사야의 권면으로 힘을 얻은 히스기야의 후에 본국에서 아들들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아수르바니팔(Ashurbanipal 669-627 BC) 앗시리아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최후의 위대한 왕으로 이집트를 재차
정복하여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였던 테베를 노략하는등 외정(外征)에 대성했습니다.
특히 고대 세계 최대의 왕립도서관을 세워 고대의 각종 문헌을 수집하여 소장한 것으로 더욱 유명한데 1853년 12월
22일밤 영국 사람 랏삼(Hormuzd Rassam)등에 의해 니느웨가 확인되고 이 도서관이 발굴되었습니다.
이곳에 소장된 고대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 문서 가운데 성경 창세기의 창
조와 홍수 이야기와 흡사한 점토판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역시 성경이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아수르바니팔 대왕 이후 그의 두 아들이 몇 년동안 다스렸으나 이미 대대적인 반역을 시작한 주변의 국가들을
제압할만한 역량을 잃은 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특히 기원전 626년 바빌론은 느브갓네살의 아버지 나보포랏살의 영도 아래 독립을 선언하고 도전했으며 메대도
시악사레스(Cyaxares)의 영도 아래 기원전 614년 앗수르(Ashur)성을 함락시키고 612년에는 수도 니네베가 바빌론과 메대와 스키디아(Scythians) 연합군에 의해 3개월 간 포위된 끝에 처절하게 함락되었으며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버티려던 신-사르-이슈쿤(Sin-shar-ishkun 626-612)왕도 함께 죽었습니다.

니네베가 함락된 뒤 앗시리아의 유민(遺民)들은 앗시리아의 최후의 통치자인 아수르-우발릿 2세(Ashur-uballit Ⅱ B.C.612-609)의 지도 아래 유프라테스를 건너 하란(Harran)을 수도로 정하고 이집트의 지원을 받으며 재기(再起)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610년 바빌론의 나보포랏살 왕은 동맹국 스키디아의 지원을 받으며 또 다시 하란을 점령했습니다.

때마침 이집트에서 삼틱 1세(PsamtikⅠ663-609 BC)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느고 2세(Necho Ⅱ, 609-594 BC)가
왕위에 오른 즉시, 앗시리아의 진군(殄軍)을 도와 하란을 탈환하기 위해 지원군을 이끌고 서둘러 북상(北上)했습니다

때에 재위 31년을 맞이한 유다의 요시아 왕은 국제정세가 신흥 바빌로니아에 유리하게 돌아감을 느끼고, 친바빌론
정책을 취하여 느고 2세의 이집트 군사를 므깃도 평지에서 맞아 북상을 저지하다가 전사하습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은 이를 믿지 못하고 변장하고 싸우나 화살을 맞아 전사하고, 전력을 소모한 이집트군은
바빌론과의 전투에서도 패합니다.
이 일로 남 유다는 이집트의 속국이 되고, 바빌론과도 적이 되었으니 상황이 더 악화되었습니다.
앗시리아의 왕 아수르-우발릿 2세를 부추겨 하란을 탈환하려던 느고 2세의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퇴각하면서
시리아를 비롯한 팔레스틴 일대를 공략하였으며, 특히 하란 서쪽의 유프라테스강 상류의 강변의 요충도시인
칼케미슈에 앗시리아의 진군과 함께 기지를 구축하였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605년 나이 많고 병약해진 나보포랏살은 아들 느브갓네살을 보내어 칼케미슈에서 이집트와 역사적인
대격전을 벌였는데 이 전쟁에서 이집트는 대패하여 팔레스틴에서의 기반을 잃고 본국으로 철수하여 그 후 다시는
이전의 강대국으로서의 위세를 영원히 회복하지 못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렘 46:2).
그리고 앗시리아의 마지막 명맥도 영원히 끊어졌습니다.


b) 문화

기원 전 700년 앗시리아의 수도가 된 니네베(니느웨)는 그 무렵 가장 위대한 도시로 떠올랐습니다.
웅장한 궁전과 사원들을 둘러싼 성벽은 그 위로 수레 3대가 달릴 만큼 두터웠고(너비 9.6m), 23m나 솟은 성벽을
너비가 24m인 해자(방어용 연못)가 둘렀습니다.

‘상인의 수가 별보다 많을’ 정도로 번창하고, 그 시대의 로마라고 하리만큼 세계의 중심지이던 니네베는 그러나
기원 전 612년 하루 아침에 사라졌습니다.
더 화려하고 더 오래 영화를 누린 도시가 많은데 겨우 89년을 번성함.

아시리아의 제왕들이 오벨리스크(돌 한 개를 깎아서 높이 세운 기념탑) 따위를 만들어 저마다 새겨 놓은 무용담이나,
궁전과 사원 벽에 새긴 글과 그림에는 왕에 대한 두려움을 자아내는 내용이 가득합니다.

‘짐은 잔인하고…전쟁에서는 앞장서 달리는 온 천하의 왕이며…무릎 꿇지 않는 적들을 짓밟고 온 세상을 손아귀에
넣었노라.’(아슈르나시르팔 왕)

‘나는 들판을 피로 물들이는 무시무시한 태풍이로다.’(아슈르바니팔 왕)

포로나 반역자를 창에 꿰고 살갗을 벗긴 아슈르나시르팔보다 더 잔인한 왕은 니네베로 수도를 옮긴 센나케리브입니다.
그는 바빌론을 쳤을 때 도시 전체가 시체로 가득 찰 때까지 주민들을 하나하나 살육하고 집들을 남김없이 불태웠습니다.
피의 제왕은 니네베 신전에서 기도하다가 아들들에게 살해되어 자신의 주검도 피로 물들였습니다.

앗시리아인들은 말과 법률과 생활 양식을 수메르와 바빌로니아로부터 배웠지만, 돌을 다룬 솜씨만은 누구보다
빼어났습니다.
그들은 돌을 다듬어 아치를 세우고 수로를 팠으며 뛰어난 조각 예술을 후대에 남겼습니다.
제련술·상감술·도료술 같은 공업 기술에도 뛰어났습니다.
도서관은 수학·천문학·점성학 책으로 가득 찼으며, 세계에서 처음으로 식물원·동물원과 사냥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앗시리아가 첫째로 내세운 자랑거리는 군대입니다.
군대 조직에는 기병대·전차대·경보병대·중보병대·포병대·기술지원부대에다 첩보부대까지 있었습니다.
병력은 보병 170만,기병 20만에 전차 1만6,000대.
구약 성경은 아시리아 군대가 들이닥치는 모습을 ‘돌풍과 같다’고 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그들이 사자처럼 바다처럼 으르렁거리며 달려와 지나는 곳마다 슬픔과 어둠을 남겼다”고
한숨 지었습니다.

돌개바람처럼 서아시아를 휩쓸었던 앗시리아는 기원전 612년 연기처럼 사라졌습니다.
사치와 게으름에 빠져 있던 아슈르바니팔 왕은,메디아, 칼데아, 스키타이 연합군이 바빌로니아를 앞세우고
쳐들어오자 궁에 불을 지르고,궁녀와 시종들 그리고 자신까지 불길에 내던졌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거대했던 도시 니네베는 폐허로 바뀌었습니다.
수천년간 사막 바람이 뜨거운 모래와 먼지 구름을 몰고 와 폐허를 덮자, 왕성은 큰 둔덕으로 바뀌었습니다.
바람 타고 날아온 씨앗들이 봄비를 맞고 움이 터서 둔덕에 초록빛 융단을 깔았습니다.

아시리아 것으로서 남은 것은 무엇 하나 없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눈부신 영화를 누리던 궁전이 있었다는 자취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스처럼 신전이 서 있지도 않았고 멕시코나 잉카처럼 피 묻은 제단도 없었다.


c) 종교


위 사진 왼쪽은 사람 얼굴에 날개 달린 사자몸이고, 가운데는 사람 얼굴에 다리가 5개이고 날개 달린 황소 몸과
생명수를 지키는 독수리 얼굴의 그룹 천사 모습이고, 오른쪽은 생명수를 지키는 신들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수메르와 바빌론에서도 발견되며, 앗시리아 역시


앗수르의 국가신인 아슈르를 신들의 왕으로 추대하였고, 달, 태양, 날씨, 사랑의 여신 등을 섬겼습니다.
도시마다 신전이 있었고, 수호신이 있었습니다.
앗수르인들은 영적인 세계를 심각히 받아드려 죽은 자를 위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병이나 재앙을 가져다 주는 귀신을 쫓기 위해 몸에 부적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또한 미래의 일을 알기 위해서 점성가를 찾았습니다.


d)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B.C. 745년에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조공을 바칠 것을 강요하면서 북 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몇년 후 다시 침공하여 여러 도시를 함락하고 원주민을 추방하였습니다.
호세아 왕은 저항하였지만 B.C. 722년 앗시리아의 왕 살만에셀 5세는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3년만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킵니다.

남 유다는 북 이스라엘의 침입에 대비해 앗시리아에 도움을 청하고 속국이 되었습니다.


e) 유적

위 그림은 모래가 덮인 니네베 유적지이고, 가운데는 복원한 니네베 성벽이고, 오른쪽은 사자를 죽이는 아슈르바니팔
왕의 모습입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 여기저기에 솟은 완만한 둔덕, 앗시리아의 궁전과 성벽이 묻힌 그 둔덕들에서 사람들은 말해왔습니다.

“니네베는 정말 있었을까? 왜 그것을 증명할 유물이 단 한조각도 없을까?”

19세기 초까지도 고고학자들은 땅 속을 파헤쳐 옛 유물을 찾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으므로 그 둔덕들은 누가
보아도 그저 자연이 만든 낮은 산일 뿐이었다.

그러나 1840년 앗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로 추정되는 언덕을 파헤치면서 유물이 드러납니다.

몸통에 날개달린 사자, 황소, 독수리 머리에 사람 몸을 한 날개 달린 신 등의 조각이 이 나왔는데 이를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궁중 도서관에서 쐐기문자가 새겨진 점토판이 2500개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철학, 천문학, 수학, 의학, 문학에
관한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6. 신 바빌론 (B.C. 612년)

a) 역사

세계 역사에서는 일반적으로 두 개의 바빌로니아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즉 기원전 1830년부터 1531년까지 3세기 동안 존속한 바빌론 제 1왕조인 구 바빌로니아(the Old Babylonia)와 그
뒤 천년 후에 같은 자리에서 1세기를 못 넘긴(B.C. 605-53C)느브갓네살의 신(新)바빌로니아(The Neo-Babylonia)
로 구분됩니다.


제1왕조가 망한 뒤에도 바빌론은 계속 고대 세계의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로 각광을 받다가 앗시리아 제국 당시에는
봉신(封臣)왕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계속적인 반역으로 앗시리아의 산헤립은 기원전 689년 바빌론을 한 때 완전히 파멸시켜 끝장을 내려고까지
했으나 그 중요성 때문에 곧 다시 재건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626년에 이르러 바빌론의 봉신왕이 나보포랏살은 마침내 독립을 선언하고 종주국(宗主國)
앗시리아와 전쟁을 시작했으며, 종내에는 메디아와 동맹을 맺고, 스키디아의 지원을 얻어 기원전 612년 니네베를
함락함으로써 앗시리아를 넘어뜨리는데 성공했습니다.

기원전 605년 칼케미슈에서 이집트 대군과 앗시리아 잔군의 연합 세력을 격파함으로써 명실공히 근동(近東)의
패자(覇者)가 되었으며, 같은 해 서거한 부왕 나보포랏살을 이어 느브갓네살이 등극함으로써 대제국 신바빌로니아의
찬란한 출범이 있게 됩니다.

 

성경에 이 바빌론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유다왕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서 회복된 후 위문사절을 보냈던 므르닥발라단(Merodach-baladan)의 경우였습니다. 당시 바빌론에서는 갈대아(Chaldean)족의 추장인 므르닥발라단이 바빌론의 왕으로 나서서 앗시리아에 대항하다가
곤경을 당하던 때였기 때문에 팔레스틴의 강력한 반앗시리아 국가인 유다와 군사적 유대를 강화하고자 사절을
파견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므르닥발라단은 앗시리아의 사르곤 2세와 그 아들 산헤립에게 대패하여 독립 항쟁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기원전 626년 므르닥발라단의 자손으로 같은 갈대아족인 나보포랏살이 또 다시 바빌론의 왕이 되어 독립을
선언하였고, 마침내 성공하여 전술한 바와 같이 대 제국 신바빌로니아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기원전 605년 칼케미슈에서의 결전에 아들 느브갓네살을 출전시켜 승리를 거둔지 얼마 후인 그해 8월 나보포랏살은
재위 21년(626-605 BC)만에 서거함으로써 같은 해 9월 이집트 접경의 전역(戰役)에서 급히 돌아 온 아들
느브갓네살에 의해 왕위가 계승됩니다.
느브갓네살 이후의 바빌론 왕들과 역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느브갓네살(Nebuchadnezzar Ⅱ· B.C.605~562): 신바빌로니아를 대제국으로 만든 가장 뛰어난 왕으로 칼케미슈
전투에서 느고 2세의 이집트를 이기고, 시리아와 유다를 포함한 팔레스틴을 정복하고, 이집트 접경까지 이른 기원전
605년 8월에 서거한 부왕을 이어 왕위를 계승한 후 43년 간을 재위했습니다.
605년의 팔레스틴 제1차 정복시에 다니엘을 비롯한 유대 수뇌들이 볼모가 되었고, 기원전 597년에는 반역한 일만명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기원전 586년에는 수많은 포로들을
잡아가고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파괴했습니다.

* 나보니더스(Nabonidus B.C. 556-539): 느브갓네살의 사위 가운데 하나로 아들 벨사살과 함께 신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입니이다.
밝혀진 고증(考證)에 의하면 나보니더스는 본래 하란의 영주(領主) 나부발라쑤이크비(Nabubalatsu-iqbi)와 그곳의
월신전(月神殿)의 여제사장 수무아담카(Shumuadamqa) 사이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610년 메대와 바빌론에 의해 하란이 점령당할 때 그의 어머니가 느브갓네살의 처첩으로 잡혀 와 왕의
사랑받는 후궁이 되자 그의 아들인 나보니더스도 함께 느브갓네살의 신임과 총애를 받아 국사를 맡는 한편
느브갓네살의 딸 니토크리스(Nitocris)와 결혼함으로써 사위가 되었습니다.

나보니더스가 병에서 회복된 후 서북 아라비아를 원정(遠征)하여 오아시스 테마(Tema)를 빼앗아 거기서 기원전
545년까지 여러 해를 살았습니다.
기원전 539년 페르샤에 의해 바빌론이 함락될 때 남쪽으로 피신했던 나보니더스는 후에 바빌론에 돌아와 고레스에게
투항(投降)하였으며, 이어 저 멀리 카르마니아(Carmania)의 봉신(封臣)으로 보내졌다고 전합니다.
나보니더스는 정치와 군사에는 무관심하였으며, 오히려 종교와 문화 특히 고고학에 깊은 흥미를 가져 많은 노력과
시간을 바쳐 왕위까지 아들에게 물리는 나약한 치세를 했다고 여겨집니다.

* 벨사살(Belshazzar B.C. 553-539) 신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입니다.
신병으로 요양중인 부왕의 섭정으로 기원전 553년경에 즉위하여 기원전 539년 10월 13일 밤 주연(酒宴) 후에 침입한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로써 바빌론은 영원히 멸망합니다.


b) 문화

바빌론 성은 이중성곽으로 높이 3.7미터 두께 6.5미터이고
양변이 1천8백m와 1천3백m에 달하는 거대한
직사각형입니다.

여덟 개의 거대한 성문 가운데 바빌론의 신 마루둑을 위해 세운 이슈타르 성문이 가장 유명합니다.
성문을 통과하는 길에는 유약을 바른 타일로 만든 황소(벨)와 용(마루둑의 상징)의 형상이 줄을 지어 서 있습니다,
벽에는 파란색 유약을 바른 벽돌로 만들어졌는데 거기에는 빨간색, 노란색, 흰색의 사자들(이슈타르의 상징)이
부조되어 있습니다.

당시 바빌론에는 위대한 신들을 위한 신전 53개, 마르둑신을 위한 예배당 55개, 대지의 신들을 위한 예배당 3백개,
하늘의 신들을 위한 예배당이 6백개가 있었으며, 여러 신들을 위한 제단이 4백개가 있었습니다.
이 중에는 ‘신의 문’이라는 뜻의 지구라트가 있었는데, 이 탑은 7층으로 높이가 90m며 8천5백만개의 벽돌을
사용했습니다.

바빌론은 거의 2천년 동안 황폐해진 상태로 방치됐다가 1899년부터 1917년까지 독일인 콜데바이에 의해 다시
햇빛을 보게 됩니다.
바빌론은 지구상에 알려진 고대의 성 가운데 가장 크고 장대한 성이었습니다.
바빌론에는 사자의 그림이나 조각이 많은데 이는 사자를 여신 이슈타르와 동일시했기 때문입니다.
이슈타르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유명한
공중정원이 있던 터가 있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미국 L.A.에 있는 이슈타르 성문과 비슷한 건축물입니다.


c) 종교

신 바빌론의 종교 또한 수메르, 바빌론, 앗시리아의 종교와 비슷한 종교입니다.
사람을 불 속에 집어 넣어 제사 드리는 모습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 바빌론은 머리에 해당하며




7. 페르시아 (B.C. 539~331년)

a) 역사

페르시아인은 B.C. 1000년부터 러시아 남부로부터 이란 지역으로 이동한 유목민입니다.
그들은 페르시아만 동쪽에 정착해 살았습니다.

기원전 549년, 메디아(지금의 터키)를 병합한 키루스 대왕은 ‘아케메네스 왕조’로
불리는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키루스 대왕은 고대 페르시아인들이 가장 존경하여 자신들의 ‘아버지’라 칭송하였던 인격적인 군주였습니다.

군사적으로도 키루스 대왕의 전과는 혁혁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메디아를 침략한 리디아에 대해 메디아 왕의 후계자로서 응전하여 기원전 546년경, 리디아를 멸망시켰습니다.
또한 그는 소아시아 일대(에게해 동쪽)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속국으로 만들었고, 기원전 539년경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 알려져 있었으며 난공불락의 요새로 불리던 바빌론성을 함락시켰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유프라데스강의 흐름을 바꿔 마른 강 바닥을 따라 바빌론 성내로 진입해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는 바빌론 정복 이후 바빌론에 억류되어 있던 유대 민족을 본토로 귀환시켰으며 유대인들에게 바빌로니아가
파괴했던 예루살렘 성전도 복구하도록 성전 재건축 역사를 지원했습니다.
키루스는 바빌론의 주신 마루둑을 비롯하여 많은 피정복자의 신을 경외했습니다.
그는 용맹한 정복자이면서도 관대하고 포용성 강한 군주였으므로 페르시아뿐 아니라 그리스인들에게까지 두루
존경을 받았습니다.

바빌로니아를 정복함으로써 키루스는 바빌로니아가 정복하였던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지역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꾸준히 동방으로 원정을 감행하던 그는 결국 어느 유목민 부족과 전투 중에 전사합니다.

키루스의 사후 아들 캄비세스 2세에 의해 이집트도 페르시아 제국에 복속되었습니다.
페르시아는 리디아, 바빌로니아, 이집트라는 주변의 강대국을 모두 정복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다리우스 1세(B.C. 521∼B.C. 486) 때에는 적극적으로 정복사업을 벌여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정복했습니다.

이런 페르시아 제국이 쇠퇴기에 접어든 것은 기원전 5세기 말, 그리스 원정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면서부터입니다.
일명 ‘페르시아 전쟁’으로 불리는 대(對) 그리스 전쟁은 동·서양이 맞붙은 최초의 전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중앙집권을 강화하면서 제국의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그는 페르시아를 번영시킨 훌륭한 군주였으나, 국내 체제가 정비되자 밖으로 눈을 돌려 그리스 정벌에 나섰습니다.
그의 첫 출정은 이오니아 지방에서 일어난 그리스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회복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으나 이오니아의 반란을 원조한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응징하고자 다시 2차 원정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페르시아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기원전 490년,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은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 군을 격퇴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둡니다.
이 때 그리스 병사 한 명이 전령 역할을 자청하여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42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쉴새없이
달려가 전투의 결과를 초조히 기다리던 아테네 시민들에게 “우리가 이겼다”는 한 마디를 전하고 숨이 끊어졌는데,
그 병사를 기념하기 위해 마라톤 경주가 시작되었습니.

다리우스 1세는 퇴각한 후에 그리스 재침공을 준비하다가 사망하였으나 그 무렵 페르시아는 최대의 판도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다리우스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1세는 다시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살라미스 해전에서 해군이 그리스 연합군에게 다시금 크게 격파당하여 크세르크세스 1세는 본국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는 남아 있는 페르시아의 육·해군을 그리스 영토에서 몰아내어 페르시아 전쟁을 마무리했으며 페르시아는
내분까지 겹쳐 점차 쇠퇴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역사가들은 이 페르시아 전쟁을 오리엔트식(페르시아)의 전제군주제와 서양(그리스)의 자유민주정이 대립하여 자유가
승리를 얻은 ‘자유의 전쟁’으로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로써 페르시아의 세력이 약화되고 그리스 국가들이 세력을 얻게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후 그리스 세계의 주도권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거쳐 마케도니아로 넘어가게 됩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 세계를 통일하고, 세계 대제국의 건설을 목표로 원정에 나서 다시 페르시아와
부닥칩니다.

기원전 334년, 다리우스 3세가 다스리던 페르시아는 그리스 세계를 통일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의 공격에
무너집니다.
다리우스 3세가 알렉산더에게 거듭 패하고 도피하다가 신하에게 암살당함으로써 페르시아 제국은 역사 속에서 막을
내리고,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주요 도시인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등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전체 영역과
그리스 본토를 포함한 대제국을 건설합니다.


b) 문화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이 민족이 이란 남부의 페르시스(Persis : 현재의 파르스) 지방에 정착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발흥했다고 하여 고대 그리스 등 서방세계에서 부르던 명칭이었고, 실상 페르시아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아리아인의 땅’이라는 뜻인 ‘이란’으로 불러주기를 바랬습니다.

‘이란’이라는 명칭이 알려주듯이 페르시아인(메디아인 포함)들은 본디 인도 아리아계 민족으로서 인종적으로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아시리아, 바빌로니아와 같은 타민족과는 차이가 있었고 오히려 그리스인 같은 유럽인들과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문화적으로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등과 더불어 동일한 오리엔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정치
제도도 오리엔트식의 전제군주정을 채택하여 일찍부터 공화정이 발달한 그리스와는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문화적으로 보자면, 페르시아는 이란 고원의 한 귀퉁이에 위치한 기마민족이었으므로 바빌로니아나 이집트 같은
자신들이 정복한 주변 나라에 비해 문화 수준이 낮았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은 정복한 이들 나라의 문화와 전통을 모두 존중하여 받아들임으로써 복합적이고 다양하면서도 웅장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고레스 대왕은 제국을 '도'로 분할하고 각 도를 다스리는 통치자를 두었습니다.
그들은 페르시아인이거나 메디아의 귀족이었습니다.
각 나라의 민족들은 자신의 관습과 종교를 지키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다리우스 1세는 주조 화폐와 법 기구를 도입합니다.
새로운 우편 기구를 도입했고 제국의 외교 언어로 아람어를 사용합니다.

그는 2천6백98km에 달하는 ‘왕의 길’을 건설하고, 중간 중간에 가장 빠른 말을 바꿔 탈 수 있는 역참이 1백11장소가
있었는데 아무리 먼 지역이라도 긴급한 서류가 1주일 안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제국 안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신속하게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다리우스 1세는 페르세폴리스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합니다.
페르세폴리스는 가로 3백m, 세로 4백50m의 거대한 단구(호수나 바다의 연안에 생기는 계단 모양의 지형) 위에
세워졌으며 주변이 잘 보이는 라흐카트산에 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면 궁으로 들어가는 ‘만국의 문’이 있는데 매년 초 페르시아 제국에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들이 이
문을 통해 본궁으로 들어갔습니다.

페르세폴리스에는 여러 궁전들이 있습니다.
다리우스 궁전, 크세르크세스의 궁전, 아타르크세르크세스 궁전과 무덤, 하렘 등이 있고 중앙에 아파다나궁(사절단을
접견하던 곳)이 있으며, 요소 요소의 계단 벽에 많은 조각들이 있습니다.
알렉산더는 3백31년 다리우스를 격파한 후, 페르세폴리스가 자신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페르시아의 요충지임을
감안해 이곳을 철저하게 파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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