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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4년 프랑스 신부 샤를 브라쇠르는 마드리드 왕립역사학회 도서관에서 에스파냐의 중앙아메리카 정복시대의 신부 디에고 데 린다의 <정복전후의 유카탄>을 발견하고, 그 가운데 마야 알파벳을 기반으로 고대 마야의 <트로아노 고사본>을 해독했다. 그리고 거기에 기록된 화산폭발과 재앙에 의해 함몰한 나라의 이름에 해당하는 두개의 마야 그림문자를 보고 MU라 읽었다.

 제임스 처치워드

1926년 가을, 전세계 고고학계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 육군의 예비역 대령인 제임스 처치워드가 『잃어버린 무 대륙(The Lost Continent of Mu)』이라는 책에서 고고학자들도 들어 보지 못한 무 대륙의 실재를 주장한 것이다.

 이 대담한 주장을 한 영국인은, 1868년부터 인도에 머무르면서 원주민들 사이에 전설로 내려오는 무 대륙에 대해 듣고 필사적으로 그 확인 작업에 매달렸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인도의 옛날 사원에서 무 대륙에 관한 사실이 적힌 옛 점토판을 발견하여 그것을 해독했다. 그 결과, 원주민들 사이에 전승된 무 대륙이 상상의 땅이 아니라 실제로 태평양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문명이 발달했던 대륙이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이러한 확신이 서자, 무 대륙의 존재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찾기 위해 50년 동안이나 세계 각지를 떠돌았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방대한 자료와 사진들은 수집하였다. 그리고 미국 뉴욕에 칩거하면서 무 대륙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를 글로 쓰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이미 70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잃어버린 무 대륙』이란 책을 완성하여 고고학계에 깜짝 놀라게 한 것이다.

 

 잃어버린 무 대륙(The Lost Continent of Mu)

 아득한 옛날, 지금의 태평양이 있는 위치에 '무(Mu)'라는 광대한 대륙이 있었다. 그 동쪽 끝은 현재의 이스터 섬, 북쪽 끝은 하와이 제도, 서쪽 끝은 마리아나 제도, 그리고 남쪽 끝은 지금의 쿡 제도에 해당한다. 동서의 길이는 8천 킬로미터, 남북은 5천 킬로미터로 지금의 태평양 면적의 절반 크기다.

 이 무 대륙에 인류가 나타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5만 년 전의 일이다. 이곳에 살았던 인간은 매우 우수한 민족으로 고도의 문명을 이룩하고 있었다. 무 대륙의 인구는 약 6천4백만 명이었고, 열 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머리색, 피부색, 눈의 색은 제각기 달랐지만 각 민족 간에 차별은 없었고, 한 명의 왕 밑에 하나의 정부가 통치하고 있었다.  무 제국 국민은 우수한 학문과 문화를 가졌고, 특히 건축술과 항해술이 고도로 발달해 이었다. 그들은 진취적인 기질이 풍부하여 배를 타고 세계 각처를 떠돌았다. 서쪽으로는 아시아, 유럽, 이집트와 교류했고, 동쪽으로는 북아메리카 중부에서 남아메리카 북부까지 진출하여 그곳에 자신들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무 대륙에는 낮은 동산 이외에는 산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는데, 땅 전체는 세 개의 좁은 해협에 의해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문화의 중심지였던 일곱 개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도로가 격자 모양을 이루며 도시와 마을을 연결하였고, 그 표면은 대리석으로 잘 포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석조 궁전과 신전과 호화로운 대저택들이 관청을 에워싸고 있었다. 항구마다 세계 각지로 떠나는 배로 분주 했으며, 세계 각지에서 진귀한 물건을 가득 싣고 온 수십 척의 배기 항구로 들어왔다. 태양을 숭배하교 세계를 지배했던 무 제국은 날로 번영했다. 왕권은 튼튼했으며, 모든 국민은 행복한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거대한 대륙은 발밑으로 다가오는 불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땅 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소리는 점점 커졌으며, 대지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신전에 몰려들어 태양신에게 기도하고 있을 때, 대지가 갈라지며 지옥의 불길 같은 거대한 불기둥들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 첫 번째 대지진으로 무 대륙 남쪽을 대부분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산보다 더 큰 해일이 대륙 남쪽을 강타하고, 용암이 들끓었다.

 무 대륙의 국민들이 일차 대지진의 공포를 잊고 폐허 위에 신전을 재건할 무렵, 다시 땅이 요동을 치고 바다가 울부짖기 시작했다. 건물이 무너지고 대지는 바가 위에서 나뭇잎처럼 흔들렸다. 대륙의 중앙에 굉음이 대륙 전체를 휩쓸었다. 무 대륙은 조각조각 갈라지며 바다 밑으로 잠기기 시작했다. 태평양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던 거대한 무 대륙이 바다 속으로 잠기자, 전무후무한 해일이 지구 곳곳을 덮쳤다. 지금으로부터 1만 5천 년 전, 지구가 생긴 이래 최초이자 최대의 문명을 건설했던 무 대륙은 이렇게 사라졌다.

 나칼 비문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신화 같은 무 대륙에 관한 처치워드의 이러한 주장은 그가 머릿속으로 상상하여 꾸며 낸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그가 이런 대담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도의 낡은 힌두교 사원에서 입수한 두 개의 점토판 덕택이었다.

 두 개의 점토판에는 난생 처음 보는 이상한 도형과 기호 같은 것이 빽빽이 새겨져 있었다. 늙은 고승은 점토판이 신비한 모국(母國)인 무에서 보내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가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노승은 처치워드를 토굴 속으로 안내했다. 거기에는 1만여 년이라는 세월에 부식된 점토판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는 그 점토판들을 보자기에 소중히 싸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점토판에 새겨진 고대 상형 문자를 해독하는 데 전념했다. 해독은 군대에서의 암호 풀기와 같았다. 그는 고승의 도움을 박아 2년 동안 점토판 해석에 매달렸고, 마침내 상형 문자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그 점토판은 무 대륙의 성정인 '거룩한 영감의 책'이었는데, 무 대륙의 건국에 관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점토판에 새겨진 무 대륙의 건국 설화는 구약의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설화와 비슷했다. 그는 이렇게 추측했다. 무 대륙은 왕성한 해상 활동을 했으며 인도와 이집트, 그리고 시나이 반도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모세는 우연히 이것을 입수해 석판에 다시 새겼을 것이다.

 처치워드는 인도의 고사원에서 입수한 점토판을 '나칼 비문'이라 명명하고, 자심의 추측을 뒷받침할 수 있는 또 다른 고대 점토판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 멕시코의 광물학자 윌리엄 니벤이 고대의 석판을 수천장 수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멕시코 석판이 나칼 비문보다 1만 년 후에 아메리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처치워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무 대륙은 인류의 어머니 나라가 된다. 처치워드의 책이 세상에 나오자 고고학자나 지질학자들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한마디로 몰아부쳤다. 그는 과학자들의 냉소에 일일이 반박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다음의 몇 가지를 들고 잇다.

 우선 인도의 힌두교 사원에서 발견한 나칼 점토판의 해석이다

 

 '라마야나'에 '동방의 미지의 땅에서 미얀마로 온 것'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동방은 바로 태평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트로아노 고사본'은 유카탄 반도와 고대 마야족에 대한 기록인데, 여기에도 무 대륙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인도나 미얀마, 이집트에서 발굴된 상형 문자는 모두 나칼 점토판에 새겨져 잇는 무 제국의 기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은 직접적인 기록 말고도 무 대륙이 실재했다는 증거는 세계각지에 흩어져 있다고 처치워든 주장한다. 이스터, 망가이, 마리아나 제도 등 남태평양의 섬들에 남아 있는 온갖 유적에서 무 대륙의 자취가 발견되고 있고, 유카탄 반도의 우슈말 사원 비문에 새겨진'서방의 나라, 우리는 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는 표현도 그 증거의 하나다. 멕시코시티 남쪽에 있는 피라미드의 비문에는 '어머니 나라의 붕괴를 기념해 세웠다'라는 구절이 있다.

  

<라사 기록>

티벳의 라사에 있는 고사원에서 발견된 것으로 1400년전의 점성술의 고사본이다.

페루의 별이 떨어졌을 때 오로지 하늘과 바다만이 남았다. 7개의 도시는 황금의 문, 투명한 신전과 함께 폭풍속의 나뭇잎처럼 떨어져 내렸다. 궁정에서는 불과 연기가 솟구쳤다. 비명과 절규가 온세상을 덮었다. 궁중은 갈곳을 잃고, 사원과 탑으로 모여들었다. 최고의 신관 라무는 군중을 향해 말했다. "나는 이런 사태가 오리란 것을 이미 예언하지 않았던가?" 번쩍이는 보석의상을 입은 남녀들은 흐느끼며 외쳤다. "무여, 우리를 구해주소서"  "너희들은 하인과 재물과 함께 죽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재 속에서 새로운 민족이 탄생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또한 얻는 것보다 베푸는 것이 아름답다는 진실을 잊는 순간, 또 다른 재앙이 그들 머리 위에 퍼부어질 것이다!" 불꽃과 연기가 무의 말을 지워갔다. 국토의 주민들은 갈가리 찢겨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트로아노 고사본>

 드레스덴 고사본, 페레시아누스 고사본, 코르테시아노 고사본과 함께 남은 고대마야의 고사본.점성술책

 칸6년, 11물크, 삭의 달에 무서운 지진이 시작되어, 13투엔까지 계속되었다. 흙언덕의 나라, 무의 국토는 가라앉을 운명에 처했다. 대지는 두번 솟아올랐고, 또 가라앉았다. 땅이 갈라지고 열개의 나라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렇게 6400만의 주민은 사라졌다. 이 책을 편찬하는 지금으로부터 8060년전의 일이다.




대만 근처의 요나구니 해저 유적 (왼쪽) 과 남미 페루의
삭사이후 아만 유적(아래)를 비교해보면 무시할수 없는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헨콕은 또한 대만 근처의 바다속에서 발견된 요나구니 유적에 대해서 그는 그것이 약 1만년 전에 건설 되었다가
해수면의  높이가  증가하면서  침수된 고대유적이라고  주장한다. 이스터 섬의  거석유적에  대해서 그는 이집트,
인더스 문명 유적과  남미의 티아우나코 유적과의  연관성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신의 거울에서는 신의 지문
에서 과감히 내세웠던  남극대륙 초고대 문명설을 일언반구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이 가설이 지금 학계
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레이엄 헨콕의 주장에는 현재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한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의 주장대로
세계 도처의 거석 유적들이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것들의 상호 관계가 명확치 않다는 점이다.
정말 헨콕이 생각하는대로 미지의어느곳(아마도 남극)에서 엑소더스를 한 생존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전세계에
흩어져 문명을  건설한 것일까?  필자는 그런것은  아니라는 점을  여기에서  밝히고자  한다. 필자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런 동시다발적 문명건설이 아니라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문명이 전파했다는 가설이 더 유력하다.

일본 앞바다에서 발견된 해저 유적

 

일본 오키나와열도의 남단, 요나구니지마(與那國島)의 바다 및에 고대 유적이 발견되어학계에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1996년 일본 오키나와시 요나구니지마(與那國島)섬 근처에서 다이빙 연습을 하던 잠수부들은 우연히 수심 25m 지점에서 이상한 형상의 지반을 발견합니다.이 구조물을 예사롭지 않게 본 잠수부들은 몇장의 수중 사진을 촬영한 뒤 곧바로 일본의 한 TV 방송국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몇 일후 TV 방송국의 관계자들과 함께 잠수를 하여 사진등을 촬영하였던 잠수부들은

 

1. 발견되었던 암석들이 모두 조각을 한 듯 정교히 깎여있었고,

 

2. 그 지반들은 모두 요새 건축법과 비슷한 방법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나, 층층히 계단처럼 쌓여있었고,

 

3. 곳곳에 알 수 없는 구멍들이 나 있었으나 그 구멍들이 너무 깊어 탐사를 못했다는 것 등의 의문점들을 발견하였으나, 아직까지 그들은 그 수중도시의 흔적이 왜 그 장소에 있었는지에 관한 이유는 못 밝혀내었습니다.

 

 

지질학계 학자들 사이에 그것이 초고대 문명의 유적이다,  아니다,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 가운데 1998년 12월 29일, 아카보시요타로씨가 수심 25미터 지점에서 인공으로 만들어진 석판을 발견했다. 4, 5톤이나 되어보이는 바위 아래, 모래에 파묻힌 상태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석판의 표면에는 굴등과 조개류, 그리고 석회질등이 잔뜩 부착되어 있어,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그 곳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석판에는 직경 2, 3 센티 정도의 구멍이 두 개 있는데, 그 부분의 표면은 매끈매끈했다.

 

요나구니지마(與那國島)의 고대 유적을 오랜 기간 연구해온 지질학의 전문가, 류큐대학의 기무라(木村政昭) 교수는, 구멍이 타원형임을 지적했다.

 

사진의 아랫부분이 마모되어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석판은 구멍에 밧줄을 꿰어 큰 석판들을 끌어 올리는 데 사용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구멍의 옆에 새겨져있는 {십자}도 수수께끼이다. 확실히 인공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일설에 의하면 (태평양 바다 밑에 잠들어 있다고 하는)  "무"대륙의 심볼에도 이 십자 모양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후에 이루어진 암석의 지질조사에 따르면 이 지반들은 적어도 5000년, 많게는 25000년동안 물속에 침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혹시 이 수중도시의 흔적은 예전에 물속으로 가라앉았다는 전설의 아틀란티스 대륙이 아니었을까요?

 

 

 

 

 

 

 

 

 

(사진 설명: 해저 거대 조각물 조감도)

 

 

요나구니지마(與那國島)의 고대 유적사진들

 

   

다이버들이 구멍을 보고 있다.     옆은 건축에 구멍

 

 

 

사람얼굴       옆은 가까이에서 찍음

 

 

직각으로 꺽인모양

 

옆으로 휘여진 모양

 

자연적으로 생길 수가 없다.

구부려진 모양

 

구멍들

본 오키나와열도의 남단, 요나구니지마(與那國島)의 바다 및에 고대 유적이 발견되어, 지질학계 학자들 사이에 그것이 초고대 문명의 유적이다, 아니다,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 가운데 1998년 12월 29일, 아카보시요타로씨가 수심 25미터 지점에서 인공으로 만들어진 석판을 발견했다. 4, 5톤이나 되어보이는 바위 아래, 모래에 파묻힌 상태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석판의 표면에는 굴등과 조개류, 그리고 석회질등이 잔뜩 부착되어 있어,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그 곳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석판에는 직경 2, 3 센티 정도의 구멍이 두 개 있는데, 그 부분의 표면은 매끈매끈했다.
요나구니지마(與那國島)의 고대 유적을 오랜 기간 연구해온 지질학의 전문가, 류큐대학의 기무라(木村政昭) 교수는, 구멍이 타원형임을 지적했다.
사진의 아랫부분이 마모되어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석판은 구멍에 밧줄을 꿰어 큰 석판들을 끌어 올리는 데 사용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구멍의 옆에 새겨져있는 {십자}도 수수께끼이다. 확실히 인공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일설에 의하면 (태평양 바다 밑에 잠들어 있다고 하는) "무"대륙의 심볼에도 이 십자 모양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원래 십자가는 그리스도교, 더 나아가 유대교, 이슬람과는 아무 상관 없는 문양이다. 예수가 로마의 형벌인 십자가에 박혀 죽은 시점부터 십자가가 그리스도교의 상징이 되었는데 예수가 죽기 10000년도 전에 쓰인 십자가 표식은)


무우 제국의 문자인 카이다 문자 발견

태양신을 숭배한 MU인들은 카이다라는 상형 문자를 사용했다.

琉球固有の文字と世界の未読文字
カイダ文字1カイダ文字2
カイダ文字 スペース
カイダ・ディとかカイダージとも呼ばれる、与那国で古くから使用されていた象形文字である。しかし、いつから使われていたかについては不明である。 かつて、文字を知らない島民に対して、役人が徴税のための数量計算に用いたといわれていて、その後、日常生活にまで広がったという。このカイダ文字は、明治時代に小学校令が布かれるまで用いられ、その正確さは、役人の貢納物記帳を訂正させるほどで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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