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족(흉노)        기원전99 ~ 서기99  2009. 4. 27.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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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는 중국인들이 훈족을 멸시하여 부르던 말이다. 조선민족을 동이(동쪽 오랑캐)라고 부르던 것과 같은 이치다.

<흉노는 중국보다 3배나 큰 거대제국>

흉노는 중국 북방에서 첫 유목민국가를 건설한 국가의 명칭으로 결코 단일한 민족이나 부족의 명칭이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흉노는 몽골-투르크족의 혼합으로 추정하며 기원전 600년경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철기를 받아들인 후 점점 강성해졌다. 스기야마 마사아끼는 기원전 4세기부터 여러 유목민족과 부족들을 망라해 하나의 포괄적인 유목민집합체로 부상했다고 적었다. 특히 정벌한 지역이나 투항한 지역의 왕들을 그대로 수장으로 인정하면서 통치하는 것이 통례였으므로 흉노가 강성할 때는 수많은 다민족 국가로 구성됐다.

그러므로 기원전 3세기 묵특선우의 흉노가 동호를 격파하고 유목기마민족의 패자가 돼 아시아 초원의 연변에 있는 거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을 때 그 영토는 중국의 거의 3배에 달하는 대제국이라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의 영토는 동으로는 한반도 북부(예맥조선),1) 북으로는 바이칼호와 이르티시 강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와 티베트 고원까지 이르렀다.2)

그러나 많은 한국 사람들이 흉노라는 말에서부터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흉(匈)은 오랑캐를 뜻하며 ‘노(奴)’자는 대체로 한자에서 비어(卑語)인 ‘종’이나 ‘노예’의 뜻으로 그들을 멸시하는 의도에서 ‘노’자를 첨가해 ‘흉노’로 불렀다고 알려지기 때문에 더욱 연상되는 이미지가 좋지 않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흉(匈)’자는 ‘훈(Hun 혹은 Qun)’의 음사이며, ‘훈’은 퉁구스어에서 ‘사람’이란 뜻으로 흉노인 스스로가 자신들을 ‘훈(Hun, 匈)’으로 불렀음을 볼 때 ‘오랑캐’를 뜻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상식적으로 흉노라는 말이 자신을 비하해 부르는 ‘노예와 같은 오랑캐’라는 말이라면 중국보다 3배나 더 큰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던 흉노가 이를 용납했을 리는 없다.

흉노에 대한 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은 고구려 초기에 ‘나(那)’나 ‘국(國)’으로 표기되는 집단들이 상당수 나타나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때의 ‘나(那)’는 ‘노(奴)’, ‘내(內)’, ‘양(壤)’ 등과 동의어로 ‘토지(土地)’ 혹은 ‘수변(水邊)의 토지(土地)’를 의미한다고 지병목 박사는 적었다. 고구려에서의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貫那部), 소노부(消奴部, 涓奴部)에 흉노(匈奴)와 마찬가지로 노(奴)자가 들어있는데, 이들은 고구려 성립 이전에 압록강 중류지역 부근의 토착세력으로 고구려의 성장과 더불어 정복 융합된 것으로 추정한다.

<한(漢)으로부터 조공 받은 흉노>

흉노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면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는 시대인 기원전 3세기경으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다. 진시황제가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후 흉노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기록부터 중국과 흉노의 역사는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한 지 10여 년 만인 기원전 210년에 사망한다. 후임자인 호해가 등극했지만 곧바로 항우에게 패하고 진나라는 멸망한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놓고 싸운 결과 결국 유방이 승리하고 통일중국인 한나라를 세운다.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북쪽에 있는 흉노는 중국을 견제하고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사실상 한나라 역사는 북쪽에 있는 흉노와의 관계라고 할 정도로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원수와 같이 으르렁거리면서 지냈다고 볼 수 있다.

▲ 유방은 백등산에서 흉노의 선우 묵특에게 포위돼 조공을 바친다는 협정을 맺고 풀려났다.  ⓒ
유방은 기원전 202년 재위 5년에 비로소 황제로 칭하고 노관을 연(燕)왕으로 봉하는데 노관이 201년, 흉노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방은 흉노가 갓 태어난 한나라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흉노를 치기 위해 3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 흉노의 묵특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174)를 공격한다. 선우는 ‘탱리고도선우(撑?孤塗單于)’의 약어이다. ‘탱리(撑?)’는 터키-몽골어에서 ‘하늘’을 뜻하는 ‘텡그리(Tengri)’의 음역이며 ‘고도(孤塗)’는 ‘아들’이란 뜻으로 흉노의 왕을 뜻한다. 선우의 공식 명칭은 “천지가 낳으시고 일월이 정해주신 흉노 대선우”이다.

그러나 기원전 200년, 유방은 백등산에서 일주일간이나 포위된 상태에서 극적으로 구출되는 등 수모를 당하면서 철저하게 패배하고 흉노와 화친을 맺는다. 이 때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의 골자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 이 관례는 문제(文帝, 기원전 179~157) 때까지 계속됐다.
둘째,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조공을 바친다.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어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를 보면 한은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한나라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실현됐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는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해 갔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의 액수도 한과 흉노 간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변동됐는데 일반적으로 한의 조공 액은 매년 증가됐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음을 볼 때 한이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여하튼 한(漢)은 유방 이후 무제가 집권하기 전까지 60여 년 간 공물과 공주(본래는 황녀를 가리키지만 종실 일족의 딸이나 후궁을 황녀라 속였다)를 보내고 평화를 유지했다. 중국학자들이야 이런 표현에 반대하겠지만 객관적인 상황으로 보아 맞는 말이다.

묵특선우는 흉노의 전성시대를 연 사람으로 당시에 동호(東胡, 동호는 어떤 원어를 한자음으로 쓴 것이 아니라 ‘동쪽 오랑캐’를 의미하는 한자어로 추정)가 매우 강성했는데 동호가 흉노를 경멸하고 묵특의 천리마와 연지(흉노의 후비(后妃)의 칭호, 원음은 ‘알저’)를 요구했다.

부하들이 동호의 무례함을 나무라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라고 하자 묵특은 ‘나라와 인접하면서 어떻게 말 한 마리와 여자를 아끼겠는가’하며 순순히 주었다. 그후 두 나라 사이에는 황무지로 1천여 리의 땅이 있는데 황무지이므로 동호가 갖겠다고 말했다. 신하들 중에 버린 땅이므로 주어도 좋다고 했지만 묵특은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라며 동호를 습격해 왕을 살해하고 백성, 가축 등을 노획했다.

▲ 북부여의 근거지 중의 하나로 추정하는 아성, 사진의 토성은 금나라 때 세웠다.  ⓒ
사마천은 동호(東胡)를 예맥조선이라고 적었다. 예맥조선족이 기원전 700~기원전 500년에 있었던 지역은 중국의 고원지대인 오르도스 지역으로 추정한다. 동호를 이민족 국가로 보지만 동일 문화권 내에서도 고조선 외에 부여, 예맥, 진번, 임둔, 진국 등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여하튼 패전한 동호를 대신해 흉노가 유목기마민족의 패자가 됐는데 묵특은 자신의 치세 동안에 대대적인 정복활동을 벌여 아시아 초원의 연변에 있는 거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다. 그의 영토는 동으로 한반도 북부(예맥조선, 사마천은 동호를 예맥조선이라 적었다), 북으로 바이칼호와 이르티시 강변,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와 티베트 고원까지였다. 이는 그 영토가 중국의 거의 3배에 가까울 정도의 대제국이라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흉노가 예맥조선이 근거한 한반도 북부를 정복했다는 것은 흉노의 지배 영역에 한민족이 속했다는 것을 뜻한다. 주법종 교수는 고조선은 중국과는 춘추ㆍ전국시대 및 진ㆍ한(秦ㆍ漢) 교체기에 조선이란 존재의 다양한 정치세력과 조우하며 특히 위만조선 시대를 전후해 흉노로 대표되는 기마유목세력과 교류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스기야마 마사아끼는 조선 방면이 흉노의 관장 하에 있었던 시기가 먼저 있고 이어 그 연장선상에서 한(漢)이 한반도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는데 이것도 흉노에 격파된 동호가 예맥조선임을 근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김상천 박사는 위에서 설명한 동호는 북부여를 뜻한다고 주장했고 서영수 박사는 동호를 이민족 국가로 보지만 동일 문화권 내에서도 고조선 외에 부여, 예맥, 진번, 임둔, 진국 등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계속)


참고문헌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역사와 민속』, 박원길, 민속원, 2001
『터키사』, 이희수,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9
『유목민이 본 세계사』, 스기야마 마사아키, 학민사, 2000
『고조선과 고구려 역사를 다시 본다』, 김상천, 도서출판 주류성, 2003
「고조선과 우리민족의 정체성」, 서영수, 백산학보 제65호, 2003
「게르만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과 한민족의 친연성(親緣性)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6호, 2003
「고구려와 흉노의 친연성(親緣性)에 관한 연구」, 이종호, 백산학보 제67호, 2003
「고조선의 영역과 그 변천」, 주법종, 한국사론 3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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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기원전 216년 ~ 209년, 흉노의 최대 영토

흉노(匈奴)는 기원전 5세기부터 5세기까지 몽골중국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유목민족이다. 기원전 3세기 무렵 몽골 고원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하여, 전성기에는 시베리아 남부, 만주 서부, 중화인민공화국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 간쑤 성(甘肅省),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까지 지배하였다.

흉노는 중국의 한족(漢族)과 군사적 충돌을 겪기도 하였고, 때로는 조공무역이나 결혼동맹을 하는 등 복잡한 관계를 보였다. 흉노족들에 대한 기록은 극히 빈약하며, 남아 있는 기록의 대부분은 중국과의 군사적 충돌 관계에 대한 것으로 적대국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편견이 내재되어 있을 가능성이 지적되기도 한다.

흉노 민족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사료에만 있기 때문에, 현재 중국어로 음역된 일부 지명이나 이름들을 제외하고는 흉노어의 재구성은 거의 불가능하다.[1]

한편, 흉노와 훈족(Hun族)을 같은 민족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있다. 또한, 흉노의 '匈'(흉)은 '훈(Hun)'을 중국어 음차로 부른 명칭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흉노와 훈의 관계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아직까지 없는 상태이다.

현재 흉노의 후계 민족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헝가리터키, 몽골[2]은 이들을 자기 민족의 역사라고 가르치고 있다.

역사

흉노가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4세기 말 중국의 전국시대의 기록이다. 이후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기원전 215년에 몽염(蒙恬)을 보내 융적(戎狄)을 물리치고 감숙(甘肅)에서 요동(遼東)까지 장성을 쌓았다. 이때 물리친 융적을 흉노로 보고 있다. 진-한 교체의 혼란기에 흉노는 두만(頭曼, 터키어: Tumen, Teoman)을 중심으로 여러 유목 부족 집단들을 통합하였다.

모돈 선우의 등장

이 부분의 본문은 모돈 선우입니다.

모돈(冒頓)은 아버지 두만 선우를 살해하고 선우에 즉위하였다. 모돈은 정권을 강화시키고 서쪽의 천산산맥과 감숙 지방에 자리잡은 월지국(月氏國)을 공격하여 붕괴시키고 뒤이어 동쪽의 만주 서부지역에 위치한 동호(東胡)를 멸망시켜 중국 북방 최대의 유목민족국가를 수립하였다. 이 시기 흉노는 비단길을 장악하고 동서 무역을 통제함으로써 강성할 수 있었다. 북방을 장악한 모돈은 중국을 약탈하였다. 이에 중국을 통일한 전한(前漢)은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였다. 산시 성(山西省)의 평성에서 흉노와 전한의 군대가 교전하여 전한군이 크게 패하였으며, 전한 고조(高祖)는 백등산에서 일주일 동안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구출되었다. 패배한 전한은 흉노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다. 화친의 결과 전한와 흉노는 형제 관계를 맺었으며, 고조는 "흉노와 전쟁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3]
  • 둘째,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공물을 바친다.
  •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는다.
  •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중국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발효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했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 액수도 한과 흉노 사이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는데, 대체로 한의 조공액은 매년 늘어났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이 시기 전한이 흉노의 속국과 같은 존재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4] 이 시기의 영토는 동쪽으로 동호예맥(濊貊), 북쪽으로 예니세이 강 상류, 서쪽으로 동 투르케스탄, 남쪽으로 중국의 오르도스 지방과 칭하이 성(靑海省)의 북부에 이르렀다.


서기 1년경의 훈누(중국어: 흉노)와 한나라의 경계


흉노의 분열

기원전 141년에 즉위한 전한 무제(武帝)는 흉노와 맺은 조약을 파기하고 흉노와 전면적인 전쟁을 시작하였다. 무제는 기원전 129년부터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 등을 파견, 흉노를 공격하고 서역(西域 : 간쑤성 및 신장 자치구 일대)을 정벌하였다. 한군이 서역을 정벌하고 비단길을 통제하게 되자 흉노는 경제적으로 약화되었다. 한과 흉노의 전쟁으로 전한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흉노의 피해는 더 커서 흉노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기원전 60년경 흉노에서는 선우 자리를 놓고 내분이 일어났으며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는 기원전 51년 중국에 입조하여 지원을 얻었다. 이후 호한야에 의해 흉노는 재통일되었으며 전한과 화친을 맺었다. 이때 질지(郅支) 선우는 서흉노를 이끌었는데, 후에 동흉노에 패하여 다시 흡수되었지만, 일부 집단은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이 시기 흉노의 내분과 약화의 원인으로는 당시 몽골 고원이 한랭화되었던 것을 꼽기도 한다.

왕망(王莽)이 (新)을 건국한 후 흉노와 중국의 관계는 악화되어 흉노는 다시 중국을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후한이 건국된 이후 흉노는 다시 분열되어 남흉노는 후한에 복속되어 오르도스 및 산시 성(山西省) 일대에 거주했으며, 북흉노는 몽골 고원에 남았다. 89년에 후한과 남흉노의 연합군은 북흉노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며 북흉노의 일파는 서방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서방으로 향한 북흉노를 훈족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 몽골 고원에는 선비(鮮卑)·오환(烏桓) 등의 다른 유목 부족이 성립되었다.

남흉노는 중국의 번병(番兵) 역할을 하며 오르도스 및 산서 일대에서 북방을 방어하였다. 후한은 남흉노의 군대를 용병으로 활용하여 선비, 오환, 강(羌) 등을 토벌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선우에 대해서 흉노의 여러 유력자들은 많은 불만을 가졌으며 이로 인해 선우와 흉노의 유력자들 간에는 끊임없는 알력이 존재하였다. 또한 중국 측에서도 간섭하여 선우의 직위는 크게 실추되고 위태로워졌다. 삼국 시대에는 조조(曹操)에 의해 흉노의 선우는 유명무실하게 되고 흉노는 5부로 재편되어 중국의 실질적인 통제를 받게 되었다.


훈족의 서정


오호십육국 시대와 소멸

서진(西晉) 말기, 흉노의 좌부수(左部帥) 유연(劉淵)은 중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산서 일대에서 (漢)을 건국하였다. 이는 흉노가 과거 한나라와 형제의 맹약을 맺은 것을 근거로 한 것으로, 유연은 형인 한나라를 대신하여 한나라를 계승할 것을 천명하였다. 흉노의 한나라는 서진을 멸망시키고 화북 지역을 지배하였으며, 이후 흉노의 일파인 갈족(羯族)의 석륵(石勒)이 후조(後趙)를 건국하자 국호를 (趙 : 후조와의 구분을 위해 보통 前趙라고 부른다.)로 고치고 화북을 양분하여 대립하였다. 329년에 후조에 의해 전조는 멸망하였으며, 후조 역시 351년에 멸망하였다.

407년에는 흉노 철불부(鐵弗部)의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산시 성(陝西省) 일대에서 (夏)를 건국하여 선우를 자칭하였으나 431년에 멸망하였다. 이후 흉노는 중국 역사에서 소멸되었다.

정치 제도

흉노의 군주는 선우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후 오르도스와 중앙아시아 등지의 유목 왕조들의 군주들은 선우라는 명칭은 거의 쓰지 않았고, 한이나 가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또한 선우를 보좌하는 좌현왕, 우현왕이라는 직책도 있었다. 흉노 선우의 시각은 중원 왕들과 반대였기에, 좌현왕은 동부, 우현왕은 서부를 관장했다. 당시 중국 왕조인 한나라 식으로 하면, 선우는 황제, 좌우현왕은 황제가 봉해주는 왕에 해당한다. 또한 좌우현왕과 비슷한 두 왕(좌곡려왕, 우곡려왕)이 더 있어 선우와 함께 유목민족 특유의 5부 체제를 이끌었다. 또한 흉노가 강성하여 서역 지방을 다스렸을 때 서역 지방 제후를 일축왕에 봉했다. 골도후라는 직책도 있는데, 정확히 무엇을 칭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골도후에도 좌, 우의 개념이 있어 각각 선우의 보좌직이라는 설이 있다. 좌우현왕 밑에는 각각 지방관 등으로 여겨지는 각종 직위들이 있었으며, 여기서 흉노의 지역 체제가 군사 체제와 일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흉노의 선우는 흉노의 중앙집권화를 이룩한 모돈 선우 이래 부자세습제를 통해 자리를 이어갔다.

흉노의 신앙 체계는 천신사상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통치자 선우(單于)는 천신(天神)의 아들로서 하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제사장으로 표현되고 있다.

언어

흉노인들이 사용한 문자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인울라 16호 고분을 비롯한 흉노 유적지에서 발굴된 출토품에 흉노 문자로 추정되는 기호들이 새겨져 있다.

외국과의 관계

중국과의 관계

흉노는 유목민족으로써, 경제의 유지를 위해 농경을 영위하는 정주민에게 필요한 물자를 획득해야 했다. 이를 위해 흉노는 때로는 중국을 침략·약탈하고 때로는 조공이나 세폐를 통해 평화적으로 물자를 확보하였다.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중국은 국력을 기울여 장성을 쌓고 막대한 세폐를 바치기도 하였다.

중국측 역사 교과서에 의하면[5],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하던 중국이 전한 무제 때 대대적으로 흉노를 토벌하여 세력을 약화시켰으며 흉노 부족의 일부가 한나라에 화친을 청하며 신하라고 자칭했었다고 한다. 무제는 궁녀 왕소군을 공주로 만들어 흉노에게 시집보냄으로써 비교적 장기간 국경이 안정되었다고 한다. 이는 결혼 동맹을 통해서 양국과 우호관계를 담보하기 위한 행위였다.

전한 무제가 흉노와 전쟁을 시작한 이후 경제적인 중심지였던 서역을 상실한 흉노는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이후 흉노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더욱 약화되어 일부는 중국에 복속되어 번병이 되기도 하였다.

훈족과의 관계

서흉노 또는 북흉노가 훈족의 원류라는 주장이 있으나 명확한 관계는 밝혀지지 않았다.


훈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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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틸라의 최대 판도 (434-453)

훈 족(Hun族)은 서양사에 등장한 최초의 투르크계[1] 민족이다.

흉노족훈족(Hun族)을 같은 민족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많고[출처 필요][2], 흉노의 '匈'은 '훈(Hun)'을 중국어 음차로 부른 명칭이라는 것이 다수설이다.[3] 그러나 이에 대한 이론(異論)도 존재한다.

흉노-훈 동일 민족설에 의하면 훈족의 역사는 흉노의 분열기부터 시작한다. 북흉노선비와 후한의 연합군에 의해서 기원후 155년에 멸망된 후, 흉노의 지도층의 일부는 후한에 투항하고, 나머지는 서진(西進)하기 시작했다. 흉노-훈 동족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때 서진한 흉노의 지도층이 우랄산맥을 넘어 정착였고, 약 2세기가 지나서 유럽에 돌풍을 몰고온 훈족(Huns)은 바로 이 흉노제국의 후예들로서 중국의 중앙아시아 정벌 후에 서북쪽으로 이동한 집단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지도자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의 서진은 첫 번째로 기록된 기마 민족의 대규모 이동으로, 우월한 기동성과 발달한 활을 무기로 삼아 진격, 알라니족·슬라브족·고트족 등을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하나로 뭉치게끔 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일으킨 훈족은 5세기 중엽에 가장 세력을 떨쳐 아틸라의 지휘 아래 서쪽은 라인강에서 동쪽은 카스피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이루었다. 453년 아틸라가 죽은 후 왕자들의 분열과 게르만 여러 부족의 반란으로 훈 제국은 무너지고, 흑해 연안으로 가서 다른 민족과 혼혈하고 동화됨으로써 민족의 전통이 사라져 버렸다.

현재 훈족의 후계 민족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헝가리터키, 몽골[4]은 이들을 자기 민족의 역사라고 가르치고 있다.

[편집]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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