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우스의 군제개혁        기원전99 ~ 서기99  2009. 4. 25.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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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에 로마 멸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나쁜 개혁. 민회와 원로원에서 임명하던 장교나 대장을 군대에서 추대케 하고, 또한 군대의 사병화를 촉진시켜 후대에 콘스탄티누스같은 악랄한 독재자가 나타나는 밑거름을 마련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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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마리우스는 107년에 군제 개혁을 단행하여 징병제를 지원제로 바꾸었다. 하지만 당시는 유구그타 전쟁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개혁은 할 수 없었다. 그는 104년 유구르타 전앵이 끝난다음 비교적 평온했던 시기를 이용하여 군제 개혁을 확립하려고 했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가운데

 첫번째는 총사령관이 지휘할 수 있는 군단의 수가 신축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전의 방어를 기본전제로 하던 군제가 지중해 전역을 염두에 둔 공격형으로 바뀐 것을 의미한다.

 두번째는 재산 정도에 따라 나누어져 있었던 징병의 분류를 완전히 폐지한 것이다. 이는 일정한도 이상의 재산을 가진 시민만을 대상으로 한 징병제가 아니라 재산과는 상관없는 지원제오 바뀐 상황에서 굳지 재산을 근거로 군을 나눌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세번째 개혁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인 지원병과 동맹시에서 참여하는 병사의 구별을 없앤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군단안에서 로마 시민권의 유무는 소멸되었다고 할 수 있다.

 네번째 개혁은 장교나 막료를 민회에서 선출하지 않고 총사령관이 임명하도록 명시한 것이다.

 다섯번째 개혁은 로마 군단내의 보병은 누구나 똑같은 투창과 방패와 칼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칼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도입한 양날 단검으로 접근전에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여섯번째 개혁은 재산에 따른 계급을 나타내어 나누어져 있던 부대 깃발을 폐지하고 그 대신 모든 군단이 똑같이 은빛 독수리를 깃발로 삼도록 결정했다. 독수리가 로마를 상징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 이다.

 일곱번째 개혁은  로마 기병대에 대한 개혁으로 로마 군단의 기병은 더 이상 상류층 자제의 '사관학교'가 아니게 되었다. 또한 '기사계급'이라고 불리우는 즉, 기사로서 병역에 종사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도 군대 경력을 중요시 하는 정계에 진출할 야심이 없는 한 일부러 기병에 지원하지 않았다. 이에 마리우스는 로마군 기병대를 말을 잘 타는 누미디아나 에스파니아, 갈리라, 그리스 등지의 출신 병사들로 구성하였다.

 여얿번째 개혁은 총사령관의 직속 근위대 선발을 로마 시민병을 포함한 군단 전체에서 선발하기로 한 점이다. 이는 근위대의 역할이 명실상부한 최고사령관을 측근에서 호위하는 역할로 자리잡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은 몇가지 변화, 이전의 로마군에서는 볼수 없는 변화였다. 마리우스의 개력에 따라 징병제에서 지원제로 변화한 것은 실업자를 흡수하고 당연한 일이자만 그 결과 병사를 장기적으로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군단안에서는 재산 정도에 따는 계급의 구별이 완전히 사라졌으며 로마시민과 동맹시 시민의 구별도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군단수를 조정할 수 있게 되었고 장교에 대한 임명제를 도입함으로써 총사령관의 권력이 강화되었으며 총사령관을 정점으로 하는 장교와 사병의 관계가 보다 긴밀해졌다. 이렇게 하여 새롭게 탄생한 로마군단은 이전의 팹하는 군단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103년에서 101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게르만 족과의 싸움에서 연전연승하게 된다. 특히 10년의 포강 남쪽 연안에서의 전투에서 로마군의 별력은 5만이었고 이에 맞서는 게르만족은 10만이 훨씬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로마군의 압승으로 끝나게 된다. 로마군의 승리는 병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성과였다. 게르만족은 수적으로는 우세했지만 그저 힘으로 몰아붙이는데 불과한 반면 마리우스가 개혁한 로마군단은 중대 소대 가릴것 없이 마치 장기판 위의 말처럼 지위관의 지시대로 멋지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마리우스의 개혁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매사는 좋은 면과 나쁜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법 로마군의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이루어진 마리우스의 개혁에도 얼마후에는 나쁜 면이 나타나게 된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비판하는 로마군단의 사병화가 그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이야 말로 나중에 술라와 폼페이우스 카이사를 같은 인물이 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개혁이 이루어 졌을 당시 원로원은 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었다. 이는 당시 원로원들이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을 마리우스 개인의 야심보다는 시대의 요청에 따른 필연적인 귀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에서 출세는 전공을 바탕으로 해야만 이루어지는것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에 의하여 장군과 군사의 관계는 인정의 관계로 바뀌게 되었고 개인적인 전공을 세우기 위해 원로원의 승인없이 장군이 군사를 움직여도 군사들은 원로원의 의견보다는 자신의 상관의 말에 복종하게 된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3 

3권은 스키피로 아이밀리아누스가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때(BC 146)에서부터 폼페이우스가 오리엔트를 평정하기까지(BC 63)까지를 다뤘다.

3차 포에니 전쟁이 이루기까지 로마는 비록 승자로서 군림하게 되지만 내부적으로 많은 진통을 격게 된다. 일정면적 이상의 토지를 가질 수 없도록 되어있는 토지법의 빈틈을 이용하여 노예를 통한 농지획득을 통해 부를 가진 경제인층이 두터워짐에 따라 군납할 시민권자(개인의 재정에 따라 납세의 의무가 달라졌다)가 극도로 약해지면서 로마에는 포로레타리아들이 늘어났고 결국은 군사력의 약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에 그라쿠스의 형제(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그들의 매형이자 외사촌형)들은 농지개혁을 통해 평민층을 늘려갔다. 그 일환으로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 곳에 도시 빈민들을 이주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그의 형의 뜻을 이어받아 개혁을 추진한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반대파에 몰려 암살과 자살할 수 밖에 없었고 개혁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에스파냐 원주민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누만티아에서도 함께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이후 호민관과 집정관을 거치고 107년 집정관이 되어서는 본격적으로 군제개혁을 시작하였다. 이후 호민관 사트르니누스는 곡물법(곡물을 저렴한 가격에 빈민층에게 파는 법)을 제정하고 식민법(식민지의 사람들도 로마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길을 엶)을 제출하였으나 반대파에게 암살당하였고 이후 호민관 드루스스는 모든 이탈리아인에게 로마 시민권을 법안을 제출하였으나 역시 암살 당하였다. 이후 술라와 마리우스의 대립으로 로마는 혼란에 빠졌다. 술라가 그리스 원정으로 나가있는 사이 킨나와 마리우스는 로마를 장악했고 마리우스는 자신을 반대한 모든 이들을 죽였다. 이후 마리우스가 죽고 킨나도 부하에게 암살당하는 내분이 계속되는 가운데 술라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입성하여 원로원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을 시작했다. 비록 술라의 개혁 정책은 성공적이었지만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술라고 죽고 이러한 새로운 제도는 차츰 무너지게 되는데 이렇게 된 원인에는 술라의 추종자였던 폼페이우스였다. 30살이 되어야 겨우 회계감사원이 될 수 있고 39세에 법무관 그리고 42세가 되어야 집정관이 될 수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업적으로 이러한 술라의 개혁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렸던 것이다. 그는 25살에 술라의 반대파 소탕에 아프리카로 출정하여 돌아오면서 개선식을 거행하였고 29세에 술라가 죽으면서 일어난 레피두스의 반란진압과 폰토스 왕국의 미트라다테스 왕과의 전투에 총지휘권을 주었다. 물론 그는 훌륭한 전과를 올림으로써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이후 오리엔트를 평정함으로써 지중해 전역(이스라엘을 포함)을 로마의 패권안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이 되었다. 이렇게 술라의 개혁정책은 폼페이우스에의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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