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시마 해전 (1905년) 1900 2009. 5. 3.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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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해전은 3대 해전 중에서 가장 먼저인 1905년 5월 일본의 연합함대가 쓰시마 동북쪽 동해상에서 로제스트벤스키 중장이 이끄는 러시아의 발틱함대와 정면으로 맞붙어 대승을 거둔 것을 말한다. 해전에서 패한 사령관이나 함장은 대개 배와 함께 ‘수장(水葬)’되는 것을 택하기 때문에 생포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일본은 울릉도 남서쪽 70km의 동해상에서 나포한 러시아 구축함에서, 중상을 입은 채 숨어 있던 로제스트벤스키 중장을 생포하는 쾌거를 올렸다.
유틀랜드와 미드웨이 해전에서 공격자 측은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퇴각했으나 전과 면에서 보면 방어자 측과 호각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쓰시마 해전에서는 방어자 측인 일본 해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丁’자 모양으로 마주친 양쪽은 곧 대형 함정 12척씩을 나란히 달리게 하며 함포를 쏘는 대혈투를 벌였는데 러시아는 9척이 격침되고, 일본은 단 3척만 침몰했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데 이어 적장까지 생포했으니 일본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러일전쟁 10년 전에 발발한 청일전쟁(1894~95)은 한반도가 중국에서 벗어나 일본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는 일대 사건이었다. 중국은 당나라 시절부터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해왔는데 청일전쟁에 패함으로써 이를 일본에 넘겨주게 되었다. 그런데 경제가 고속 성장을 거듭한 지금 중국은 ‘한반도를 청일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겠다’며 동북공정(東北工程) 카드를 내밀고 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를 넘어 만주까지 장악하려다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로부터 방해를 받아 ‘삼켰던’ 요동반도를 토해놓게 되었다(3국간섭). 일본이 빠져나간 틈을 재빨리 치고 들어온 것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상당수의 육군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동양함대(태평양함대의 전신)의 주력을 뤼순(旅順)항으로 옮겼다. 그러자 그동안 일본의 위세에 눌려 있던 조선이 급속히 러시아 쪽으로 기울어졌다.
일본으로서는 청일전쟁으로 얻은 성과를 날려버리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일본은 정교한 계획을 세웠다. 러시아와 일전을 벌인다면 이는 해전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고, 훗날 ‘일본 해군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얻은 야마모토 콘노효에(山本權兵衛) 해군대신을 중심으로 ‘해군확장 10년 계획’을 작성한 것. 그리고 한 해 정부 예산보다 많은 돈을 써가며 영국 등지에서 대형 전함을 수입하고, ‘언제나 운(運) 좋은 사람이었다’란 도고 헤이하치로를 연합함대 사령장관에 임명했다.
1904년 2월8일 일본은 도고의 연합함대로 하여금 뤼순항의 동양함대를 기습 공격케 함으로써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뤼순항을 포위한 연합함대는 항 외곽에 기뢰를 설치해 동양함대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봉쇄했다. 졸지에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된 동양함대는 여러 차례 돌파를 시도하는데, 이 과정에서 동양함대 사령관인 마가로프 중장이 탄 배가 기뢰에 부딪혀 침몰해 마가로프 사령관이 사망했다.
그해 8월 견디다 못한 동양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향한 뤼순항 대탈출을 시도해 일부는 기뢰와 충돌하고 상당수는 서해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연합함대는 끝까지 추적해 대부분의 동양함대를 궤멸시켰다(황해해전). 연합함대가 동양함대를 격멸하자 노기 마레스케(乃木) 중장이 이끄는 일본 육군도 뤼순 지역의 러시아 육군을 공략해 항복을 받아냈다.
황해해전에서 승리한 연합함대는 곧바로 조선의 진해만에 들어가 아프리카를 돌아 달려오는 발틱함대와의 일전을 위한 강도 높은 훈련을 거듭하다 이듬해 5월 쓰시마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둔 것이다.
유틀랜드와 미드웨이 해전에서 공격자 측은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퇴각했으나 전과 면에서 보면 방어자 측과 호각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쓰시마 해전에서는 방어자 측인 일본 해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丁’자 모양으로 마주친 양쪽은 곧 대형 함정 12척씩을 나란히 달리게 하며 함포를 쏘는 대혈투를 벌였는데 러시아는 9척이 격침되고, 일본은 단 3척만 침몰했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데 이어 적장까지 생포했으니 일본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러일전쟁 10년 전에 발발한 청일전쟁(1894~95)은 한반도가 중국에서 벗어나 일본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는 일대 사건이었다. 중국은 당나라 시절부터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해왔는데 청일전쟁에 패함으로써 이를 일본에 넘겨주게 되었다. 그런데 경제가 고속 성장을 거듭한 지금 중국은 ‘한반도를 청일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겠다’며 동북공정(東北工程) 카드를 내밀고 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를 넘어 만주까지 장악하려다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로부터 방해를 받아 ‘삼켰던’ 요동반도를 토해놓게 되었다(3국간섭). 일본이 빠져나간 틈을 재빨리 치고 들어온 것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상당수의 육군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동양함대(태평양함대의 전신)의 주력을 뤼순(旅順)항으로 옮겼다. 그러자 그동안 일본의 위세에 눌려 있던 조선이 급속히 러시아 쪽으로 기울어졌다.
일본으로서는 청일전쟁으로 얻은 성과를 날려버리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일본은 정교한 계획을 세웠다. 러시아와 일전을 벌인다면 이는 해전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고, 훗날 ‘일본 해군의 아버지’라는 별칭을 얻은 야마모토 콘노효에(山本權兵衛) 해군대신을 중심으로 ‘해군확장 10년 계획’을 작성한 것. 그리고 한 해 정부 예산보다 많은 돈을 써가며 영국 등지에서 대형 전함을 수입하고, ‘언제나 운(運) 좋은 사람이었다’란 도고 헤이하치로를 연합함대 사령장관에 임명했다.
1904년 2월8일 일본은 도고의 연합함대로 하여금 뤼순항의 동양함대를 기습 공격케 함으로써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뤼순항을 포위한 연합함대는 항 외곽에 기뢰를 설치해 동양함대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봉쇄했다. 졸지에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된 동양함대는 여러 차례 돌파를 시도하는데, 이 과정에서 동양함대 사령관인 마가로프 중장이 탄 배가 기뢰에 부딪혀 침몰해 마가로프 사령관이 사망했다.
그해 8월 견디다 못한 동양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향한 뤼순항 대탈출을 시도해 일부는 기뢰와 충돌하고 상당수는 서해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연합함대는 끝까지 추적해 대부분의 동양함대를 궤멸시켰다(황해해전). 연합함대가 동양함대를 격멸하자 노기 마레스케(乃木) 중장이 이끄는 일본 육군도 뤼순 지역의 러시아 육군을 공략해 항복을 받아냈다.
황해해전에서 승리한 연합함대는 곧바로 조선의 진해만에 들어가 아프리카를 돌아 달려오는 발틱함대와의 일전을 위한 강도 높은 훈련을 거듭하다 이듬해 5월 쓰시마해전에서 대승리를 거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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