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 성 발굴        1900  2009. 5. 3. 22:56

반응형
글쓴이가 야훼교도 같은데 조금 유의해서 읽어야 할 듯..
------------------

신바빌로니아의 수도인 바벨론 성이 현대 이라크 수도인 바그다드 남쪽 60마일 지점에서 발굴되었다.

1899년부터 1917년에 이르기까지 거의 20년간 로버트 콜더베이(Robert Koldewey)교수는 독일 동방학회의 사업으로 바벨론 성을 발굴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사 13:20-21, 14:1; 렘 51:37) 지금은 폐허로 남아 있다. "오직 들짐승이 거기 엎드리고 부르짖는 짐승이 그 가옥에 충만하며 타조가 거기 깃들이며 들양이 거기서 뛸 것이며 그 궁성에는 시랑이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한 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사 13:21, 22)

발굴 결과 바벨론 성의 규모는 내외 전장(全長)이 15마일 정도이고, 느부갓네살 이후의 전 도성의 둘레는 하궁에서 옛 왕궁까지 유프라테스강 전면을 포함해서 10마일 정도였다. 강 동편의 내성을 두른 2중 성벽은 바깥 것이 22피트, 안의 것은 12피트였다. 바벨론 전 성읍을 바깥으로 두른 성벽 역시 2중 성벽인데 바깥 것은 26피트, 안의 것은 24피트였다. 폐허 중에 제일 높은 부분이 이슈타 게이트로서 48피트 가량이다. 본래 성안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은 300피트 가량의 신전 탑 '에테메난키'(Etemenanki)였다.

그 폐허에서는 느부갓네살의 이름과 직위가 찍혀진 평방 12인치 반의 벽돌이 발굴되었다. 가장 높은 건물은 주문(主門)인 이슈타 게이트인데 그 성문의 벽돌에는 바벨론을 상징하는 용의 머리, 사자의 몸, 독수리 뒷 발톱을 가진 복합 짐승이 문각되어 있어 다니엘 7장의 표상을 실감나게 하고 있다.

다니엘의 세 동무가 던져졌던 풀무는 벽돌 굽는 가마였다. 원추형으로 생긴 이 가마속에 진튊 벽돌을 쌓고 원유와 짚 또는 겨를 섞어 연료로 사용했다. 다니엘 3장에서 분노한 왕이 7배나 뜨겁게 하라던 것은 원유가 섞인 연료를 7배만 더 넣으면 된다. 또 우상이 세워졌던 '두라 평지'(단 3:1)는 지금의 힐라 언덕 5마일 아래에서 유프라테스 강으로 들어가는 한 지류의 입구에 있는 '나르 두라'(Nahr Dura)이다.

다니엘 6장의 사자굴은 고대 제국의 왕들이 스포츠로 사자 사냥을 위하여 사자를 가둬 두었던 곳이다. 이와 같은 사자굴은 앗시리아 여러 곳에서 발굴되었다. 사자굴을 인봉할 때는 그 입구를 돌로 맞고 그 둘레를 젖은 석회로 바른 뒤 원통 모양으로 문각된 도장을 굴려서 직사각형의 인상(印象)을 남겨 아무도 뜯지 못하게 했다.

다니엘 5장에서 벨사살이 마지막 잔치를 했던 큰 홀은 느부갓네살이 지은 남궁에 있다. 그곳 중앙에는 보좌가 있는 넓은 방이 있는데 길이가 173피트, 넓이 57피트, 높이 66피트이다(신계훈, 조대연, 고고학과 성서 배경, 134-140 참조).



--------------------------------------------------------------------



바벨탑은 어디 있었는가
창세기 11장 1-9절은 바벨탑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전 하고 있다.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 았다. .야훼게서 땅에 내려 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 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땅으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 두었다.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 을 온 땅에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혼란 이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탑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바빌론 제1왕조(BC 19-16세기) 시대에 바빌론 주변에 세워진 인공의 거대한 산, 즉 지 그라드의 하나이다. 그 정상에는 제사때에 신이 하늘에 서 강림했다고 생각되었다. 헤브라이어의 바벨은 바빌리 의 변음이며 바빌리안 앗카도어로 <신의 문>이라는 뜻 이며 원래는 도시 이름이었던 것이 뒤에 그리스어로 바 뷸론이라고 불리게 되고, 다시 그 지방 일대가 바빌로 니아라고 부르게 됐다. 이층탑은 메소포타미아 제 도시의 주요 신전의 중앙에 세워지고 파라밋 형태를 이루고 큰 토대 위에 보통은 7층으로 쌓아올린 햇 빛에 말린 벽돌로 돼있으며 각층 은 경사지게 만들어진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최상 층에는 신전이 설치 되어있고 거기서 희생을 드리는 의 식이 거행된다.
고대의 우르(현대명 텔.엘.무카이아르)나둘.운탄(현 대명 초가.잔빌)의 층탑은 특히 유명하다. 구약성서의 바벨탑은 바빌론의 유적 발굴조사의 결과 바빌론의 도성 마르둑의 신전 에사길라(<머리를 높이 든 자의 집>이라는 뜻)의 북방 에테메난키(<하늘과 땅의 토대의 집>이라는 뜻)라고 하는 층탑으로 동정 되어 있다. 이것은 슈메르인에 의해서 기공된 것이었 으나 셈족의 침입으로 정치적 변동이 일어나 준공하지 못하고 그 미완성의 층탑은 오랫동안 고대 세계의 수 수께끼의 하나였다.
그후 재건이 시도됐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하고 겨우 기 원전 6세기에 느브갓네살 2세(BC 604-562)에 의하여 수 축되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 정원이나 성벽도 이때 축조된 것이라고 한다. 바벨탑 설화는 야훼이스트 사료층에 속하며, 단순히 지 명의 유래를 설명하는 민간 어원이나 전설이 아니라 인 간의 오만이 인간 상호간의 몰이해를 빚어내어 탑 건축 이 중단된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의도는 바빌론의 탑의 기원에 빙자해서 홍수 후 다시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에게 도전하려고 하는 인간의 오만에 대 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러시아 문호 도스토엡스키(1821-1881)는 <카라마조프의 형제>(1867-1880)에서 인간의 가공한 바벨탑의 건축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


지구라트 가운데 ‘하늘에 닿을 만큼’의

높이로 쌓아올린 최고의 탑은 신 바빌로니아 때 재건된 ‘에테메난키’(‘하늘과 땅의 기초가 되는 집’이라는 뜻)라 일컫는 탑이다. 이 탑은 과거 몇 차례에 걸쳐서 지어졌다가 무너지고, 최종적으로는 나보폴라사르와 그 아들 네부카드네자르가 쌓아올렸다. 나보폴라사르와 네부카드네자르는 실제로 주신 마르두크를 위해 “하늘 끝까지”, “하늘과 그 크기를 겨룰 때까지” 높이 쌓겠다고 호언했다. 이를 위해 불에 구운 벽돌 8500만 개가 건축에 사용되었다. 문헌과 고고학자들의 고증에 의하면 탑의 정사각형 기저층은 가로 세로 90미터 가량이었으며 탑의 전체 높이도 90미터 가량이었다. 제1층은 높이 33미터, 2층은 18미터, 3∼6층은 각기 6미터였고 탑의 꼭대기에는 15미터 높이의 신전이 있었는데, 신전의 벽은 황금으로 꾸며 멀리서도 잘 보일 정도로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꼭대기의 신전은 마르두크를 위한 것으로 마르두크가 쉬어 가는 장소로 생각되어 여사제 한 명만에 그곳에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이 탑은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두크를 숭배하기 위한 국가적이고도 민족적인 성역이었다. 탑 옆에도 마르두크의 신전이 있었는데 이 신전에는 순금의 옥좌 위에 순금으로 된 마르두크의 신상이 앉아 있었다. 고대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묘사에 따르면 이 신상과 보좌 등의 무게(순금의 무게)는 무려 800달란트(약 22톤)나 되었다고 한다.

네부카드네자르 왕은 이 탑을 재건하기 위해 제국 안의 온갖 백성들의 노동력을 동원했으나 신 바빌로니아의 영화는 1세기도 못 되어 끝나버렸으므로, 바빌론의 주신 마르두크의 성역인들 온전할 리 없었다. 반란으로 인해 바빌론의 탑과 성채, 신전은 벽돌더미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철저히 파괴되었고, 이 때 금으로 만든 마르두크 신상도 녹아 없어졌다.


--------------------------------------------------------------------



<바빌론 성과 공중정원>

바빌론 성은 무너지고 황폐해진 상태로 이천여 년을 지내왔다. 1899년부터 1917년까지 이를 복원하여 바빌로니아의 찬란한 역사를 알린 사람은 로베르트 콜데바이를 비롯한 독일 고고학자들이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흙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거대한 도시 바빌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바빌론을 둘러싸고 있는 이중 성곽 중 외곽 성벽은 양변이 1800미터와 130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직사각형 모양이다. 헤로도투스는 이중으로 된 바빌론 성벽 위는 네 필의 말이 끄는 마차가 양쪽에서 달려와도 염려할 것이 없을 정도로 넓었다고 전했는데 콜데바이의 발굴로 이 사실은 곧 입증되었다. 7미터 두께의 진흙 벽돌 성벽이 발굴되자 곧 바깥쪽으로 12미터 가량 바깥에 7.8미터 너비의 벽돌 성벽이 발굴되었다. 그 바깥에는 다시 3.3미터 너비의 벽돌 성벽이 있었고 그 성벽의 바깥으로는 도랑(호)이 파여 있어서 유사시에 물을 채울 수 있었다. 내벽의 높이는 27미터 가량으로 추정되었다. 벽과 벽 사이는 정상까지 흙으로 채워져 있어 실제로 두 대의 마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만큼 넓은 길이 생겼다. 바깥쪽 성벽은 전체 길이가 18킬로미터나 되었고, 유프라테스 강에 인접하였다. 강에는 120미터 길이의 다리가 놓여 있었다.

콜데바이 일행은 ‘행진 대로’라고 이름 붙인 폭 20미터 정도의 넓은 포장도로도 발굴했다. 이 길에서 발견된 설형문자 비문에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위대한 마르두크 신의 행렬을 위해 바빌론의 도로를 포장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길 양쪽에는 푸른 타일을 붙인 벽이 있었고 그 벽면에는 2미터 길이의 사자 120마리가 새겨진 부조가 있었다. 바빌로니아에서 이 사자는 여신 이슈타르와 동일시되어 수많은 사자상이 남아 있다. ‘행진 대로’는 도시의 외곽 성벽에서부터 내성 입구인 ‘이슈타르의 문’까지 이어지며 용과 기괴한 짐승으로 장식된 이슈타르의 문을 빠져나가면 ‘에사길라’라는 마르두크의 성역으로 통하고 있었다. 이 성역에 네부카드네자르가 중건한 마르두크의 사원과 ‘에테메난키’로 불리는 거대한 탑이 있었던 것이다.

에사길라의 북쪽에는 왕궁이 있었고, 왕궁의 동북쪽에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유명한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있었다. 공중정원은 실제로 공중에 떠 있던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 있던 지구라트의 계단식 테라스에 만든 옥상 정원이었다. 가로·세로 각각 400m, 높이 15미터의 토대를 세우고 그 위에 계단식 건물을 세웠다. 맨 위층의 평면 면적은 60평방미터에 불과했으나 전체 높이는 105미터로 오늘날의 30층 빌딩 정도의 높이였다.

한 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수천 톤의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꾸며놓았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작은 산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고 전해진다.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이 곳에서 이렇게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 정원에서는 펌프를 이용하여 유프라테스 강에서 물을 끌어올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 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리고 그 물을 펌프로 각 층에 대어줌으로써 화단에 적당한 습기를 유지토록 하였으며 또한 그때그때 물뿌리개를 이용하여 물을 공급하도록 하였다.

정원의 아랫부분에는 항상 서늘함을 유지하도록 아치형의 두꺼운 천장을 가진 방을 많이 만들었으며 방에 물이 새는 것을 막기 위해 방 위에는 갈대나 역청을 펴고 그 위에 납으로 만든 두꺼운 판을 놓았다. 궁에서 창 너머로 바라보는 꽃과 나무의 모습은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또한 가진 방을 두꺼운 벽으로 갈라 일곱 개씩 두 줄로 줄짓게 하고 그 옥상의 테라스를 안뜰 모양으로 둘러쌌으며 테라스 위에 계단 모양으로 흙을 북돋아 여러 가지 초목을 심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중정원은 일명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으로 불리는데, 전설적인 여왕 세미라미스가 만들었다는 일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 이세가 메디아에서 시집온 왕비 아미티스의 향수(鄕愁)를 달래기 위해 메디아의 산을 연상시키는 공중정원을 만들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발굴된 성벽과 자료들은 바빌론이 중동 지역 최대의 도시였으며 난공불락의 요새였음을 입증한다. 이 바빌론 성은 지구상에 알려진 고대의 성 가운데 가장 크고 장려한 성이었다. 헤로도투스는 바빌론을 ‘세계에서 가장 웅대한 도시’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이 난공불락의 요새도 내란에는 견디지 못하고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에게 정복당했다.


--------------------------------------------------------------------


바벨론의 건설자에 대한 시비와 반증
20세기 초인 1889년부터 1917년에 걸치는 장장 18년동안 독일의 고고학자 로버트 콜더베이(Robert Koldewey)가 고대 바벨론성을 발굴하기까지 바벨론성의 크기와 규모 및 건설자에 대하여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고 당시에 그리스의 역사가를 통해 알려졌던 사실들은 다니엘서의 기록과 어긋나는 것이 많았다.

특히 그리스의 역사가에 의하면 느브갓네살은 고대 역사에서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고 바벨론성의 대건설자는 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삼무라마트(Sammuramat)로 불리우는 앗시리아의 모후(母后)로 그의 어린 아들 아다드니라리 3세(Adad-nirari Ⅲ)을 위해 섭정했던 세미라미스(Semiramis)가 바벨론성을 건설했고 다스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백년 동안 계속된 고고학의 발굴을 통하여 느브갓네살은 명실공히 대왕으로 다니엘서의 진술처럼 "이 큰 바벨론"(단 4:30)을 건설했음이 여러 비문과 건축물들 그리고 심지어는 느브갓네살의 이름이 설형문자로 찍혀진 벽돌까지 발굴해냄으로써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해졌다.

재위 43년 동안 느브갓네살은 적어도 세 개의 화려한 궁전을 건축했는데 동쪽 새 시가지에 위치한 하기 별궁 (夏期 別宮), 내성 북부 성벽 밖에 있던 중앙궁, 그리고 내성 서북쪽 모퉁이의 남궁(南宮)등이었다.

주신(主神)인 마르둑(Marduk)의 신전인 에사길라(Esagila)는 고대 동양의 모든 신전 가운데 가장 장대한 복합 신전이었으며 신전고탑(神殿高塔)인 에테메난키(Etemenanki)는 칠 층으로 그 높이가 300피트를 초과했다.

그 밖에 고대 세계의 칠대경이(七大驚異) 가운데 하나인 가공원(架公園 Hanging Garden)은 느브갓네살이 왕후인 메대왕 아스티아게스(Astyages)의 공주 아미티스(Amytis)가 고국 메디아의 산과 숲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그 평평한 바벨론 평지에 인조(人造) 동산을 만들어 펌프로 물을 끌어 올려 관개(灌漑)한 경이의 공원이다.

이 밖에도 아직까지 폐허 위에 40피트나 솟아있는 바벨론성의 주문(主門)인 화려하고 장대한 이슈타 게이트(Ishtar Gate)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건물들이 바로 다니엘서의 진술처럼 느브갓네살이 건설한 것이었으며 전설적인 세미라미스 모후(母后)는 그리스의 역사가의 고전 기록과는 달리 바벨론 건축과 하등의 상관이 없음이 밝혀진 것이다.

지금 베를린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느브갓네살 당시의 비문 하나에서만도 이 사실은 아주 분명하여지는데 아래에 적힌 비문의 내용과 다니엘서 4장 29, 30절의 내용을 비교하면서 느브갓네살의 건축에 관한 다니엘서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가를 고증(考證)하여 보자.

[나는 거룩한 도시요 위대한 도시들의 영광인 바벨론을 전보다 탁월하게 만들었고 그 재건을 장려하였다. 나는 신들과 여신들의 신전을 낮과 같이 환하게 불을 켜게 하였다. 모든 왕 가운데 내가 마르둑을 위하여 대대적으로 건축한 것 같이 신축한 왕은 하나도 없었으니 곧 전에 있던 왕은 건축한 일이 없었다. 나는 또 에사길라 신전의 시설을 더욱 늘렸고 바벨론을 일찌기 한 적이 없으리만큼 쇄신하였다. 나의 모든 가치있는 사업들, 곧 나의 선왕들보다 더 많이 한 위대한 신들의 성전을 미화하는 사업은 문헌에 기록하고 오는 세대를 위해 그것을 써 두었다. 나의 명이 길고 내가 자손에 대해 즐거워 하기를 바라며 나의 후손의 검은 머리의 백성을 영원히 다스리며 나의 이름이 장래에 영구히 선양되기를 바란다.]

[열 두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궁(宮) 지붕에서 거닐새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도성을 삼고 이 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단 4:29, 30).

이렇듯 피할 수 없도록 완전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서의 역사성을 앞장서서 비평해 온 하버드 대학교의 파이퍼(R. H. Pfeiffer) 교수는 이를 시인하고 고백하는 대신 아래와 같은 말로 비켜나가고 있다.

[우리는 추측컨데 우리 저자가 발굴이 증거한대로 느브갓네살이 신바빌로니아를 건설한 줄을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참으로 이들 고등비평자들이야말로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믿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 같아서 예수님의 나사로의 비유에서의 말씀처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


--------------------------------------------------------------------


신바빌로니아(Neo-Babylonia)

a. 세계 역사에서는 일반적으로 두 개의 바빌로니아를 구분하고 있다. 즉 기원전 1830년부터 1531년까지 3세기 동안 존속한 바벨론 제 1왕조인 구바빌로니아(the Old Babylonia)와 그 뒤 천년 후에 같은 자리에서 1세기를 못 넘긴(605-539 BC)느브갓네살의 신(新)바빌로니아(The Neo-Babylonia)로 구분된다. 성경에는 이런 구분이 없이 바벨론(Babylon)으로 불리워져 있다.

노아의 아들인 함의 손자인 니므롯이 홍수 후에 중부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 강변에 세운 도시인 바벨론(창 10:10, 11:9에는 바벨)은 그의 권좌가 되었다고 여겨진다(창10:10).

그후 아라비아 사막 쪽에서 밀려온 아모리(Amorites) 족속이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하고 남하하면서 유프라테스 강변의 도시 바벨론을 수도로 정하고, 거기서 제1왕조를 시작하여 약 3세기(1830-1531 BC)에 걸친 강력한 대제국을 이룩했다. 제1왕조의 11번째 왕인 하무라비(Hammurabi)는 하무라비 법전으로도 유명하거니와 제국의 전성기를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그전까지는 미미했던 바벨론시를 고대 세계 최고의 도시 가운데 하나로 만들었음이 고고학 발굴에서도 확인되었다. 또한 바벨론의 신 마르둑(Marduk)을 여러 신 위에 뛰어나게 했으며 그를 위한 신전 에테메난키(Etemenanki)를 고대 세계의 경이가 될 만큼 웅장하게 건립했다.


--------------------------------------------------------------------


바벨론의 종교적 배경 목차로

주께서 유대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殿)기구 얼마를 그의 손에 붙이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의 묘에 이르러 그 신의 보고에 두었더라」(단 1:2).

다니엘서는 바벨론과 유다의 대결이 단순한 군사적,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전에 대적하는 시날(바벨론)땅의 신과 그 신전의 대치(對峙)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바벨론 종교의 배후를 아래에 요약해 본다. 바벨론의 종교의 기원과 특성은 바로 하늘에서 최초의 반역을 시도했다가 뜻을 이 루지 못하고 추방당한 루스벨에 의해 시원(始原)되었다. 즉 이사야 14장 13, 14절과 에스겔 28장 12-17절에 나타난 정신이 곧 바벨론 종교의 특성이 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모든 피조물들의 애정과 충절(忠節)을 받을 만한 최고의 분으로 삼 는 대신에 저들의 봉사와 충절을 자기 자신이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이 천사장은 무한하신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부여하신 대권(大權)을 갈망하였다 . . .이리하여 하나 님의 아들의 최상권에 항쟁하기 위하여 창조주의 지혜와 사랑을 비난하는 것이 이 천 사장의 목적이 되었다」(부조와 선지자 상, 22, 23).

하나님의 최상권에 도전하고 그 분의 주권(主權)을 훼손하려는 음모로 인하여 하늘에서는 전쟁이 있었으며 루스벨과 그의 추종 천사들은 하늘에서 추방당했으나(계 12:7, 8)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지구에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계 12:9-12).

사단이 되어버린 루스벨(새벽별)은 그가 하늘에서 이루지 못한 그의 야망을 땅 위에서 실현하기 위해 안간 힘을 썼다. 사단의 이러한 노력이 적어도 조직적으로 결실을 본 것은 노아의 증손 니므롯을 통한 바벨탑의 건립으로 군주국가를 형성하고 백성을 집단화하여 하나님의 주권에 공공연히 대적한 때부터였다. 「사람들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경멸하도록 선동한 사람은 니므롯이었다. . . 그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마련하는 수단에 의해 그들이 행복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는 점진적으로 폭정을 행했으며 사람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길을 떠나 계속해서 그의 힘에 의지하도록 했다. . . 그 탑이 세워졌던 장소를 지금 바벨론이라고 부르는데 그 까닭은 전에는 쉽게 이해했던 언어가 혼잡을 이루었는데 히브리어로 바 벨(Babel)이 "혼잡"(Confusion)이기 때문이다.」

니므롯의 이러한 시도는 하나님의 힘의 개입으로 일시 중단되었으나 (창11:5-8) 그의 정신과 계획은 고대 세계에 확산되어 메소포타미야 전역의 도시마다 축소형 바벨탑에 해당되는 신전고탑(神殿高塔)이 세워져 이것을 중심으로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우상 숭배가 번져갔다. 이 신전고탑(지구랏: Ziggurat)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로 바벨론 성 안에 있던 "에테메난키"(Etemenanki)인데 그 뜻은 "하늘과 땅의 기초가 되는 집"이며 함께 세워진 주신(主神) 마르둑(Marduk)의 장엄한 복합신전은 "에사길라"(Esagila)로 그 뜻은 "그 꼭대기가 하늘처럼 높은 집"이다. 이러한 이름들은 니므롯의 바벨탑을 쌓을 때의 이상(理想)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을 뿐더러(창 11:3, 4) 하늘에서의 루스벨의 의도 (意圖)가 표현된 작품임에 틀림없다(사 14:13, 14).

특별히 바벨론의 주신(主神)인 마르둑(Marduk)은 하늘의 대신(大神)인 이(Ea)의 아들로 사람을 비롯하여 지면의 식물과 짐승을 창조하고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만든 후 거기에 이들을 살게 했다는 신으로 당당히 소개되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과 직권을 모방한 루스벨의 참람된 모습이다. 마르둑은 성경 여러 곳(렘 50:2, 51:44, 사 46:1)에 "벨"(Bel)로도 불리워지는데 "벨"은 "주"(Lord)를 뜻하는 "바알"과 같은 명칭으로 모든 신의 주로서 왕권을 베푸는 권위를 특히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가나안의 주신인 바알도 마르둑과 상통하는 배경을 가지 고 있다. 즉 그는 성경의 하나님을 뜻하는 "엘"(El)신의 아들로 히브리어로 "주"(Lord)를 뜻하는 "바알"로 불리우면서 자신은 "멀리 북쪽 하늘 놓은 산 위에 좌정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하늘의 주"(Baal-shamem)로 불리우고 있어 이사야 14장 13, 14절의 루스벨의 속셈을 드러내고 있다.

괄목해야 할 사실은 바벨론의 주신 마르둑의 신전 인 에사길라가 하나님의 전인 예루살렘 성전과 구조 뿐 만 아니라 제사 방법도 흡사하다는 사실이다. 성소에 해당하는 외전(外殿)이 있었다. 외전 중앙에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단(祭壇)이 있었으며 그 옆에는 정결을 위해 씻을 수 있는 물대야도 놓여 있었다.

「바벨론 신전은 솔로몬의 성전과 거의 흡사함이 보여 질 것이다. 바벨론 신전도 두 개의 뜰과 제사장들을 위한 방들과 성소와 지성소를 갖고 있다. 겉 모양이 건축미나 설계상의 다양성도 없는 직사각형의 궤짝들 같다는 점에서도 같다. 이스라엘 성전과 바벨론 신전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바베론 신전에 는 신전고탑(에테메난키)이 있는 것 뿐이다. 심지어 기구의 세목에서도 같다. 바벨론 신전의 두 제단이 예루살렘 성전에도 있고 시은좌(施恩座)며 진설병의 떡상도 그렇다.」

특별히 고고학에 의해 알려진 의식과 조직은 우리에게 새로운 빛이 된다. 「바벨론 신전들은 제사장의 집단에 의해 섬겨졌다. 그들의 최고의 머리는 바벨론의 초기 역사에서는 왕의 기능을 수행했던 "파테시"(Patesi)라고도 하는 대제사장이었다. 이 "파테시"는 본질적으로 신의 대리자였다. 신이 그에게 자신의 능력을 위임하였으며, 지상에서 그 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은 사제(司祭)중보의 교리를 논리적인 결론으로 이끌어간 교리이다. 바벨론 에서 는 이미 보여진 대로 양자(養子)규례에 의해 신권(神權)이 부여되었다. 즉 벨(마르둑) 신의 대리자(왕)가 신의 "손을 잡음으로써" 신의 아들이 되어 인간에 대한 그의 통치권을 행사할 권리를 획득하게 된다 . . . 바벨론 군주 정 치의 시초는 근본적으로 신정(神政)이었으며 왕은 단순 히 새로운 형태의 대제사장이었던 것이다. . . 신의 대리자인 왕은 신의 모든 속성(屬性)들을 자신이 취해버렸으며 신의 양자인 왕은 그의 거룩한 아버지가 되는 신의 모든 권리와 능력을 계승하였다. 최고의 군주는 어디에서나 그의 이름으로 다스리는 치 리자를 가지고 있게 되며 이는 그의 이러한 신권을 대표하는 사람을 가진 셈이 되었다. 이리하여 하늘에 있는 신들의 대제사장이 있게 되었음과 아울러 땅 위의 신(군주 자신) 의 대제사장도 있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밝혀진 바벨론 종교의 진상에서 우리는 적어도 몇 가지 사실을 쉽사리 확인하게 된다. 첫째는 사단이 가인을 통하여 아벨의 성소(제사)와 유사한 위조(僞造) 성소 (제사)를 차리게 함으로써 진정한 구속의 경륜을 혼란하게 하고 오해시키려 한 것과 같은 시도를 고대 바벨론을 비롯한 이교의 종교를 통해 전개해 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단의 시도는 현대의 영적 바벨론을 통해서도 여전히 추진되고 있는 사실인 데 하늘의 참 성소를 모방한 지상의 유사성소인 미사(Mass)의식과 인간 사제(司祭)를 중 보로 한 간접신앙, 고해성사 등 많은 요소들이 바로 이러한 고대 바벨론 종교의 배경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서 지상권(至上權)을 주장해 온 교황권의 거금(距今)의 역사와 교권(敎權)과 속권(俗權)을 어울러 나라들과 교회들의 머리로 군림해 온 사실들 은 고대 바벨론 종교체제의 "파테시"적인 역할의 재생인 것이다. 참으로 고대 바벨론과 현대 바벨론의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배후를 쉽사리 알게 된다(살후 2:4). 고대 세계는 오직 두 개의 종교제도를 가졌었는데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구속의 경륜에 입각한 제도였으며 다른 하나는 바벨론 에 중심을 두고 "벨"(마르둑)의 신전인 에사길라에 집약된 유사(類似) 위조(僞造)종교였 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고 하늘의 참 성소에 입각한 바른 신앙과(히 4:16, 8:1,2), "귀신의 처소"로 화한 지상의 바벨론에 속한 거짓 신앙인 것이다(계 18:2, 3).

「이방인들의 제사제도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도를 그릇되게 고쳐 놓은 것이다. 이방 나라의 제사제도를 신실히 지키는 많은 사람들이 히브리 사람들에게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사제도의 참 뜻을 배우게 되고 믿음으로 구세주에 대한 허락을 굳게 붙잡았다」(1 DA, 27).


--------------------------------------------------------------------


[내가 건설한 이 큰 바벨론]
느브갓네살로 하여금 이토록 파멸적인 교만에 빠지게 한 바벨론은 실제로 얼마나 장엄했고 화려했는가. 이에 대한 확인은 고대의 문헌과 현대 고고학의 발굴을 통하여 가능하다. 바벨론은 느브갓네살 이전 천여년 전인 아모리왕 하무라비가 세계적인 도시로 만든 이래 어머니 도시(the mother city)로 높임을 받았었다. 앗시리아에 의해 지배받던 굴욕의 시대에도 바벨론은 학문과 법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아버지 나보포랏살이 재건을 시작한 이래 느브갓네살에 이르러서는 대대적인 재건 및 확장 및 미화(美化)사업이 계속되어 이전의 도시는 거의 잊혀졌다.

[느브갓네살은 한 세대 안으로 고대의 찬란함을 훨씬 능가하는 참으로 필설로 묘사하기가 어렵도록 장엄하게 일으켜 놓았다. 그래서 그 놀라운 매력을 지녀온 로마가 웅장하고 화려하고 집중적인 모든 것의 상징으로 전형적인 세계 도시라고 하지만, 인류의 정신과 상상력에서 바벨론을 당해낼 수가 없다. 고대 역사가들은 유프라테스 강변의 이 위대한 도시의 궁전들과 신전들, 가공원들의 웅장함을 묘사할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다.]. James Baike, "The Cradle of Civilization," The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Feb., 1916, 158.

발굴된 당대의 한 비문에는 자신의 업적이 이렇게 쓰여 있다.

[나의 이전의 어떠한 왕도 이룩하지 못한 것을 나는 했는데 바벨론 바깥 쪽 바벨론 동편으로 그 도시를 둘러 큰 성을 쌓았다. . . . 나는 그 머리를 산처럼 높혔다. . . . 에사길라와 바벨론의 방벽을 나는 견고하게 하였고, 나의 통치에 대한 영원한 이름으로 만들었다. 오 ! 마르둑, 신들 중의 주요, 나의 거룩한 창조자요, 당신 앞에서 나의 행위가 경건해지고 그것들이 영원하게 하소서 . . .오 ! 마르둑이여, 당신은 참으로 나의 구원자요, 나의 도움이십니다.]. Ibid., 368, 369.

1899년부터 1917년에 걸쳐 로버트 콜데베이(Robert Koldewey)의 지휘 아래 진행된 발굴을 통하여 고대 바벨론 성의 상당한 부분이 밝혀졌다(사진 참조). 발굴 결과 느브갓네살 이전의 바벨론은 유프라테스강 동편의 내성가(Inner City) 부분밖에 없었는데 그 크기는 사면이 각각 1마일쯤 되는 거의 정방형이었다(지도 참조). 궁전들과 행정부 건물들은 내성가의 서부 지구에 있었고 그 아래 남쪽으로 마르둑신을 위한 복합 대 신전인 에사길라(Esagila)가 있었으며 그 중심이 되는 신전고탑(Ziggurat) 에테메난키(Etemenanki)가 300피트 이상의 높이를 자랑하며 서 있었다. 고대 세계에서 이것보다 높은 건축물은 이집트의 기자(Giza)지방에 있던 두 피라밋 뿐이므로 이 탑은 니므롯이 쌓은 바벨탑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것일 것이다. 이 벽돌로 된 고탑은 7층으로 되었는데 맨 윗층은 마르둑을 섬기는 신전이었다. 느브갓네살이 왕이 된 후 바벨론이 대 제국으로 뻗어감에 따라 수도 확장공사에 착수하여 유프라테스강 서편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이를 신시가(新市街; New City) 혹은 강서구(Western Quarter)라고 부른다.. Horn, 42.

이들 신.구 시가지는 중앙 부분에서 여덟 개의 교각을 가진 한 개의 다리로 연결되었음이 발굴에서 드러났다. 이들 두 시가는 이중 성벽으로 두른 외에 성 밖으로는 유프라테스 강물을 끌어들인 방어용 해자(垓字.Moat)를 파서 바벨론을 명실공히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게 했다. 느브갓네살이, 이 바벨론성은 "내가 . . . 건설"하였다고 한 가장 뚜렷한 인상은 폐허에서 발견되는 벽돌에 그의 이름과 직위가 그의 건축에 관한 기록과 함께 문각된 벽돌을 보면서 더욱 확실해진다(사진 참조).. 다니엘서 주석, 124.

이렇게 해서 아름답고 장엄하게 건축된 바벨론을 바라보며 자긍했던 느브갓네살의 뇌까림(4:30)이 입수된 고대의 바벨론 찬양시에도 나타나 있다. 느브갓네살은 또 다시 유프라테스강 동편 옛 시가지 북편 멀찌기에 그의 여름 궁전(Summer Palace)를 새로 짓고 이 별궁(別宮)의 방어를 위해 이중으로 된 외성을 구축하여 이들 내성과 외성의 총 길이는 13 마일이나 되었다. 실제의 도시 둘레는 10마일로서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7 마일 반이었던 것에 비해서도 컸을 뿐더러 6마일 밖에 안된다

제정시대의 로마시보다도, 기원전 5세기쯤 전성기를 맞은 그리이스의 아테네가 4 마일 밖에 안 되었음에 비추어 바벨론이 얼마나 큰 성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무엇보다도 느브갓네살이 건축한 세개의 큰 궁전은 그의 영광을 말해 주고 있는데 하나는 내성가 서북쪽 모서리에 있는 남궁(南宮; Southern Palace)으로 왕의 공적인 거처였고 집무를 위한 공식 건물이었다. 이 남궁에서 모든 국가 행사가 거행되었는데 그 궁전 중앙에는 보좌가 놓인 큰 홀이 있었으며 그 길이가 173 피트, 폭이 57 피트, 높이가 66피트나 된다. 바벨론 함락 전야에 벨사살이 귀인 1000명을 위해 주연을 벌인 곳으로 생각된다(단 5:1). 이 남궁에 연접해서 고대 세계 칠대 경이 가운데 하나로 느브갓네살이 메대의 공주인 그의 왕후 아미티스(Amytis)를 위해 만들었다는 공중정원(혹은 架公園)이 있었다.

그리고 이 공원의 바깥 길 즉 행렬가(Procession Street) 건너 입구에는 바벨론 성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주문(主門)인 이쉬타 문(Ishtar Gate)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성문은 이중 성벽에 맞춘 이중 문으로 길이가 170 피트나 되었고 높이와 두께가 다른 네개의 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사진 참조). 이 문은 파괴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폐허 위에 40피트 가량이나 높이 솟아 있다. 이 문의 윤택나는 벽돌에는 누른 빛의 황소들을 비롯하여 뱀의 머리, 사자의 몸, 독수리 뒷 발톱을 가진 복합 짐승들이 양각(陽刻)되어 있어 다니엘서 7장과 계시록 13장에 나타나는 표상을 실감나게 하고 있다(사진 참조).. Wiseman, 71.

느브갓네살이 건축한 또 다른 궁전은 남궁의 머리 맡 내성가 북부 성벽 바로 밖에 있던 중앙궁(Central Palace)이다. 이 궁전은 바벨론의 찬란한 역사를 입증해 주는 사료(史料)들이 진열된 박물관도 있었다. 다른 또 하나의 궁전은 외성가(Outer City) 혹은 신강동구(新江東區; Eatern N- ew Quarter) 북단에 세워진 여름 궁전(夏宮; Summer Palace)인데, 지금까지도 바벨론의 폐허 가운데 가장 높은 구릉(mound)으로 남아 있으며 그 이름도 텔바빌(Tell Babil)로 전해지고 있다.. Horn, 38, 39.

건축에 사용된 벽돌들도 참으로 다양하며, 각종 건축물의 내부 구조는 굽지 않은 벽돌을 썼지만 외부 즉 바깥 표면은 구운 벽돌, 때로는 색깔을 써서 윤택을 낸 유색 벽돌을 썼다. 도시 성벽의 표면은 누런 색의 벽돌로, 성문들은 하늘 색의 벽돌로, 궁전들은 장미색 벽돌로, 그리고 신전들은 흰색의 벽돌을 썼으니 색상이 얼마나 아름다웠겠는가.. Wiseman, 72.

[오, 바벨론이여, 너를 보는 사람마다 다 기쁨에 넘친다. 바벨론에 사는 사람마다 그의 생명이 길어지고, 바벨론을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마다 자기 어미를 죽이는 사람같다. 바벨론은 열매가 보기 좋은 달콤한 대추야자 나무 같다.]. E. Ebeling, Keilschrift texte aus Assur Religiosen Inhalts, part I (Leipzig, 1915), No. 8.
반응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