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 진보당 총재 선생님은 무신론자에, 토지개혁의 선구자로 좌파 박정희 각하의 토대.
정통 우파의 뿌리가 되는 민주당(한민당)이 있다면 좌파의 시발이었으나 이승만에게 탄압당해 사라진 좌파의 뿌리 진보당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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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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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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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8년 9월 25일 대한제국 경기도 강화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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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9년 7월 31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
사인 | 처형(교수형) |
국적 |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
별명 | 호 죽산(竹山). |
학력 | 일본 주오대학교 정치학과 1년 수료 |
직업 | 독립운동가, 정치인 |
종교 | 무신론, |
배우자 | 김금옥, 김조이 |
자녀 | 딸 조호정, 딸 조의정, 딸 조임정, 아들 조규호 |
부모 | 아버지 조창규(曺昌奎), 어머니 유씨(兪氏) |
친척 | 형 조수암, 동생 조용암 |
조봉암(曺奉岩, 1898년 9월 25일 인천 강화 ~ 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일제 강점기에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 공산대학 2년 수료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조직되었을때,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소련, 중국, 만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등[1] 사회주의 운동을 하였으나, 1946년 5월 박헌영과의 갈등을 계기로 사상전향하여 좌우합작·남북협상 노선을 걷다가 1948년 단정에 참여, 5.10 단독총선거와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1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제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고,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30%라는 지지율을 받아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958년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호는 죽산(竹山)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출신[2]
목차[숨기기] |
활동 [편집]
유년기와 학창시절 [편집]
조봉암은 1898년 9월 25일 경기도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에서 창녕조씨인 아버지 조창규(曺昌奎)와 어머니 유씨(兪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항렬상 환(煥)자 돌림이었으나, 두 아들을 일찍 잃은 아버지 조창규는 셋째 아들을 명이 길었으면 하여 수암(壽岩)이라 짓고, 이어서 넷째는 봉암(奉岩), 막내 아들 이름을 용암(龍岩)이라 지었다.
그는 강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농업보습학교로 진학했다.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후 극심한 가난으로 중학 진학을 포기하고, 1년을 허비하다가[3] 군청에 공무원으로 임용, 강화군청 사환으로 잠시 복역했다. 그뒤 강화군청을 그만두고 경성부로 상경, 경성YMCA중학부에서 1년 학습하였다.
조봉암의 주산 실력은 최고였던 것으로 보인다. 토지대장을 꾸미느라 숫자를 맞추고, 통계를 내는 데 10명의 일을 혼자서 했다고 한다. 그러나 괴팍한 성격의 상사와의 불협화음으로 곧 공무원직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도 잘못하지 않은 일에 고개를 숙이는 일은 없었다 한다.[3]
독립운동 [편집]
YMCA중학부 재직 중 3·1 운동에 참여하여 1년간 투옥되었다가 1919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 경무국 소속 직원으로도 활동했었다.[출처 필요] 그뒤, 임시정부의 파벌 싸움에 실망감과 염증을 느껴 도일, 일본 주오 대학교(中央大學敎) 전문부에 입학했다. 주오대학교 정치학과 1학년 재학 중 '흑도회'(黑濤會)라는 사회주의계열 단체에 참가하여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었다. 그러나 흑도회가 해체되면서 그는 주오대학을 1년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1924년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일파인 화요회에 가입해 회원이 되었다.
1925년 4월 17일 경성에서 열린 조선공산당의 조직에 참여하고, 4월 18일 서울에서 박헌영, 김단야 등과 박헌영의 집에서 비밀리에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간부가 되었다.
그러나 1925년 11월 조선공산당 1차 조직이 와해되자 피신하였고, 1925년 12월 제2차 조선공산당이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제2차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자 그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4]
1926년 7월 코민테른 극동국 조선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27년 4월 이동녕·홍진·조완구 등의 독립운동지도자 24명과 함께 상하이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직을 맡았다.[5] 27년 5월 중국공산당 한인지부를 조직하여 책임자로 활동했고, 6월 국제적색노동조합(프로핀테른) 주최의 범태평양노동자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해 조선의 노동운동 방침을 밝혔다.[6] 그러나 상하이에서의 활동 당시 애인 문제와 자금 문제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7] 이후 ML당을 조직하는데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30년 항일운동에 연루되어 신의주의 감옥에서 7년간 복역하였다.[8]
1940년 이후 일제 총독부의 가혹한 감시와 탄압으로 인해 활동을 중지하였는데, '유휴분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9]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투옥중일 때 리승엽에게 '친일파로 사상 전향한것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비판하였고, 전향을 권유하였다.[10]
광복 직후 [편집]
1945년 8월 15일 해방직후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수감에서 풀렸다. 여운형은 그의 출소를 직접 마중나가기도 했다.[11]
광복 후 조선공산당 중앙간부직과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인천지구 위원장등 공산주의계열에서 활동을 하다가 1946년 박헌영과 갈등, 반목하게 된다. 박헌영은 조봉암을 공산당 창설과정에서 배제하려 하였는데,[12] 1932년무렵부터 조봉암과 박헌영은 사이가 안좋았다 한다.[13]
1946년 3월 박헌영을 비판하는 공개 편지를 보내다가, 민전 인천시 지구를 수색하던 미군 CIC 방첩대에 의해 빼앗겼다.[14] 그뒤 일부를 개작하여 발표했다.
1946년 5월, 박헌영에게 경고하는 공개서한을 보내고 좌익에서 우익으로 사상전향, 공개서한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공산주의와 완전히 결별선언하였다. 그는 원래 공산당에서 출발했지만 광복 후, 박헌영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공산당과 결별하게 됐다.[15] 1945년 5월 15일 민전 인천시지구 위원장직으르 사퇴하였다.[16]
[17][18]
- 첫째, 인민위원회가 조직이나 운영 면에서 문제가 많다. 현금의 인민위원회는 비공산적 요소가 거의 없어 공산주의자들의 정치구락부에 지나지 않는다.
- 둘째, 민전에 공산당원이 과대히 침투하여 비당 군중의 능동적 행동을 스스로 제약하고 있다.
- 셋째,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투쟁의 방침은 진실로 옳았지만, 기술적으로 졸렬했기 때문에 군중들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 넷째, 무원칙하다.
- 다섯째, 종파적이다.
조선공산당과 결별을 선언한 조봉암은 당시 배신하였다고 하여 북쪽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19]
1946년 6월 12일 미국 CIC 방첩대에 의해 구금되었다.[20] 6월 22일 석방되었다. 6월 23일 민전 주최의 인천시민대회 때 좌익을 비난하는 노골적인 성명서가 그의 명의로 배포되었다.[21] 서중석은 이를 공작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22]
좌우합작과 남북협상 참여 [편집]
1946년, 조봉암은 김규식과 여운형을 지지하고 그들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김규식을 찾아가 좌우합작운동에 참가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조봉암을 '공산주의자'로 인식하던 김규식은 그의 참여를 거절하였다.[23] 김규식이 조봉암을 거절한 이유는 공산주의를 하던 사람을 어떻게 믿느냐는 것이었다. 조봉암은 한글학자 이극로와 함께 민주주의독립전선을 조직하고 민족주의독립전선의 간부로서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였다.[23] 그러나 좌파에서 전향한 이유로 조봉암은 1948년 4월 남북협상때 북한에 다녀올 수 없었고, 민주주의독립전선의 대표로는 이극로 홀로 북한을 다녀왔다.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이 실패로 끝난뒤, 이극로는 북한에 남아 있었고, 민주주의독립전선은 1948년 5·10 선거에 참여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논란을 벌이다 와해되고 말았다. 이후 이극로 계열은 북으로 올라가고, 조봉암과 그의 계열은 남한에 남게 되었다.[24] 1948년 5월 10일의 단독정부 수립 총선거에 참여의사를 밝힌 뒤로는 테러 위협에 시달렸는데, 선거기간 중 테러의 위협을 피해 민가에 은신하며 생활하기도 했다.[3]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 [편집]
1948년 5.10 총선거때 선거에서 강원명이 조봉암을 도와달라며 이범석을 찾아갔으나 거절당하였다. 역시 이범석의 총리 인준시 무소속 의원들이 협조를 부탁하자, 조봉암은 이범석을 '군국주의자'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25] 5.10 총선거에 출마하여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48년 5월 제헌국회에서 헌법기초위원을 선출할 때 한민당에서 무기명투표방식을 주장하며 다수득표자 순으로 헌법기초위원을 선출하자고 제안하자, 곽상훈과 함께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26] 그뒤 조봉암은 헌법기초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7월 22일 초대 내각 인준시 초대 농림부 장관에 취임하여 농지개혁법을 입안하였으며, 1950년에는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는 대한국민당 공천으로 민의원 출마하여 재선되었고, 국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1] 1950년 한국 전쟁 중에는 국회의장 신익희와 함께 대통령 이승만을 면담하러 갔으나 이승만은 각료들의 권고로 도피하였고, 대통령을 면담하지 못한 조봉암과 신익희는 국회 휴회를 선언하고 의원들에게 피신령을 내렸다.
이때 신익희는 측근들과 함께 가자 해놓고 가족들과 먼저 경기도 수원으로 피신한 반면, 조봉암은 끝까지 남아 서류들을 정리하고 불태운 뒤 동료 의원들을 피신시킨 뒤 미처 피하지 못한 윤길중 등의 청년들을 데리고 남하하였다. 그러나 아내 김조이는 차마 데려오지 못하고 그대로 실종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윤길중 등은 조봉암을 따르게 되었다. 이때 서울은 조선인민군이 점령하였고 '반역자 조봉암은 체포하면 죽인다.'라는 문건이 담긴 포스터와 방이 붙여져 있었다. 뒤늦게 야밤에 대전으로 내려오자, 이승만은 공산당과 내통하였다더니 내려왔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뒤 대한국민당을 탈탕하고 1952년 8월 5일에 치러진 제2대 대통령 선거에 유엔감시하 총선거를 통한 평화통일, 국민의료제도, 국가보장교육제도,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 농촌 고리채 지불 유예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27]
이승만 정권의 방해 공작으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등록조차 하지 못하였으나, 1956년 5월 15일에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무려30%의 지지율을 기록하는 등 선전하였다.
정치 활동 [편집]
1954년 11월 30일 자유당의 연임에 저항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려 하였다. 호헌동지회가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논란이 일자 장택상, 김성수, 박기출, 서상일은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참여에 찬성하였으나, 조병옥, 장면, 김도연, 곽상훈 등은 조봉암의 참여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신익희는 한발 물러서 있었다. 1955년 1월 21일 호헌동지회 총회가 열릴 때 호동은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호동은 민주대동파(대동단결파)와 자유민주파로 나뉘었다.[28] 이때 김성수는 자유민주파에 영향력을 주고 있었다.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사람을 보내 공산당이 아니라는 성명서를 내줄 것을 부탁하였다.[29] 대한민국의 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봉암은 굴욕감을 느꼈지만 순순히 받아들여 "인촌이 그리 하기를 원한다면 내가 그리하겠다." 하고 자신은 공산당이 아니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29]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려던 조봉암은 김성수를 찾아가 자신이 전향했음을 거듭 확인시키기도 하였다.
후일 윤제술은 '김준연과 조병옥이 조봉암을 받아들이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하자, 신도성은 김준연이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것을 격렬히 비난했고, 조병옥이나 신익희는 어물어물 할 다름이라고 증언했다.[30][31] 이 문제에서 신익희는 회피하였다. 김성수는 "민주대동이라고 했으면 그대로 해야지, 왜 딴소리들을 하느냐. 해공의 책임회피가 문제야."라며 양쪽 모두 공박하였다.[32][30]
김성수는 민주국민당이 조봉암의 신당 참여문제로 알력이 심하였을 때, 민주대동의 입장에서 조봉암과 합작할 것을 보수파에 권고하였다.[30] 보수파들은 김성수의 정치적 영향력에 마지못해 조봉암이 반공주의노선을 견지하겠다는 것을 공적으로 약속한다면 좋다는 태도로 나와,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태도를 명확히 표명해줄 것을 권고하였다.[30] 조봉암은 성명서를 작성해서 2월 22일 발표하였으나 김성수는 조봉암의 성명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조봉암의 참여는 좌절되었고, 이 일로 장택상, 서상일은 호헌동지회 참여를 거부하게 되었다.
조봉암은 이후 박기출, 서상일 등과 함께 혁신정당 구성을 추진하였으나, 서상일 등과도 이견이 생겨 서상일 일파가 분리되어 나갔다. 1956년 11월 박기출 등과 '책임 있는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의 3대 정강을 내걸고 민주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진보당을 조직하였다.
대선 출마 과정 [편집]
강원용은 그가 대선에 출마하게 된 원인을 미국으로 지목하였다. 강원용의 증언에 의하면 미국 인사가 그에게 접근, 한국이 미국의 최일선 기지인데, 당신 같은 사람이 대통령을 할 수 있겠냐고 했더니 조봉암은 그렇지가 않다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미국 인사는 자기가 미8군 사령관도 만나고 미국대사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이 “남북 문제는 평화적 해결 외엔 방법이 없다. 그 일에는 당신이 적임자니까 당신이 해야 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33]
강원용은 주한 미국대사와 8군 사령관이 조봉암을 찾아와서 대선출마를 권유했다 하며 한국 대통령이 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영어를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힘들겠지만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조언했다고 증언하였다.[33] 조봉암은 미8군 소속 미군의 방문을 받게 되었는데 사령관이 매일 아침 자기 부하를 조봉암씨에게 보내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강원용에게 말했다고 한다. 조봉암은 미국이 자신을 지지한다고 확신하였다. 조봉암의 측근이었던 윤길중 등은 그런 미국의 속내를 모르고 미국이 조봉암 선생을 지지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33] 조봉암은 강원용과 친해지고자 나는 당신이 좋으니까 당신 보러 주일마다 경동교회에 나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강원용의 아내의 반대로 경동교회에 나가는 일은 포기해야 했다.[33]
선거 패배와 사형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진보당 사건입니다.
1956년 대통령 선거 중 북한을 비밀리에 왕래하는 상인 양명산(梁明山)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 자유당 정부와 관변단체 및 우익단체들은 조봉암이 양명산을 통해서 북한으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고 공격하였다.
1958년 1월,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진보당 주요 간부들과 함께 간첩죄로 체포되었고, 1심에서는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간첩 혐의에 대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조봉암이 사형을 선고받자 조봉암과 가까웠으며 그를 잘 알고 있었던 장택상은 조봉암의 구명운동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8] 2월 20일 육군특무부대는 양명산 사건을 발표하여 조봉암이 양명산과 접선하면서 북과 접촉하였고, 정치자금(공작금)을 받았고, 북한의 지령에 따라 여러가지 간첩행위를 했다고 발표하였다.[34]
이후 장택상은, 조봉암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서서 조봉암 구명운동을 하였고, 조봉암을 변호하는 변론을 써서 법정에 대신 제출해 주기도 했다.
1심 재판부는 조 위원장에 대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은 유죄로 인정했지만 간첩 및 간첩방조죄는 무죄를 선고했다. 판결 후 자유당의 정치깡패인 이정재 수하의 반공청년단원 200명이 용공판사타도를 외치며 법원으로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심의 변호인단이 구속되거나 검찰의 신문을 받기도 했다.[34] 그 후 2심 재판부의 판단은 크게 달랐다. 양명산이 진술을 번복, 검찰과 특무대에서 허위진술해 조 위원장을 간첩으로 몰았다고 말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간첩죄를 적용, 사형을 선고했다. 대법원도 2심과 마찬가지 판단을 내렸다.[34]
장택상은 해방후 좌파탄압에 힘을 쏟던 사람이였는데, 조봉암이 끝내사형 집행이 선고되자 장택상은 이를 개탄하였다고한다.[19]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교수형에 처해 사형되었다.
평가 [편집]
조봉암의 죽음은 당시에도 억울하게 생각하는 견해가 있었다.[19] 1958년 5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죽산이 간첩 양명산에게 속았다는 진술을 했다”고 보도하였고 1959년 7월 31일에 집행된 교수형 상황에 대해선 “양명산은 처형 직전 조선인민만세의 발악 언사를 하였지만 간첩으로 판명된 양명산과의 사적인 관계 때문에 자신에게 씌워진 거짓 누명을 죽산은 시대적 상황으로 받아들인 것이다.[19]
조봉암 재평가는 시작 단계에 있다. 2007년 9월 27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진보당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인정하고 국가의 유가족에 대한 사과와 독립유공자 인정, 판결에 대한 재심 등을 권고하였다.[35] 2007년 10월 에는 죽산조봉암추모사업회가 발족되었다.[35]
가족 [편집]
조봉암을 연기한 배우들 [편집]
드라마 [편집]
연극, 영화 [편집]
기타 [편집]
참고자료 [편집]
- 조봉암 - 대한민국헌정회
- 한국방송, 〈진보,사형당하다-조봉암]〉, 《인물현대사》 (2004년 2월 13일 방영)
- 《대한민국 의정총람》, 국회의원총람발간위원회, 1994년
관련 서적 [편집]
- 신태양사,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나의 정치백서) (신태양사, 1957)
- 조봉암 연구(박태균, 창비(창작과비평사), 1995)
- 죽산 조봉암 전집(정태영, 오유석, 권대복 정리, 세명서관, 1999)
- 조봉암 누가 그를 죽였는가? (이영석, 도서출판 세상의 창, 2000)
-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2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1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2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 조봉암과 1950년대(상, 하) (서중석, 역사비평사, 1999)
- 조봉암과 진보당 (정태영,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2006)
- 역사비평(1995년 봄)(역사문제연구소 지음, 역사비평사, 2006)
- 홍우출판사, 정계야화 (전2권) (홍우출판사, 1966)
함께 보기 [편집]
바깥고리 [편집]
주석 [편집]
- ↑ 가 나 Untitled Document
- ↑ 생전에 강화군은 경기도 소속이었다.
- ↑ 가 나 다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49978#
- ↑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2006) 495
-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9j2296a
-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9j2296a
- ↑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2006) 496
- ↑ 가 나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 ↑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2006) 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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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2006) 495
- ↑ kbs인물현대사 제32회 방송분 '진보,사형당하다-조봉암'
- ↑ 가 나 다 라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 ↑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2006) 496
- ↑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2006) 496
- ↑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2006) 496
- ↑ 가 나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②) 이승만·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 신동아 2004년 1월호 (2면)
- ↑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②) 이승만·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3면)
-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167쪽
- ↑ 이영록 《우리 헌법의 탄생》 (서해문집, 2007) 99~100페이지
- ↑ 한국에 사회민주주의가 필요한 이유,한겨레 21 2007년 8월16일 제673호
- ↑ 조봉암과 1950년대(상)(역비한국학연구총서 15)(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 2006) 91
- ↑ 가 나 이현희, 《이야기 인물한국사(2005)》 (이현희, 청아출판사, 2007) 587
- ↑ 가 나 다 라 조봉암과 1950년대(상)(역비한국학연구총서 15)(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 2006) 92
- ↑ 운제선집 (상)(윤제술선생문집간행위원회, 성지사, 1988) 109~112
- ↑ 중앙일보 1982년 10월 20일자, 진보당 사건 (29)
- ↑ 가 나 다 라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②)이승만·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 신동아
- ↑ 가 나 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6&aid=0000023658
- ↑ 가 나 강화, 조봉암 재조명 운동 활기 한겨레
- ↑ 가 나 '여성 코뮤니스트' 김조이, 건국포장 받는다 오마이뉴스 2008.08.15일자
전 임 초대 |
제헌 국회의원(인천부 을) 1948년 5월 31일 - 1950년 5월 30일 무소속 (인천부 갑: 곽상훈) |
후 임 (인천시 갑)이용설 (인천시 을)곽상훈 (인천시 병)조봉암 |
전 임 초대 |
제1대 농림부장관 1948년 8월 15일 - 1949년 2월 22일 |
후 임 이종현 |
전 임 (인천부 갑)곽상훈 (인천부 을)조봉암 |
제2대 국회의원(인천시 병) 1950년 5월 31일 - 1954년 5월 30일 (인천시 갑: 이용설, 인천시 을: 곽상훈) 무소속 (인천시 을)곽상훈 (인천시 병)표양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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