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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면 착하고 잘 사는 사람들의 나라라고만 여기고 있던 아이들에게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가루우유가 선을 보인 시기와 엇비슷했다. 동네 어른들은 미군들이 자주 나타나는 곳에 처녀들이나 부녀자들이 혼자 다니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런데 그런 일보다 더 희한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우리 동네의 한 집을 가리키면서 "저 집 딸 양갈보로 갔단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집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손가락질을 하던 아이들도 그런 집 딸들이 화사하게 치장을 하고 '미제' 옷이며 신발이며 치약, 그리고 아이들이 그렇게도 먹고싶어 하던 '씨레이션'(미군의 야전 식품)을 한 보따리 싸들고 귀향하면 부러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이것이 지금도 미군부대 주변에서 팍팍하게 살고 있는 우리나라 여성들의 '슬픈 역사'의 시작이다. 그 이래 60년이 가까워지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한국 여자들이 가난을 벗어나려고 미군을 상대로 인신을 매매했으며, 더러는 사랑이 싹터서 결혼하고 미국으로 갔지만 문화와 생활관습의 충돌 때문에 버림을 받거나 이혼을 했을까? 나는 1990년대 초에 미국 북동부의 시애틀에서 가까운 타코마(유명한 보잉비행기회사와 큰 공군기지가 있는 곳)에 그런 여성들이 2만여 명이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 대다수는 미국시민이 되었지만 남편과 헤어져서 어렵게 산다는 것이었다. 미식축구팀 피츠버그 스틸러스가 '슈퍼볼'에서 두 번이나 우승하는 데 큰 공을 세운 하인즈 워드는 미군 출신과 이혼한 한국 여성이 눈물겨운 노력으로 일궈낸 보기 드문 성공사례일 뿐이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나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아이 앰 어 보이'로 시작해서 'ABC 노래'를 지나 더듬더듬 '미국말'을 배워나가던 때 영어 단어 하나라도 남보다 빨리 외우려고 얼마나 기를 썼던가? 요즈음은 유아부터 어른까지를 '소비자'로 삼는 거대한 영어 사교육시장이 불황에도 고래처럼 돈을 빨아들이고 있으니 격세지감이 든다.
미국을 고마워하고 동경하던 마음에 동요가 일기 시작한 것은 1960년의 4월혁명 때였다. 그때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어린 시절에 그렇게도 존경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아주 나쁜 독재자임을 중학교 2학년 무렵에 깨닫고서는 증오하고 있던 참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서울 혜화동 로터리와 담이 붙어 있는 곳이었다. 4월 19일 아침 9시반께, 물리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야, 어제 고려대 학생들이 깡패들한테 쇠뭉치로 얻어맞았는데 너희들 어떻게 생각하니?"라면서 은근히 분노를 자극하고 있던 참에 대학로 쪽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고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전교생이 순식간에 마당으로 달려나갔다. 누군가가 무명커튼을 찢어서 만든 천자락에 '민주주의 사수하자'라는 먹글씨를 써 들고 앞장을 서자 모두 교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서울대 문리대와 의과대 앞을 지나서 종로5가 네거리로 가니 건물 창마다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 격려의 손뼉을 치고 있었다. 길가의 사람들은 우리 고등학생들을 향해 미친듯이 손을 흔들어 댔다.
우리는 정신없이 서울시청 광장을 지나서 중앙청(지금의 경복궁)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경무대(현재 청와대) 앞 2백여 미터 지점까지 갔다. 앞에는 동국대 학생 수백명이 도로 한복판에 앉아 있었다. 경무대 입구에는 배관용 시멘트통을 쌓아놓고 경찰관들이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우리는 납작 엎드린 채 겁에 질려서 앞을 보고 있었다. 오후 1시쯤이던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총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뛰어' 하는 선생님의 고함에 따라 우리는 삼일당(진명여고 강당) 옆골목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그 고등학교 학생 열두어 명이 총을 맞아 평생 불구로 지내야 했다.
이것이 지금도 미군부대 주변에서 팍팍하게 살고 있는 우리나라 여성들의 '슬픈 역사'의 시작이다. 그 이래 60년이 가까워지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한국 여자들이 가난을 벗어나려고 미군을 상대로 인신을 매매했으며, 더러는 사랑이 싹터서 결혼하고 미국으로 갔지만 문화와 생활관습의 충돌 때문에 버림을 받거나 이혼을 했을까? 나는 1990년대 초에 미국 북동부의 시애틀에서 가까운 타코마(유명한 보잉비행기회사와 큰 공군기지가 있는 곳)에 그런 여성들이 2만여 명이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 대다수는 미국시민이 되었지만 남편과 헤어져서 어렵게 산다는 것이었다. 미식축구팀 피츠버그 스틸러스가 '슈퍼볼'에서 두 번이나 우승하는 데 큰 공을 세운 하인즈 워드는 미군 출신과 이혼한 한국 여성이 눈물겨운 노력으로 일궈낸 보기 드문 성공사례일 뿐이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미국은 나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아이 앰 어 보이'로 시작해서 'ABC 노래'를 지나 더듬더듬 '미국말'을 배워나가던 때 영어 단어 하나라도 남보다 빨리 외우려고 얼마나 기를 썼던가? 요즈음은 유아부터 어른까지를 '소비자'로 삼는 거대한 영어 사교육시장이 불황에도 고래처럼 돈을 빨아들이고 있으니 격세지감이 든다.
미국을 고마워하고 동경하던 마음에 동요가 일기 시작한 것은 1960년의 4월혁명 때였다. 그때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어린 시절에 그렇게도 존경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아주 나쁜 독재자임을 중학교 2학년 무렵에 깨닫고서는 증오하고 있던 참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서울 혜화동 로터리와 담이 붙어 있는 곳이었다. 4월 19일 아침 9시반께, 물리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야, 어제 고려대 학생들이 깡패들한테 쇠뭉치로 얻어맞았는데 너희들 어떻게 생각하니?"라면서 은근히 분노를 자극하고 있던 참에 대학로 쪽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고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전교생이 순식간에 마당으로 달려나갔다. 누군가가 무명커튼을 찢어서 만든 천자락에 '민주주의 사수하자'라는 먹글씨를 써 들고 앞장을 서자 모두 교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서울대 문리대와 의과대 앞을 지나서 종로5가 네거리로 가니 건물 창마다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 격려의 손뼉을 치고 있었다. 길가의 사람들은 우리 고등학생들을 향해 미친듯이 손을 흔들어 댔다.
우리는 정신없이 서울시청 광장을 지나서 중앙청(지금의 경복궁)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경무대(현재 청와대) 앞 2백여 미터 지점까지 갔다. 앞에는 동국대 학생 수백명이 도로 한복판에 앉아 있었다. 경무대 입구에는 배관용 시멘트통을 쌓아놓고 경찰관들이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우리는 납작 엎드린 채 겁에 질려서 앞을 보고 있었다. 오후 1시쯤이던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총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뛰어' 하는 선생님의 고함에 따라 우리는 삼일당(진명여고 강당) 옆골목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그 고등학교 학생 열두어 명이 총을 맞아 평생 불구로 지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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