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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사건, 보도연맹 사건 등 수많은 만행을 저지른 독립운동가 이승만 장로


 국무회의록 비망록 중에서 ※

● 1958년 1월 14일 - 진보당 간부 체포에 관하여
내무부장관 : 조봉암 이외 6명의 진보당 간부를 검거하여 조사중입니다.
대통령 : 조봉암은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며, 이런 사건은 조사가 완료할 때까
지 외부에 발표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1958년 3월 11일 - 진보당 사건 진행에 대한 관심
대통령 : 조봉암 사건은 어찌 되었나?
법무부장관 : 현재 공판중이나 그 후 특무대에서 발견한 확증이 있으므로 유죄에 틀
림없습니다.
대통령 : 이제 확증이 생겼으니 유죄라면 전에는 증거없는 것을 기소한 것 같이 들린
다. 외부에 말할 때는 주의하도록 하라.

● 1958년 7월 4일 - 1심 판결 직후
법무부장관 : 1심 판결에 검찰이 즉시 항소하였으나 고법, 대법원의 판결이 검찰에
유리하도록 될 것이 예상되는 차제에 판사들을 자극하는 것은 득책이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공보 : 진보당이 불법단체가 아니라면 평화통일도 합법적이라 해야 할 것이니 우리
는 무엇을 가지고 국민을 지도하여 행정을 하여 갈 수 있나…. 그간 내무, 법무가 말
한 것만 믿고 하여온 것이 이러니 걱정이라는 탄식.

● 1958년 10월 28일 - 2심 판결 직후
대통령 : 법관들만이 무제한한 자유가 허용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러한 판사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없는가?
법무부장관 : 임기만료자를 기시기시에 처리하는 도리밖에 없는 바, 진보당 사건 1
심 판결의 책임판사도 금번 임기 만료자 중에 들어있습니다.
대통령 : 조봉암 사건 1심 판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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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여순에서 일어난 학살사건

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14연대 소속 좌익세력 반란사건의 실상과 군 내부 좌익을
도태시키기 위한 숙군과정을 증언과 기록 통해 실증적으로 접근. 숙군과정에서 드러
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남로당과의 관계도 규명.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불과 두 달여 만에 일어난 여수 14연대 반란!
발발 50년이 지난 지금껏 ''여순반란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분단이 고착화되는
그 길목에서 터진 여수 14연대 반란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반란의 주체와 이유, 그리고 진압과정 등 그 모든 것이 베일에 쌓인 채, 단지 남한 정
부의 군대가 일으킨 반정부적 행위라 해서 함구로 일관되어왔던 ''여수 14연대 반
란''…. 그러나, 철저히 묻혀왔던 사건, 그리고 숱한 의문들 속에서 역사의 한 획을 그
은 사건이 바로 ''여수 14연대 반란'' 이다.

MBC 특별기획「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는 그 다섯 번째 시간으로, 생존하고 있
는 14연대 반란군과, 당시 진압 작전과 회의 전 과정에 참여했던 진압군 장군들의 증
언, 그리고 비밀문서를 통해 역사상 군부대 최초의 반란 사건이었던 ''여수 14연대 반
란''의 엄청난 전모를 생생히 공개한 ''여수 14연대 반란''을 10월 17일(일) 밤 11시 30
분에 50분 동안 방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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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제주도에 빨갱이를 빨리 소탕하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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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사단의 사라진 작전 명령서''

노근리 사건 이후로 사회의 주요 관심사안으로 부각되고 있는 집단적인 양민학살.
그러나 양민학살은 전쟁기간에만 그리고 인민군과 미군 측에 의해서만 자행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국군과 경찰 측에 의해서도 자행되었던 비극적 참상!

6.25 전쟁 후 반세기를 맞을 동안 우리에게는 집단 학살에 대한 속시원한 진실 찾기
와 반성이 없었다. 이제 당시 군인이나 경찰에 의한 양민학살의 기록을 찾고 공개할
때가 되었다. 6.25 전쟁 발발 50주년을 맞아 그 역사의 현장에 묻혀있던 진실을 찾아
지금까지도 치유되지 않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가져온 분단과 전쟁의 상처를 되짚
어 본다.

<프로그램 내용>

1.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의 의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찾아서

- 한국 전쟁 당시인 1951년 2월 20일경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에서 집단 학살당
한 신원 미상의 유해 발굴 현장을 밀착취재 했다. 이번 발굴은 지역 주민들의 증언으
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지 40년만의 일이다.

첫날 1기의 구덩이에서 150여구의 유해가 쏟아져 나와 그 동안의 소문이 사실임을
입증했으나, 이러한 구덩이는 이 외에도 6기가 더 있다는 주민들의 증언을 감안하면
최소 400여구 이상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50년 전 지리산
골짜기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누가, 무슨 연유로 또 누구에 의해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지 지리산 자락에 묻힌
지 반세기만에 그 실체를 드러낸 사건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전쟁의 상처를 보여
준다.

2. 연락병의 양심선언

- 1950년 말부터 1951년 초에 이르기까지 2달여에 걸쳐서 전남 함평군 일대에서도
집단적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공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월야, 나산, 해보면의 무고
한 양민 500여명이 학살당했으며, 심지어 군경 가족까지도 예외일 수 없었던 당시의
폭압적인 상황은 4.19 이후의 공간에서 잠깐 드러났을 뿐 40년 가까이 묻혀왔었다.

그러나 당시 한 병사의 도움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나온 사람이 있었고, 이 생존
자와 그의 생명의 은인인 병사와의 만남은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단서
를 제공한다. 국군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의 연락병 출신이 밝힌 사건의 진상
은...

3. 학살 전에 이미 학살 할당량이 정해져 있었다!

- 세상에는 소위 거창 사건이라고 알려진 산청, 함양, 거창 집단 양민 학살 사건이 발
발하기 며칠 전,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수행하던 11사단 9연대 연대본부는 근처 지
서주임들에게 긴급 소집령을 내렸다고 한다. 당시 휴천면 지서주임으로 연대본부의
모임에 참석했던 최시문씨는 차마 믿기 어려운 내용의 명령을 하달 받았다고 증언하
는데...

그의 증언은 학살 전에 이미 지역별 학살 할당량이 정해져 있었다는 등 집단 학살이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군의 작전 개념에 의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4.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

- 한국 전쟁 당시 후방의 공비토벌 작전을 수행했던 국군 제 11사단의 작전 개념 ''견
벽청야(堅壁淸野)''. ''꼭 지켜야할 전략거점은 벽을 쌓듯이 확보하는 주의로 나가고,
부득이 적에 내놓게 되는 지역은 인력과 물자를 이동하고 건물을 파괴하는 등 깨끗
이 청소해버려 적으로 하여금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내용의 이 작전 개념은 무수
한 학살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비판을 받는 등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번에 그 작전 명령을 육군 공식 문서상에서 최초로 확인했다.

5. 미국 문서가 말하는 사실

- KMAG (The United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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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좌제 마저 시행한 後조선왕 이승만

양민학살과 제주 4.3 사건 피해자들, 그들이 겪는 연좌제최근 제주 4.3도민연대에서
실시한 ''연좌제 피해관련 설문조사'' 결과 86%가 연좌제 피해를 겪고 있다고 응답했
다. 이들이 겪는 연좌제 피해는 주로 ''각종 신원조회(60%), 일상생활에서의 감시
(30%), 공무원 임용시험에서(26%), 사관학교 등 각종 입학시험에서(23%) (이상, 복
수응답)''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 결과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통해 최초로
공개된다.

제주도 모슬포에 자리잡은 백조일손지지(白祖一孫之地: ''백할아버지 조상의 뼈가 한
데 엉키어 하나의 자손이 된 곳'' 예비검속 때 죽은 유골들을 한 곳에 모아만든 묘)를
지키고 있는 이도영 박사의 증언을 통해 그가 겪은 연좌제 피해를 들어본다.
또한 양민학살 진상규명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요즘, 6.25 전후 억울하게 학살당한
피학살자 유가족들도 연좌제 피해를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끊이지 않는 연좌제의 망령, 그 실체를 공개한다.

연좌제는 당사자들에게 크나큰 정신적인 족쇄로 작용했다. 연좌제의 대상자는 주로 제주 4. 3 학살이
나 거창, 함평, 문경 등 양민학살 피살자의 유족, 월북자나 부역자 가족, 국가보안법
등 간첩혐의 연루자의 가족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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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 l - 잊혀진 대학살

        "1949년 6월, 대한민국 정부는
         ''좌익인사''들을 전향시켜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전쟁 초기, 30만 연맹원 대다수는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무참히 학살됐다.
         하지만 지난 50년, 그들의 죽음을
         아무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

  1. 전설과 역사 사이에서
  2001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첫 편 ''보도연맹Ⅰ - 잊혀진 대학살''
은 이 자막으로 시작했다. 기억조차 힘든 50년 전, 조금만 더 있으면
아예 전설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사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소재였다.
 
잊혀진 과거를 무엇 때문에 파헤치냐는 질문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답변은 간단하다. 이 엄청난 학살사건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가해자가 아무 반성 없이 부와 권력을 누려온
반면 피해자들은 연좌제로 억눌리고 레드 콤플렉스로 가위눌린 채 50년
을 살아왔다. 요즘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위선과 기회주의
가 판치는 것은 궁극적으로 보도연맹원 학살사건 같은 중대한 사건에 대
해 진상규명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하기를 주저해 왔기 때문이다.

  보도연맹은 1949년 오제도, 선우종원 등 이른바 반공검사들이 주도하
여 만든 단체로, 좌익인사들을 전향, 교화시켜 선량한 대한민국 국민
으로 포섭한다는 취지였다. 당시는 제주4·3과 여순사건을 무력으로 진
압한 이승만 정부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무자비한 숙군 총살을 다그
치는 등 좌익에 대한 뿌리뽑기 작업이 한창이었다. 미군 철수를 앞두고
38선에서는 이미 크고 작은 무력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위기감에 사로
잡힌 이승만 정부는 최대의 정적 김구를 살해하고 반민특위를 무력으로
해산하는 등 권력 기반을 다지기에 여념이 없었다.

  보도연맹은 이러한 시기에 창설됐다. 대한민국 절대지지, 북괴정권
절대반대, 공산주의 타도분쇄 등 강령에서 알 수 있듯, 보도연맹은 이른
바 ''좌익전력자''들을 묶어서 만든 반공의 행동부대였다. 그러나 ''좌익''은
이미 대부분 처형됐거나 월북한 뒤였고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대
부분 시골의 농민과 서울의 문화예술인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전쟁이 터
지자 이들이 인민군에 동조, 협력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모두 검속하
여 총살했다. 오제도, 선우종원의 증언에 따르면 6.25 직전의 가입자 수
가 33만 5천명. 증언과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이들 중 최소한 2/3에 해당
하는 20만명이 학살됐으리라는 추론이다.

  2. 살아서 말하라
  기획 단계에서 이미 여러 가지 어려움이 예상됐다. 학살이 전국에
걸쳐서 일어났으니 취재 범위도 전국으로 잡아야 했다. 게다가 ''보도연맹
원 = 빨갱이''라는 등식이 지금까지도 살아 있기 때문에 피해 유족들조차
입 열기를 꺼려하는 분위기가 예상됐다. 가해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모른다''로 일관하거나 인터뷰 자체를 기피할 게 뻔했다. 게다가
당시 군과 경찰의 명령 계통을 확인해 줄 수 있는 문서를 찾아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피해 유족들의 증언에서 시작했다. 그들의 진술은
어릴 적에 어른한테 들은 이야기라서 정확하지 않거나 감정적으로 과장
된 측면이 있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의견''이 아니라 ''사실''로 간주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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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테러 암살 단체의 실체 최초 발굴
50년만에 드러나는 실체, 비밀결사 백의사

1945. 12.28. 고하 송진우 한현우에 의해 피살
1947. 07.19. 몽양 여운형 한지근 일파에 의해 혜화동로터리에서 권총피습,사망
1949. 06.26. 백범 김 구 경교장에서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다

정치 격변기에 일어난 요인 암살 사건은 그 정확한 배후가 밝혀지지 않은 채 의문으
로만 남아 있었다. 최근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굴한 실리보고서는 김구 암살범 안두희
가 미 CIC 요원이며 백의사라는 비밀 암살 단체 단원이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화
제가 되었다. 그리고 해방기 정치 요인 암살 사건들 배후에 백의사가 관련되었을 것
이라는 추측과 논란이 연이어 나오기 시작했다.

실리보고서가 언론에 보도되기 전까지 백의사는 세간에 알려진 바가 없었고, 지금까
지 백의사에 대한 어떠한 역사적 연구도 이뤄지지 않았었다. 점조직이라는 단체 특
성상 그들의 활동 역시 어떠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백의사는 그렇게 조용히 역
사 속에서 잊혀질 뻔했다.

그러나 50년만에 7인의 백의사원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백의사 주요 암살 사건 현
장에 있었던 이성열, 최의호, 조재국과의 심층 인터뷰와 백의사 중책단원 측근의 증
언을 통해 백의사 실체에 다가서 보았다.

또한 백의사원 최의호가 10여년간 작업해 온 백의사 주요 단원 녹취록은 현준혁 암
살, 김일성 암살 미수 사건등에 관한 백의사원들간의 여과없는 생생한 증언이 담겨
져 있어 현대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2. 백의사원들의 생생한 증언,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암살의 진상 발굴


1946년 3월 1일 평양역 광장, 공산당 핵심간부와 수많은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3.1
절 기념행사에서 김일성을 향해 수류탄 폭탄 투척, 암살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생했
다. 사건은 왜 미수에 그치고 말았던 것일까. 당시 현장에 있었던 백의사원들의 증
언, 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고, 이 사건을 소재로 한 러-북 합작 영화 <영원한
전우>를 입수, 국내 최초로 공개한다.

지금까지 공산당 내부의 소행으로 알려졌던 공산당 당수 현준혁 암살사건(북한 공
식 기록1945. 9. 3)과 백의사원들이 털어놓는 사건의 진실! - 현준혁 암살 사건은 백
의사 반공테러의 시작이었다. 이밖에도 강양욱(김일성의 외척) 자택 폭파 사건, 김
책 테러 미수 사건에 숨은 이야기를 통해 해방기 극우 사상의 뿌리를 생각해본다.

국가사회주의 국가를 꿈꾼다
백의사 사령 염동진, 그는 누구인가?

염동진은 누구인가. 맹인장군 염동진이 어떻게 해서 극우테러단체의 사령관이 되었
던 것인가! 백의사 사령 염동진(염응택), 그가 남긴 것은 사진 한장 뿐.

끈질긴 취재 끝에 알아낸 염동진의 조카 김종진. 그는 암살단체 사령관 염동진의 평
소 사상과 인간 염동진에 대해 낱낱히 증언하였다. 또한 일본군사자료에서 최초 발
굴한 염동진의 흔적은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던 해방 전 그의 행로를 추적하
는 열쇠가 되었다.

낙양군관학교 졸업생 중 유일하게 행로를 파악할 수 없었던 염동진. 졸업 후 그의 행
적과 인간 염동진이 겪어야 했을 사상적 갈등을 통해 해방기 극우 테러 집단의 멘탈
리티를 반증해본다.

3. 방송사상 최초 인터뷰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의 생생한 증언


"송진우는 민족분열자, 후회 없다."
- 한현우 인터뷰 中

건드린 우리 사회의 뇌관 - 레드 콤플렉스
3,500명이 희생된 보도 연맹 학살 현장을 발굴하다!


분단과 전쟁, 남북 대립으로 이어지는 반세기 동안 한국 사회는 레
드 콤플렉스의 망령에 지배당해 왔다.‘빨갱이’라는 딱지는 정적을
거세하거나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
고, 이 과정에서 고문과 전향공작 등 각종 물리적 폭력과 제도가
동원됐다. 이러한 공포의 기억들은 살아남은 이들의 입을 막음으
로써 진실을 묻어버렸고, 사람들은 가족의 죽음과 자신의 상처에
대하여 말하지 못한 채 숨죽이며 살아왔다.
<이제는>에서는 한국판 킬링 필드라 불리우는 제주 4.3, 보도연
맹, 산청 양민학살 등 ‘빨갱이 사냥’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었던 수
십만 규모의 대학살에 대해 전격 조명, 발굴했다. 특히 2001년「보
도 연맹」제작 과정에서는 3,500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
던 경북 경산의 폐코발트 광산 발굴 공사를 이끌기도 했다. 지하
갱도 진흙 속에 묻혀 50년간 햇빛을 보지 못했던 유골들, 방송 이
후 4년이 지난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도 후속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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