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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그 해 여름 - 조문 파동과 공안정국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무더웠다는 1994년 7월, 북한 주
석 김일성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남북정상회담을
보름 앞두고 사망한 김주석에 대한 조문 표시 여부를 둘러싸고 정
치권은 물론이고 전국이 몸살을 앓았다. 같은 시기 터져 나온 서강
대 박홍 총장의 ‘주사파 발언’은 언론을 통해 연일 확대 재생산됨으
로써 공안정국 조성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냈다. 바로 10년 전,
이 곳에서 벌어졌던 조문 파동과 사상시비를 뒤돌아본다. 사상과
이념의 자유, 그리고 그것에 대한 포용 수준이 그 사회 발전에 얼
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 김일성 주석 사망과 무산된 정상회담
1994년 7월 9일, 여성단체 지도자들과 오찬을 하던 김영삼 대통령
은 메모를 한 장 받은 뒤 얼굴이 굳어졌다. 1분간의 침묵 끝에 옆방
으로 간 그는 모처에 전화를 했다. 맨 먼저 전화를 건 곳은 국방부
장관이었다. 그는 당시 이병태 국방부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전군
비상경계태세를 지시한다. 곧바로 국가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되
었다. 휴전선 이북지역을 50여년간 통치한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
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보름
앞둔 시점이었다.
당시 한반도는 전쟁 위기의 정점에 있었다. 취임사에서 민족우선
주의를 표방했던 김영삼 대통령, 보수층은 물론 여당 내부의 반발
도 무시하고 이인모 노인을 송환하는 등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펼
쳤지만 북핵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될 무
렵, 카터 전 미대통령의 방북으로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인
결실을 맺었다. 이후 TV 생중계까지 합의되면서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감은 한껏 고조되었지만, 김일성 주석의 사망은 모든 것을 원
점으로 되돌렸다.

* 조문 파동에 휩싸인 대한민국
G7 정상회담을 위해 이탈리아에 있었던 클린턴 미대통령은 기자
회견을 열고 김일성 사망에 대한 애도를 표시했다. 또한 제네바에
서 북미 고위급 회담을 진행 중이던 갈루치는 북한 대표부를 찾아
가 조문을 했다. 이러한 미국의 태도에 대해 김영삼 대통령은 제네
바 한국대사를 통해 강력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미국은 외교적 수
단으로 조문을 선택했고 그 해 10월 제네바 합의에 서명했다.
남한 사회에서 조문 문제는 엉뚱한 형태로 불거졌다. 국회 외무통
일위에서 이부영 민주당 의원이 조문단 파견 용의를 물었던 것을
언론에서 일제히 문제삼은 것이다. 정치권뿐 아니라 재야, 학생운
동권에서도 조문과 애도 표명을 둘러싸고 극렬한 분열에 휩싸였
다. 일부 대학에선 분향소까지 마련돼 공안당국과 보수층을 한층
자극했다. 이부영 민주당 의원, 최환 공안부장, 박범진 민자당 대
변인, 구필모 상이군경회 기획실장 등 조문파동의 중심부에 있었
던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 조문 파동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 박홍과 주사파 그리고 신공안정국
온 나라가 조문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등장한 서강대 박홍 총장
의 ‘주사파 발언’. 그 한마디는  메가톤급 위력을 발휘했다. 단지 말
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사파 색출작업으로 이어지면서, 남한
사회는 급격히 공안정국으로 내달았다. 그 해 7,8월 두 달 동안 국
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 수는 120명으로 이는 94년 상반기
6개월 동안 구속된 사람과 맞먹는 수치. 주사파의 화살은 학문의
영역도 비껴나가지 않았다. 경상대 교양교재인 ‘한국사회의 이해’
가 이적표현물 판정을 받았고, 북한에서 장학금을 받았다는 명목
으로 몇몇 교수들은 안기부 조사를 받아야 했다. 실제 박홍 총장
의 ‘주사파 발언’은 검찰 조사에서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지
만, 공안의 바람은 꺾일 줄 몰랐다.

* 공안정국이 남긴 것

- 상처는 10년을 넘어 계속된다

독일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당사자 A씨, 10년 전 그녀는 바이올리
니스트를 꿈꾸던 유학생이었다. 그러나 유학 중 만난 사람과 낙동
강 페놀 유출 사건을 이야기한 것이 국가기밀 누설로 적용 돼 3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청소년 단체 ‘샘’의 회원 40여명은 고
등학교 주사파로 지목돼 조사를 받았다. 주사파가 뭔 줄도 몰랐던
이들 대부분은 이후 자퇴를 하거나 전학을 해야 했다. 간첩 혐의
로 2년간 도피 생활을 해야 했던 이광철씨는 이제 17대 국회의원
이 되었지만, 그의 딸은 아직도 문단속에 철저하고 낯선 사람에 대
한 경계가 심하다. 이제는 누구도 이들이 입었던 상처에 관심을 갖
지 않지만, 그들은 여전히 10년 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잃어버린 5년
그 해 10월, 북한과 미국은 제네바 협정을 체결했고 남한은 미국
대신 경수로 건설 경비를 대기로 했다. 실질적인 회담은 북미간 이
루어졌고, 남한은 뒷돈만 댄 격이다. 2000년 성사된 남북정상회담
에서는 지체한 시간만큼 5억 달러 이상의 경비가 더 추가되었다.
남북 화해협력으로 가는 길목에서 뒷걸음질쳤기 때문에, 남북관계
에서 주도권과 입지를 스스로 축소시킨 채 5년이라는 시간을 허비
한 것이다. 또한 그동안 계속된 냉전의 분위기는 96년 잠수정 침
투 사건, 97년 총풍 기도 사건에까지 이어지면서 소모적인 남북대
결을 지속시키게 된다.

* 10년 후, 2004년 여름
올 4월 용천에서 일어난 대형참사에 보수 신문이나 한나라당마저
도 북한 돕기에 적극적이었다. 6월에는 남북 장성들이 회담을 가지
며 군사 문제를 조율했다. 10년 전에는 상상조차 어려운 일들이었
다. 또한 4.15 선거를 보면 선거철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색깔 시
비에도 크게 휘둘리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0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풍경들이 있다. 올해 들어 한
총련 관계자들이 닷새에 한 명씩 연행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인터
넷에 올라 있는 내용도 국가기밀이라는 판결로 통일연대처장 민경
우씨가 실형을 선고받았다. 국회 앞에서 외로운 1인 시위를 벌이
는 송두율 교수의 부인, 38년 만에 귀국한 그녀의 눈에 보이는 남
한사회는 70년대나 지금이나 별반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2004
년, 10년 전 그 날로부터 우리는 과연 얼마나 멀리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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