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과 이승만의 쇼        밝혀지는 한국근대사  2010. 3. 24.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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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장에서 승리가 아니면 협상 테이블에서라도 승리를 얻어라!

1951년 7월에 시작된 휴전회담, UN측은 포로들의 인권을 강조하
며 자유 송환을 주장, 공산군측은 제네바 협정에 따른 전원 송환
을 주장하며 휴전회담은 지루한 공방을 계속했다.
양측의 대표들이 협상 테이블에서 설전을 벌이는 동안 전장에서
는 수많은 군인들이 죽어 나간다. UN측이 포로 문제로 얻으려 했
던 것은 무엇이었나? 51년 중반에 미 육군 심리전국에서는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하다면 심리적으로 승리를 확보해야 하며, 포로문제
에서  자원에 의한 송환원칙이 필요하다는 안을 합동참모본부에
제출했다.

* 김일성은 조속한 휴전을! 그러나 모택동은 ''미국과의 체제경
쟁에서 이기겠다!''

1952년 4월 김일성은 휴전협상에서 전쟁포로 문제를 두고 논쟁하
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다. 김일성은 전장에서 죽어나가는 병사들
의 수가 포로들의 수보다 더 많다며 모택동에게 조속한 정전을 요
구하였다. 하지만 모택동은 이 문제는 한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
고 말한다. 포로들이 중국 대신 자유중국을 선택하는 것은 치욕으
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체제 경쟁이 되
어버린 한국전쟁, 포로는 그 체제경쟁의 제물이었다.

*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이승만의 생색내기 쇼!
휴전협정 타결을 앞둔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일방적으
로 반공포로들을 탈출시킴으로써 막바지 휴전회담에 심각한 타격
을 주게 된다.
모택동은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보복으로 석방된 포로들
의 숫자만큼 한국군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중국군의 5차
공세가 실행된다. 이 공격으로 금성 전투에서 국군은 1만 5천 명
의 전사상자를 내며 치욕적인 패배를 안게 된다.
하지만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외교적 강수를 통해 미국
을 압박함으로써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냈고, 한미상호방위조
약 덕분에 더 이상의 전쟁은 없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1953년 6월 6일자 친서를 통해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휴전회담
에 협조만 한다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을 것이라고 통보했다.

* 무명의 전사들의 전쟁 그 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이 되고, 양측은 서로가 승리자라
며 선전한다. 전쟁이 끝난 후 휴전회담의 제물이었던 양측의 포로
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승만의 정치적 쇼의 희생물이 된 탈출한 반공포로들은 대부분
전쟁이 휴전회담이 끝나기도 전에 국군에 편입되고, 휴전협정 조
인 후 돌아온 국군포로들은 전장에서 포로가 되어 살아남은 죄로
또다시 남해 용초도로 보내진다. 용초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
가? 당시 교환되어 온 국군 포로들의 증언을 통해 용초도에서의 끔
찍했던 사상검증 과정을 이야기한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남과 북에는 억류된 채 잊
혀진 포로들이 남아 있다. 국군포로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
으며 최근까지도 국군포로 출신의 탈북자들에 의해 미송환 억류
포로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다. 여전히 남아 있는 미송환 포로 문
제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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