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과 종교        밝혀지는 한국근대사  2010. 4. 2. 11:41

반응형

요 미친 장로가 1000원짜리(그때 고액화폐)에 지면상을 처넣었네

이승만, 성탄절 공휴일 지정, 군목제도 도입

이승만 정권은 기독교 국가를 방불케 할만큼 친(親)기독교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이승만은 신학을 공부하고 하와이 한인교회에서 시무했던 경력으로, 미군정에서는 목사로 통했던 인물. 이런 경력으로 인해 국가의 모든 정책까지 철저히 기독교적으로 운영했다.

이승만은 49년 11월 미 감리교선교본부 브럼보 총무에게 “우리는 한국의 민주적 발전에 모든 희망을 기독교운동에 걸고 있다”며 “기독교운동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집권과 동시에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지정하고(불교계의 석가탄신일은 이보다 수 십 년이 뒤진 70년대야 국가 공휴일로 지정됐다), 기독교계의 의견을 받아들여 국기배례를 주목례로 바꾸었다. 또 교도소 목사인 형목제도와 군대 목사인 군목제도를 창설하고 정식공무원 자격까지 부여하는 등 독점적 혜택을 부여했다. 결국 형목제도의 경우 천주교 장면 정권에 의해 폐지되고, 군목제도의 경우 박정희 정권에 의해 타종교에도 문호가 개방되기에 이른다.

48년 5월 9일 제헌의회 선거일이 주일이라는 이유로 하루를 늦춘 것이나, 제헌국회를 순서에도 없는 기도로 시작한 점, 대통령 취임식을 기독교적으로 한 점, 해마다 성탄절 메시지를 발표하고 성탄선물과 성탄카드를 많이 만들자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한 점 등은 이승만의 기독교 우대정책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불교를 정화한다는 명목으로 사찰 재산을 압수하는 대처승 사건을 일으킴

기독교인들 역시 이승만 지지 운동으로 그의 정책에 화답한다. 48년 5·10 선거 당시 기독교선거대책위를 출범시키고 3선 개헌을 지지한 것이 대표적인 예. 이는 곧 일반인들의 반발에 직면하며 기독교 회관 앞에서 3·15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시위가 이뤄졌고, 기독교에 대한 항의표시로 4·19 위령제를 불교식으로 진행하게 된다. 급기야 NCC와 감리교 총리원의 사과성명으로 사태가 무마됐다.

-공포정치를 행하고 경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는 도망



박정희

박정희 정권은 불교계의 후원을 등에 업었다. 그간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불교세력이 박정희의 쿠데타 주도세력에 상당수 포함되며 그 기반을 넓혀나간다. 이때부터는 한국교회와 정권과의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조치로는 기독교계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던 종교교육의 규제, 이승만에 의해 폐지된 국기배례의 부활, 단군숭배 강화, 가짜 박사사건으로 촉발된 무인가 신학교 정비 등이 있다. 또 국가의식인 현충일이 불교식으로 치러지는가 하면, 69년부터는 군승제도가 시행되고, 72년 석가탄신일이 제정된다. 72년에는 1만원 권 지폐에 석굴암을 삽입하자는 주장이 논란을 빚기도 한다.

이런 조치들은 타종교에 대한 형평성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지만, 불교계 이외에 타종교까지 확대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불교계 우호정책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불교계 역시 박정희 정권시절 호황기를 누린다. 60년대 후반부터 불교인구의 엄청난 증가를 맛보았고 70년에는 세계불교지도자대회가 열리면서 한국불교의 건재함을 대내외에 알린다. 불교계 정치지도자 숫자도 장면 정권 당시 7.9%이던 것이 박정희의 공화당 정권에서는 19.1%로 상승한다.



최규하

믿는 종교 없었음.


노태우

종교성향으로 볼 때 박정희의 불교 성향을 이었기 때문에 돌출적인 종교정책을 쓰지 않아도 됐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특정종교에 대한 일방적 특혜를 어렵게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부터 큰 국가 정책적인 변화를 찾아보기 힘들고 일회적이고 단발성 사건들이 주류를 이룬다. 무분별한 학위를 남발하는 신학교 일제정비와 성지난립사건으로 유명한 제일교회 경찰력 난입사건을 들 수 있다. 또 노태우 정권 당시에는 청와대에 불상을 만들었다며 시작된 청와대 불상 논란과 10원 짜리 주화에 불상을 넣으면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노태우 정권의 청와대 불상 설치 논란은 청와대 주인이 기독교 장로인 김영삼 정권으로 바뀌면서 훼불사건으로 바뀌어 개신교·불교계의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천주교인 전두환은 개신교에게 막대한 지원

우리에게 잘 알려진 80년 전두환 장군을 위한 국가와 민족을 위한 조찬기도회 등 국가행사에 참여하는가 하면 김선도 목사의 경우 71년 육사졸업식장에서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외롭지 않게 살펴주십시오. 솔로몬의 지혜와 다윗의 용기를 대통령께 부어주십시오”라는 내용의 축도를 하기도 했다.

기독교 교왕 요한 바오로 2세를 초청. (전두환 정부 시대에 유럽과 미국에서 그리스도교 급감하는데도 불구 한국만 급증한 것은 전두환때문.) 참고자료: http://blog.daum.net/chunchiingroup/17451776
전두환이 집권한 80년대에 그리스도교세는 전두환 정부의 지원을 받아 급수적으로 커지게 된다.


김영삼, '장로 대통령 만들자' 큰 힘 발휘

불교 우대정책은 김영삼 장로가 대통령 후보로 나서면서 교계의 대통령 만들기에 나서게 만든 한 원인이 됐다.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장로 대통령’이라는 한마디는 매우 커다란 힘을 발휘했다. 어쨌든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국교회 성장의 발판과 함께 불교계의 역차별 논란이 재연된다.

한국교회 인사들의 정치권 접촉이 눈에 띄게 많아졌으며 일부 목회자들이 총선에 출마하는 등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기독교 정치세력화를 위해 기독교정당 창당을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까지 있었으나 불발되고 만다.

이에 반해 청와대 훼불사건이나 취임 초기 국방부내 중앙교회 예배를 이유로 예불과 미사참례자들을 차단해 종교차별 논란이 일었고, 이와 때를 같이해 일부 기독교인들의 단군상 훼손, 훼불사건 등이 발생하면서 불교계 반발을 불러온다. 현재 불교계에는 종교편향대책위라는 상설기구가 조직돼 있는 상태다.


더 나아가 현 정권(개놈현)에서는 제2건국위원장에 김상근 목사, 문광부장관에 김성재 목사, 민주당 국회의원에 이재정 신부(전 성공회대 총장) 등 현직 성직자가 등장하면서 이전 기독교 정권과 차별성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물론 이에 대해 불교계는 여전히 반발하고 있다.

반응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