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니키아 (Phoenicia, Poeni)        기원전1200~기원전800  2009. 4. 1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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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니키아인이 정치적으로 독립해 있던 시기는 드물며, 거대한 영토를 얻은 바는 없으나 당시 미개하고 영토도 없던 유태인들과는 달리 확실히 그 문화와 경제력, 또한 본토 밖에 세운 수많은 식민지들이 페니키아의 위대함을 말해준다. 수많은 유물과 지금 현대의 세계까지도 파장을 미치고 있는 페니키아 문명이다.

페니키아의 전성기는 히타이트 지배하에 조공국으로 있던 기원전 14세기부터 시작되는데 이때 티레, 시돈, 비블로스 등이 주요 도시들로 떠올랐다. 페니키아는 비민주적으로 왕이 다스리던 나라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와 마찬가지로(오히려 고대 그리스가 페니키아를 본받았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공화정이 주요 정치 체제였으며 하나로 통합된 영토를 지니지 않고 각기 도시국가들(이 또한 고대 그리스에 영향을 주었다.) 독립된 자치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도시국가 티레, 시돈, 비블로스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기원전 12세기 히타이트가 바닷민족에게 멸망하자 곧 이어 지중해에서 들어온 필리스티아인(바닷민족)과 처절한 사투 끝에 영토와 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다.

기원전 700년 쯤에 북아프리카 해안에 식민시 카르타고를 건설했다. 동 지중해안 본토가 아시리아에게 멸망하자. 유민들이 카르타고로 대거 이주하여 훗날 카르타고 공화국의 기틀을 만든다.(한니발도 카르타고 공화국 사람이다.) 아시리아 시기부터 조공국이 아니라 독립권한을 모두 잃게 되었다. 아시리아가 신바빌로니아 제국에게 멸망하자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지배하에 들었으며 이 시기 세계최초로 아프리카 일주항해(동쪽 해안을 출발해 서쪽 해안을 돌아 북쪽에 도착)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포루투갈의 바르톨로뮤 디아즈가 중세시대에 한 것보다 2000년이나 먼저 행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건설되었다가 중세를 지나며 폐허가 된 도시.


현대지도에 고대 그리스와 페니키아 영토 비교(기원전 700년경) 노란색이 초기 로마, 붉은 색이 고대 그리스 식민시, 보라색이 페니키아와 식민시.




페니키아 문명(또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지금의 미개한 이슬람 문명과는 확실히 다르다. 지금 중동문화는 유대교, 이슬람교에서 나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카르타고 시의 복원 상상도
카르타고市의 모습. 페니키아 문명(혹은 카르타고 공화국)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마지막 남은 나라로서 기원전 2세기경의 카르타고의 멸망은 곧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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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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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리를 새겨넣은 페니키아 동전

페니키아(그리스어 Φοινίκη: Phoiníkē, 라틴어 Phœnicia)는 고대 가나안의 북쪽에 근거지를 둔 고대 문명이다. 중심 지역은 오늘날의 레바논시리아, 이스라엘 북부로 이어지는 해안에 있었다.[1] 페니키아 문명은 기원전 1200년경에서 900년경까지 지중해를 가로질러 퍼져나간 진취적인 해상 무역 문화를 가졌다. 그러한 고대의 경계가 변동하긴 했지만, 도시의 문화 중심은 최남단으로 도시 티레로 여겨진다. 페니키아 본토의 도시 가운데 시돈과 티레 사이에 있는 사렙타는 가장 완벽하게 발굴된 도시이다. 페니키아는 최초로 갤리선을 사용한 문명으로 이들은 갤리선을 이용한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페니키아 문명이 단일한 민족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와 같이 도시 국가를 이루었으며, 각각의 도시 국가들은 정치적으로 독립되 있었다. 페니키아의 도시 국가들은 서로 동맹을 맺고 협력하기도 하였으나 도시간에 갈등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레반트 지역의 티레시돈은 페니키아의 가장 강력한 도시였다.

페니키아는 최초로 알파벳을 사용한 문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들이 사용한 카나니테-페니키안 알파벳으로 부터 후대의 여러 알파벳이 나왔다. 페니키아인들은 아프리카아시아어족셈어파에 속하는 페니키아어를 사용하였다. 페니키아는 해양 무역을 통해 자신들의 알파벳을 북아프리카와 유럽에 전파하였고 이로 부터 그리스어의 알파벳이 만들어졌다. 이는 후일 다시 에트루리아 문자로마자의 형성에 기여하였다.[2]

목차

[숨기기]

[편집] 어원

페니키아라는 말은 라틴어 푸니쿠스(punicus)에서 온 것이다. 이는 고대 이집트의 Fnkhw에서 유래한 미케네 선형문자 B의 포니기요(ponikijo)를 호머그리스어 포이닉스(phoînix)로 옮긴 것이 고대 로마에 전해진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Fnkhw는 "시리아인"을 뜻한다.[3] 한편, 그리스어 포이닉스(phoînix)는 심홍색 또는 티리언 퍼플, 뿔고동을 뜻하는 단어[4]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뿔고동의 껍질을 원료로한 심홍색 옷을 페니키아인이 즐겨입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5]

[편집] 역사

페니키아인들이 동지중해 지역에서부터 여러 지역으로 이주하였다고 하나 명확한 기록은 없다. 헤로도토스는 페니키아인이 지금의 페르시아만지역에서 지중해 지역인 레반트로 이주하였을 것이라 추정하였다.[6] 언어신화 면에서 볼 때 페니키아인은 가나안의 다른 문화와는 유사하다. 페니키아인들은 스스로를 가나안인이라 불렀다. 기원전 14세기경에 제작된 아마르나 문서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가나안인이란 뜻의 케나아니(Kenaani) 또는 키나아니(Kinaani)로 부르고 있다. 이 문서는 고대 이집트에서 이른바 해양인이라 부르던 민족들이 침략한 것보다 1세기 이전에 제작된 것이다. 기원전 6세기 밀레토스의 헤카타이오스는 페니키아를 키나(χνα)로 표기하였는데, 비블로스의 필로는 그의 신화학에서 "키나란 페니키아를 가리키는 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미 기원전 3천년 경 부터 비블로스에서 레바논 삼나무를 배로 실어나르고 있었다.

고고학에서는 페니키아를 지금의 레바논 해안을 중심으로 발전한 고대 문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들은 주변의 고대 이집트, 미노아, 필리스티네, 고대 이스라엘과 같은 제 민족들과 관계를 형성하며 발전하였다.

기원전 2300년 경에서 기원전 2100년 사이에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민족이동으로 인해 비블로스는 주변의 침략을 받았다. 그 결과 페니키아어와 아람어가 섞이게 되었다. 이후 수메르아카드의 군대가 지중해 연안을 점령하면서 이 지역은 헤브루의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하였고, 기원전 1500년 고대 이집트토트메스 3세가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역사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기원전 1411년 에서 기원전 1358년 경에 작성된 아마르나 서신에서는 아모리히타이트가 페니키아의 여러 도시들을 굴복시켰으며, 당시 비블로스의 왕이었던 리브-하다와 티르의 왕 아비-밀쿠는 이집트의 봉신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기원전 1350년 경에서 기원전 1300년 사이에 이집트는 페니키아를 탈환한다. 다음 세기에 이르러 우가리트가 발흥하였으나 기원전 1200년 경 멸망하였다. 사학자 게르하르드 헬름은 기원전 1200년 경에 갑자기 출현한 이른바 해양인은 여러 가지 고고학적인 증거로 보아 페니키아의 발달된 항해술과 그 역시 우수한 항해술을 지닌 미케네 문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단언한다.

학자들은 여전히 페니키아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으며, 당시 유적에 대한 발굴과 함께 언어학적인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페니키아의 기원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유전자 지도 계획을 이끌고 있는 스펜서 웰스은 과거 페니키아의 터전이었던 레바논몰타에 거주하고 있는 남성의 유전자에 대한 연구를 통해 페니키아의 기원을 밝히려고 하였으며 그는 이 연구를 통해 그들이 Y 염색체 상에 m89 염기 갖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7] 그리고 연구 결과 그들은 미케네인과 해양인은 페니키아인과 유전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8]

[편집] 경제와 문화의 제국

페니키아의 강역
페니키아 알파벳

페르낭 브로델은 그의 저서 《세계의 투시도》에서 페니키아는 주변의 세계와 교류하여 "세계 경제"를 건설한 고대 제국 중 하나라고 지적하였다. 페니키아의 문화와 해양지배력은 기원전 1200년 경에서 기원전 800년 경에 절정을 이루었다.

페니키아의 주요 거점은 비블로스, 티레, 시돈, 시미라, 아라두스, 베리투스와 같은 도시국가였다. 아마르나 서신에는 이 도시들이 모두 거론된다. 페니키아의 특징을 나타내는 유물은 기원전 3천년 경의 것 까지 거슬로 올라간다. 지중해 연안에 자리잡고 있던 페니키아 도시국가들은 해양을 통해 레반트지역과 교류하였으며 많은 자원들을 실어 날랐다. 기원전 1200년 경 철기시대에 접어들자 산토리니 쯤으로 추정되는 북쪽에서 흉년을 만난 해양인들이 남하하였다. 이들은 이집트, 히타이트와 같은 잘 알려진 고대 국가들을 약화시켰으며 이러한 지배력 공백으로 인해 페니키아의 많은 도시 국가들은 독립적인 권력을 수립하게 되었고 이후 해양지배력을 바탕으로 독립을 유지하였다.

페니키아의 권력은 왕, 사원의 성직자, 그리고 원로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블로스는 도시 국가들 중에 가장 강성하였으며 페니키아의 주요 거점이었다. 페니키아 알파벳 역시 비블로스에서 유래하였다. 기원전 1000년경 티르와 시돈이 발흥하였으며 이들은 머지 않아 페니키아의 헤게모니를 분점하였다. 티르의 왕 히람 1세(Hiram I, 기원전 969년 - 기원전 936년)은 당대의 가장 강성한 왕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페니키아인은 가나안인이란 이름과 함께 티르인, 시돈인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편집] 종교

페니키아인들은 당시 가나안 지역의 신들을 믿었다. 기원전 2000년 경 대부분 주신은 바알로 간주되었으며, 페니키아신들은 후일 그리스 신화에 혼합되었다.

[편집] 알파벳

페니키아인들은 최초로 알파벳을 사용하였다. 페니키아의 알파벳은 지중해 여러 지역에 전파되었으며 후일 고대 그리스고대 로마의 알파벳에 영향을 주었다.

기원전 1000년 경, 페니키아인들은 레바논, 키프로스, 시리아, 이스라엘 및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에 많은 묘비를 남겼다. 페니키아어는 후일 카르타고 언어의 모태가 되었으며 카르타고 페니키아어는 기원후5세기 까지 사용되었다.

기원전 1200년 경 비블로스에서 제작된 아히람의 석관에 쓰여진 페니키아 문자
아히람의 아들이자 비블로스의 왕인 이토바알의 관, 그가 "영원의 집"에 거하도록 그의 아버지 아히람을 위해 만들다. 언젠가 왕들의 왕이요 통치자들의 통치자이며 군대의 사령관인 그가 관을 열고 비블로스에 돌아온다면, 그는 지배의 홀을 뺏기고 그의 왕좌는 전복되며 비블로스는 평화를 잃으리라! 그가 이 비문을 깬다면, 그것은...! [9]

[편집] 페니키아의 영향

페니키아는 초기 철기 시대의 지중해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알파벳, 선박기술, 상업술, 과학기술, 항해술 등이 그리스에 전해졌다.

[편집]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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