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현엽(玄燁/玄曄). 시호 인황제(仁皇帝). 묘호 성조(聖祖). 연호 강희. 순치제(順治帝)의 셋째 아들로, 아들 35명, 딸 20명을 두었다. 순치제의 유명(遺命)으로 8세 때 즉위하고, 14세 때 친정을 시작하였는데,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 재위기간이 61년으로 가장 길다. 청나라의 지배는 그의 재위기간에 완성되었으며, 다음의 옹정제(雍正帝)·건륭제(乾隆帝)로 계승되어 전성기를 이루었다. 즉위 초에는 아버지의 유조(遺詔)로 4명의 만주 기인(旗人)이 보정대신(輔政大臣)이 되어 집정(執政)의 임무를 맡았으나, 1669년부터 실질적인 친정이 되었다.
당시 명(明)나라의 마지막 세력이었던 계왕(桂王)은 이미 멸망하고, 반청세력이었던 정성공(鄭成功)도 사망하여 중국의 지배가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평정(平定)을 맡았던 윈난[雲南]의 평서왕(平西王) 오삼계(吳三桂), 광둥[廣東]의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푸젠[福建]의 정남왕(靖南王) 경계무(耿繼茂)와 그 아들 정충(情忠)의 삼번왕(三藩王)은 강력한 군사력과 함께 독립정권을 유지하며 청나라를 위협하였다.
1673년 평남왕의 철번(撤藩)을 계기로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단호한 태도로 이에 대처하여 1681년 평정에 성공하였으며, 대만의 정씨(鄭氏)도 내분으로 1683년에 멸망함으로써 마침내 청나라의 군사적 지배가 완성되었다. 삼번의 난을 평정한 후에는 이에 소비되던 방대한 비용이 필요없게 되어 국가재정은 여유가 생겨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50년간의 면세 총액이 1억 냥(兩)을 넘었으며, 1712년에는 인두세(人頭稅)를 정액화하고, 조운(漕運)을 정비하며, 황허강[黃河江]의 치수(治水)에 힘쓰는 등 내정상으로도 안정된 시대를 이루었다.
외정에 있어서는 러시아의 남하를 방위하기 위하여 아이훈성[愛琿城]을 구축하고 1689년 유리한 조건으로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었다. 1690년에는 외몽골[外蒙古] 중가르부[準爾部]의 갈단[爾丹]을 토벌하고, 1691년에는 칼카부를 평정하였으며, 1696년에는 차오모드[昭莫多]에서 갈단군[爾丹軍]을 괴멸시키고, 1697년에 갈단을 자살하게 만듦으로써 외몽골을 판도 안에 집어넣었다. 그 후 갈단을 계승한 체왕아라푸탄[策妄阿拉布坦]이 티베트에 들어가 세력을 떨치게 되자 1718년부터 티베트에 원정하여 그 지배권을 빼앗고, 중국의 영토를 크게 확대하였다.
국내외 정치에서의 성공은 문화에도 반영되어 중국 최대의 유서(類書)인 《고금도서집성》의 편찬과 《강희자전》의 출판을 비롯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또한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들로부터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도입하게 하였으며, 중국에서 처음으로 위도(緯度)를 적은 정밀한 지도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를 작성시키는 등 문화발전에도 기여하였다. 만년에 후계자 문제로 고통을 겪고, 황태자를 폐위시키기도 하였으나, 끝내 해결하지 못하고 1722년 12월 20일 병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