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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Uyghur Khaganate.png
820년경 위구르의 영역, 보하이(원어)=발해(중국어), 키탄(원어)=거란(중국어), 주르첸(원어)=여진(중국어)

개관

위구르족은 동돌궐의 지배를 받으며 셀렝가 강 유역에서 거주해 오다, 744년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위구르 제국을 건설하였다. 위구르 제국의 건설자는 쿠틀루그 빌게 카간(Kutlug Bilge Kagan, 骨力裵羅)으로 알려져 있다.

실질적으로 중앙아시아의 중심 지역에서 동서의 교역을 통제하는 제국이었으며, 840년 키르기즈족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거의 1세기 동안 중앙아시아 중남부의 스텝지대를 지배하였다.

제국의 수도는 카라발가순이었으며, 사회구조는 유목사회와 영농 정착사회의 특징을 혼합한 형태였다.

 대외관계

유목민족의 배경을 가진 국가로서는 이례적으로, 중국과는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위구르제국과 중국은 대체로 평등한 관계에 있었으며, 757년, 조가 안록산의 난으로 인하여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 위구르군이 수도 장안까지 진군하여 당조를 구원하는 등 도리어 중국 조정이 어려울 때 우세한 군사력을 가진 위구르제국이 도와주는 입장이었다.

반면 티베트와는 전쟁을 벌이는 등 대립하였다. 위구르는 감수 협곡을 침입하여 중국과의 교역을 단절시키려는 티베트제국에 대해 군사행동을 취해 822년 이후에는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후 원주민과 소수 인도유럽계 부족들을 압도하고 돌궐계 부족들이 비단길의 요충지에 침투 정착함으로써 돌궐계 언어와 문화가 그 지역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9세기 이후부터 신강지역에 투르크인들 거주 시작)

한편 스텝의 서부 사마르칸드와 부하라 지역에는 4세기 때부터 페르시아계의 소그드인들이 살면서 비단길의 중계무역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과 통하는 비단길을 장악하고 있는 위구르와 교역상의 이유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점차로 위구르에 흡수되어 투르크족화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그드인들은 위구르인들에게 마니교를 전해주었다.

 문화

762년 위구르 카간 뵈귀는 마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유목민족 최초로 집단적으로 정착민의 종교를 갖게 되면서 위구르인들의 정착화는 가속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위구르인들은 선대의 고지(故地)인 산악지대로부터 정착을 위해 스텝의 평야지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으로서는 최초로 성곽도시를 건설하였다.(투르판의 고창성) 위구르인들의 관개 농법을 이용한 영농기술이나 뛰어난 프레스코 벽화의 기법 또한 소그드인들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마니교는 위구르족의 도시화와 정착화를 이루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자도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위구르인들은 스텝 민족 사상 최초로 문학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 마니문자(소그드 문자)는 후에 몽골 제국의 초기 기록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멸망

한편 840년 전염병이 휩쓸어서 위구르에게 큰타격을 입었다. 터키계인 키르기스 족이 쳐들어오자 결국 멸망하였다.

후에 이슬람 국가로 다시 부활하기도 하지만 12세기에 서요 제국(중앙아시아에 세워진 요제국)에게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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