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 푸아티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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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푸아티에 전투 (카롤링거-우마이야 왕조 전쟁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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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 |
옴미아드 왕조 | ||
지휘관 | |||
카를 마르텔 | 아브드 알 라만† | ||
병력 | |||
3만명 추정 |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으나, 8만명으로 추정[1] | ||
피해 상황 | |||
알 수 없음 | 1만여명 |
투르-푸아티에 전투는 732년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를 마르텔이 프랑스 투르와 푸아티에에서 옴미아드 왕조의 이슬람군을 무찌른 전투로 이 전투의 승리로 이슬람 세력의 서유럽 확장은 한풀 꺾였다.
목차 |
배경
당시 옴미아드 왕조의 이슬람 세력은 북아프리카를 넘어 서남부 유럽 쪽으로 확장되고 있었는데 이슬람 세력은 스페인 지방을 정복하고 서유럽을 노렸다. 서유럽을 지배하고 있는 프랑크 왕국에서는 재상 카를 마르텔이 권력을 장악하고 기병을 활발히 훈련시켰다. 732년 스페인 코르도바 총독 아브드 알 라만은 프랑스 아키텐을 침공하여 아키텐 공작 외드를 무찔렀고 외드는 카를 마르텔에게 도움을 청했다.
전투 과정
카를 마르텔은 투르 시를 방어하기 위해 그 동안 훈련시킨 기병대를 주둔시켰다. 카를 마르텔의 기병대는 푸아티에 근처에서 옴미아드군을 격파했고 사령관인 코르도바 총독 아브드 알 라만은 전사했다. 이후에 프랑크 왕국과 서유럽에 대한 이슬람교도의 침공은 없었고 때때로 카를 마르텔의 승리는 세계사의 결정적 사건으로 간주되고 있다.
결과 및 영향
이후에 이슬람교도의 진출은 사실상 내분과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베르베르인의 반란으로 중단되었다. 카를 마르텔은 그 전투를 통해 영예뿐만 아니라 실리도 얻었다. 그는 외드로부터 충성을 서약받은 아키텐 지역에 대한 권한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에 카를 마르텔의 아들 피핀 등이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리고 카롤링거 왕조를 세우고 계기가 된다.
주석
- ↑ Watson, 1993 Charles Cutler Torrey,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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