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슈타트 출생. 염료 ·도료 제조판매업자인 아버지의 실험실에서 화학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본 ·에를랑겐 등의 대학에서 화학을 배웠다. 1822년 파리에 유학, J.L.게이뤼삭과 P.L.뒬롱 등에게서 배우고, 여기서 처음으로 사실에 입각한 화학에 접하여 실험과 학설의 융합에 눈을 뜨게 되었다. A.F.훔볼트의 소개로 게이뤼삭의 실험실에 들어가 지도를 받으며, 풀민산염의 분석 등을 실시하였다. 1824년 독일로 돌아와 기센대학의 조교수 ·교수를 역임하고 1852년부터 뮌헨대학의 화학 교수를 지냈다.
파리의 게이뤼삭 실험실에서 리비히가 연구하고 있을 당시, 풀민산의 조성을 결정했는데 이것은 우연히도 F.뵐러가 발표한 시안산의 조성과 일치하였으므로 처음에는 논쟁이 있었으나, 이것이 동일 조성으로 성질을 달리하는 이성질체임을 확인하여 이성질체현상 이론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되고 벤조산 ·고편도유(苦編桃油) ·요산족(尿酸族) ·시안산 관련체 등에 관한 공동연구를 하여 유기화합물의 조성 ·원자단 ·분류 ·계통 또는 분해 ·합성 등 기본 분야를 발전시켰다. 리비히 단독의 업적도 유기화합물의 원소분석법을 비롯하여 귀중한 것이 많다. 또한 유기화학의 성과를 농업에 응용하여 토양이나 농산물에 대한 화학적 조사를 실시, 재배식물에 의한 토양 중의 무기성분의 탈취를 보충하기 위한 비료의 이론을 확립하였다.
만년에는 동물의 영양 및 생리의 연구에도 힘써 많은 영양물을 분석하고 유효성분을 결정, 영양가치를 측정하였다. 그리고 대사(代謝), 에너지의 원천 등에 관해서도 뛰어난 논문을 발표하였다. 화학의 연구 및 교육방식에 관한 측면에서의 업적은 근대적인 실험실의 창설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기센대학 교수로 취임하자, 즉시 화학교실에 학생용 실험실을 설치하고 학생 모두가 실험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여서 각지로부터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제자들 중에서 우수한 화학자가 많이 배출되었고, 기센식(式) 연구와 기센식 교육을 각지로 확산시켰다. 예를 들면, 베를린의 호프만, 본의 F.A.케쿨레, 슈투트가르트의 H.펠링 등이 있으며, 그 밖에 프랑스의 C.A.뷔르츠, 영국의 플레이페어, 러시아의 N.N.지닌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저서로는 《화학 통신》(1844) 외에 《화학대사전》 《계몽서(啓蒙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