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료의 발명        1800  2009. 4. 26.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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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 생산의 혁신을 가져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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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히 [Justus Freiherr von Liebig, 1803.5.12~1873.4.18]
요약
독일의 화학자. F.뵐러와 함께 이성질체현상 이론을 이끌어내었으며, 공동연구를 하여 유기화합물의 조성·원자단\·분류·계통 또는 분해·합성 등 기본 분야를 발전시켰다. 리비히 단독의 업적으로 유기화합물의 원소분석법 등이 있다. 또한 근대적인 실험실의 창설로 화학의 연구 및 교육방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국적 독일
활동분야 화학
출생지 다름슈타트<>
주요저서 《화학 통신》(1844) 《화학대사전》 《계몽서()》
본문

다름슈타트 출생. 염료 ·도료 제조판매업자인 아버지의 실험실에서 화학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본 ·에를랑겐 등의 대학에서 화학을 배웠다. 1822년 파리에 유학, J.L.게이뤼삭과 P.L.뒬롱 등에게서 배우고, 여기서 처음으로 사실에 입각한 화학에 접하여 실험과 학설의 융합에 눈을 뜨게 되었다. A.F.훔볼트의 소개로 게이뤼삭의 실험실에 들어가 지도를 받으며, 풀민산염의 분석 등을 실시하였다. 1824년 독일로 돌아와 기센대학의 조교수 ·교수를 역임하고 1852년부터 뮌헨대학의 화학 교수를 지냈다.

파리의 게이뤼삭 실험실에서 리비히가 연구하고 있을 당시, 풀민산의 조성을 결정했는데 이것은 우연히도 F.뵐러가 발표한 시안산의 조성과 일치하였으므로 처음에는 논쟁이 있었으나, 이것이 동일 조성으로 성질을 달리하는 이성질체임을 확인하여 이성질체현상 이론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되고 벤조산 ·고편도유() ·요산족(尿) ·시안산 관련체 등에 관한 공동연구를 하여 유기화합물의 조성 ·원자단 ·분류 ·계통 또는 분해 ·합성 등 기본 분야를 발전시켰다. 리비히 단독의 업적도 유기화합물의 원소분석법을 비롯하여 귀중한 것이 많다. 또한 유기화학의 성과를 농업에 응용하여 토양이나 농산물에 대한 화학적 조사를 실시, 재배식물에 의한 토양 중의 무기성분의 탈취를 보충하기 위한 비료의 이론을 확립하였다.

만년에는 동물의 영양 및 생리의 연구에도 힘써 많은 영양물을 분석하고 유효성분을 결정, 영양가치를 측정하였다. 그리고 대사(), 에너지의 원천 등에 관해서도 뛰어난 논문을 발표하였다. 화학의 연구 및 교육방식에 관한 측면에서의 업적은 근대적인 실험실의 창설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기센대학 교수로 취임하자, 즉시 화학교실에 학생용 실험실을 설치하고 학생 모두가 실험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여서 각지로부터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제자들 중에서 우수한 화학자가 많이 배출되었고, 기센식() 연구와 기센식 교육을 각지로 확산시켰다. 예를 들면, 베를린의 호프만, 본의 F.A.케쿨레, 슈투트가르트의 H.펠링 등이 있으며, 그 밖에 프랑스의 C.A.뷔르츠, 영국의 플레이페어, 러시아의 N.N.지닌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저서로는 《화학 통신》(1844) 외에 《화학대사전》 《계몽서()》 등이 있다.

독일 화학자. 다름슈타트 출생. 아버지가 약과 염료를 제조·판매하여 어려서부터 화학실험에 친숙했다. 1820년 본대학에 입학, W.G. 가스트너에게 배우고, 에를랑겐대학으로 옮겨 1822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해에 파리로 유학하여 J.L. 게이뤼삭의 실험실에서 본격적으로 정량적 실험화학을 배웠고, 1824년에는 기슨대학 조교수로 취임, 다음해 교수가 되고 1852년 뮌헨대학 교수가 되었다. 리비히는 200편 이상의 화학연구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① 유기화합물 분석법의 개량 및 여러 화합물의 실험식 결정 ② 실험을 통한 기(基)의 이론 증명 ③ 여러 새로운 화합물 발견(클로로포름·클로랄·알데히드 등) ④ 산의 수소설 ⑤ 농업 및 동식물의 생리화학적 연구 등으로 분류된다. 또 파리 유학시절에 풀민산염의 구조를 결정하였다. 이것은 F. 뵐러가 발표한 시안산염의 조성과 동일해서 논쟁이 벌어졌으나, 1826년 이 두 물질이 동일 조성의 이종화합물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이성질현상의 발견). 1831년에는 이전보다 빠르고 정확한 새로운 유기화합물 정량분석법을 발표하였다. 리비히칼리구, 리비히냉각기 등은 지금도 유명하다. 뵐러와 공동연구하여 1832년 벤조일기를 발견하고, 같은해 알코올과 에테르가 에틸기의 화합물임을 증명하여, 유기화합물의 구조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요산을 연구한 이후로 생리화학 분야에 정진하였다. 또 1837년에 고편도(苦扁桃)의 성분 아미그달린이 고편도 속의 <효모같은 물질> 에멀션에 의해 가수분해되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효모는 미생물이 아니며, 발효는 분해상태에 있는 물질의 진동이 당(糖)에 전달되어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 때문에 1857년에 발효는 미생물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한 L. 파스퇴르와 격심한 논쟁을 벌였다. 그는 《농업과 생리학에 응용되는 유기화학(1840)》에서 <식물의 영양은 토양 속의 부식질(humus;동식물의 부패물)이 아니라도 무기물이면 가능하고, 탄소분을 공기 속의 이산화탄소에서, 수소분을 물에서, 질소분을 공기 속의 암모니아(뒤에 정정함)에서, 회분을 흙에서 얻으므로 수확만을 목표로 하는 약탈농업이 되면 회분을 흙에 공급해야 함>을 서술하여, 사상 최초로 칼륨과 인산염의 인공비료를 만들었다. 1842년 《동물화학》을 출판하여, 동물의 영양에는 탄수화물·지방·단백질이 필요한데 탄수화물과 지방은 체내에서 에너지원으로 되고, 단백질은 신체 구성요소로 된다고 하였다. 또, 연구교류를 목적으로 논문지 《화학·약학연보》를 창간하였는데, 이 잡지는 《Liebigs Annalen der Chemie》로 이름을 바꾸어 계속 발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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