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60년 에게해 남동쪽 코스섬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집안은 대대로 전해지는 마술사 집안이었다. 아버지에게서 의학의 실제에 대하여 배웠으며 성장하면서 소아시아·그리스·이집트를 여행하여 견문을 넓혔다. 그의 고향인 코스섬에는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 있었는데 이런 영향으로 그는 코스섬에 의학교를 세웠으며 의학 책을 저술하여 발표하였다. 또 제2·3의 여행을 계획하고 관찰력을 길렀으며, 사고력을 깊게 하였다. 그의 학설을 모은 《히포크라테스 전집 Corpus hippocraticum》은 히포크라테스의 언설(言說)만을 편집한 것이 아니라 히포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과 몇대에 걸쳐 의학도들에 의해 내용이 곁들여 졌다.
인체의 생리나 병리(病理)에 관한 그의 사고방식은 체액론(體液論)에 근거한 것으로, 인체는 불·물·공기·흙이라는 4원소로 되어 있고, 인간의 생활은 그에 상응하는 혈액·점액·황담즙(黃膽汁)·흑담즙(黑膽汁)의 네 가지 것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이들 네 가지 액(液)의 조화(調和)가 보전되어 있을 때를 그는 ‘에우크라지에(eukrasie)’라고 불렀고, 반대로 그 조화가 깨졌을 경우를 ‘디스크라지에(dyskrasie)’라 하여, 이때에 병이 생긴다고 하였다.
그는 임상(臨床)에서 관찰을 자세히 하고, 병이 났을 때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 즉 증세, 그중에서도 발열(發熱)을 반응현상(反應現象)이라 생각하여 그것은 병이 치유로 향하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았다. 병적 상태에서 회복해가는 것을 ‘피지스(physis)’라고 불렀고,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자연이다’라고 하는 설을 세워,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이 피지스를 돕거나 또는 적어도 이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치료의 원칙이라고 하였다.
증후학(症候學)·예후학(豫後學)에 대한 연구도 깊었던 그가 특히 빈사환자(瀕死患者)의 얼굴표정에 대하여 한 말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되고 있을 정도이다. 의사의 윤리에 대하여도 중요한 설을 말하였고, ‘의사의 아버지’로서 오늘날에도 존경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