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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키아인이 지중해에 세운 식민지 중 가장 번영을 누렸던 지역이 카르타고.

기원전 7세기에 아시리아에 의해 아시아쪽의 본토를 모두 잃은 페니키아인들은

아예 중심지를 카르타고로 옮겼다.

그리하여 세워진 나라가 카르타고 공화국이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 유민이 북아프리카에 세운 나라.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슬람 이전에 중동 문명

한니발의 석상. 미개한 이슬람과는 다른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우수함을 볼 수 있다.
 중세 기사 갑옷의 원형이 된 듯한 페니키아 갑옷.

포에니인=페니키아인

카르타고 시의 복원 상상도로마인은 카르타고의 주민을 포에니(페니키아人)라 불렀으며, 창건연대에 대하여는 여러 설(說)이 있지만 대개 BC 720년경으로 추측된다. BC 3세기 전반까지 서지중해에서 최대의 세력을 떨쳤으며, 무역으로 번영하였는데 특히 상업귀족의 세력이 매우 강대하였다. 카르타고라는 이름은 고대 로마인들이 부른 것으로서 페니키아어(語)로는 콰르트하다쉬트(새로운 도시)이며, 그리스인은 칼케돈이라 불렀다.

카르타고는 땅이 비옥하고 지중해 통상의 요충지로 해상무역을 통해 발전하였다. 특히 에스파냐와 아프리카를 잇는 통상로상에 있었으므로 BC 600년경에는 서지중해의 무역권을 완전히 잡고 코르시카섬 ·사르데냐 ·에스파냐 등지에도 진출하였으며, BC 6세기 중반기에는 전(全)시칠리아를 장악했다. 그들에게는 인신공희(人身供犧)라는 잔혹한 종교적 풍습이 있어 신전의 앞마당에는 여신(女神) 타니트와 남신(男神) 바아르아몽에게 산 희생물로서 바쳐진 것으로 추측되는 어린이들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카르타고는 식민 도시로 출발했지만, 많은 곳에 그 자신의 식민을 건설하고 농업과 상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시칠리아 섬의 그리스 식민지는 이미 카르타고의 손에 절반을 넘겨야 했다. 사르다니아와 코르시카, 이베리아 반도의 동남부 해안과 아프리카의 북서부 등지에 많은 식민을 건설한 카르타고는 그들 고유의 전통적인 항해 기술을 이용하여 대외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얻었다. 그들은 당시의 주요 무역품인 주석, 청동 제조에 꼭 필요한 주석을 구하기 위해 지중해를 벗어나 멀리 브리타니아까지 배를 보냈다. 아프리카 서해안에서는 많은 황금과 상아를 거두었고, 내륙에서는 대규모로 밀을 경작했다. 후대까지 이름이 높았던 카르타고의 밀 생산량은 풍부한 식량 자원이 되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지만, 고대의 무역은 뛰어난 과학 기술을 필요로 했다. 바다를 통한 무역을 하자면 많은 과학 기술의 바탕이 있어야 했다. 배를 건조할 수 있는 조선 기술, 배를 운항하는 항해술, 게다가 바다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천체를 살필 수 있어야 아무런 지표가 없는 바다에서 살아남고 항해할 수 있다.
고대의 유명한 페니키아 상인들은 이 삼박자를 갖추었기 때문에 그 옛날에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카르타고 전성기의 지배 영역
서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한 카르타고는 계속해서 서방을 향하여 판도를 넓혀 갔으며, 시칠리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약 3세기에 걸쳐 그리스인과 충돌을 되풀이하였다. BC 6세기에는 에트루리아인(人)과 결탁하여 그리스인과 충돌하였고 BC 540년경에는 코르시카섬에서 퍼카이아인과 싸웠으며 BC 480년에는 시칠리아 히메라의 싸움에서 시라쿠사의 겔론에게 패하였다.

국력의 재건을 도모한 카르타고는 BC 5세기 후반에서 BC 4세기 중엽에 걸쳐 특히 시라쿠사의 참주(僭主) 디오니시오스와의 싸움을 벌였다. BC 4세기 중엽 시라쿠사의 티모레온과의 싸움에서는 패배하였고, BC 310년에는 아가토클레스에게 아프리카 본토가 침공되어 카르타고가 포위되었으나 격퇴하고 아가토클레스 사후에 마침내 시칠리아의 패권을 재차 확립하였다.

그러나 그 후 에피루스 왕 피로스의 개입으로 결국 시칠리아에 대한 완전지배권을 잃게 되었다. 한편 로마인과의 사이에는 오래 전부터 조약을 맺어 서로 충돌이 없었으나, 피로스전쟁 후 양자의 대립이 격화하여 BC 264∼BC 146년 사이에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이 일어났다.


카르타고는 고대의 약 5세기 동안을 지중해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상업국가인 카르타고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남하해 오는 새로운 군사국가 로마에게 무참히, 흔적도 없이 멸망당하고 말았다.

1차 포에니 전쟁

카르타고가 시칠리아에 건설한 식민지 솔루스와 그 폐허포에니 전쟁의 발단은 시칠리아에서 일어났다.
시칠리아섬의 메사나를 점령하고 있던 마메르티니(군신 마르스의 아들들을 뜻함)로 불리는 이탈리아인 용병대가, 카르타고와 손잡은 시라쿠사의 왕 히에론 2세의 공격을 받고 로마에 구원을 청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원병을 보낸다는 것은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로마의 원로원은 알고 있었다. 원로원이 망설이는 구원군의 파병을 민회가 결의하였다. 이로써 결국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BC 264년의 일이었다.
히에론 2세가 카르타고를 배반하고 로마에 붙음으로써, 시칠리아 남부의 아그리겐툼(아그리젠트)도 로마의 손에 들어왔다.
그러나 해군력이 카르타고에 미치지 못하는 로마로서는 함대를 구축할 필요를 느꼈다. 로마는 그리스인의 원조로 군함을 건조하기 시작하였다. 카르타고는 5단노선(노를 5단으로 장치한 배)을 120척이나 갖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는 3장선(돛대가 3개 있는 배)와 3단노선들로 구성된 뒤떨어진 함대만을 갖고 있었다. 새로운 함대는 BC 260년에 완성되었다.
로마군의 2단 노선당시의 해전은, 먼저 배와 배를 충돌시켜 적의 군함을 격파한 다음, 적의 배에 올라 육지전에서처럼 격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함대는 뱃머리를 쇠로 무장하고 적함의 약한 부분에 충돌함으로써, 배를 부수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항해 기술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코르부스(적교:弔橋)였다. 밧줄로 적교를 돛대에 묶어놓았다가 적함의 갑판에 내려놓고 쇠갈고리로 고정시켜 적함과의 연결을 튼튼히 함으로써, 배의 파손 없이 적의 배에 올라 격투를 벌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로마는 카르타고를 무찌르고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였다. 카르타고로 진격해 들어가는 로마군은 카르타고의 용병군을 이끈 스파르타의 크산티포스에게 크게 패하였다. 그는 코끼리 부대와 기병대를 활용하여 로마의 집정관 레굴루스를 포로로 잡고 로마군을 섬멸하였다.
게다가 살아남은 부대를 구출하러 간 350척의 로마 함대는 귀환길에 태풍을 만나 80척만 남고 모두 침몰해버리고 말았다.
해를 거듭하면서 시칠리아섬의 각 도시에서 공방전이 계속되며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져 도무지 진전이 없었다. 로마는 커다란 손해를 거듭하기만 하였다.
BC 247년, 하밀카르 바르카스라는 청년 장교가 시칠리아에서 사병을 모아 이를 강훈련을 통한 정예 부대로 키워, 로마에 대항하였다. 이로 인해 전세는 로마에게 더욱 불리해졌다. 패색이 짙어지는 가운데 로마의 원로원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 무렵 로마의 부유한 몇 사람의 시민이 사재를 털어 함대를 마련할 군자금을 만들어주었다. 200척의 함대와 6,000명의 수병을 모아 대병력을 구성한 로마군은 카르타고의 남은 함대를 전멸시켰다. BC 241년의 일로 전쟁은 무려 23년 만에 끝을 맺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화의를 청하였고, 거액의 배상금 외에 시칠리아를 로마에 넘기게 되었다. 로마는 이제 이탈리아 반도 뿐 아니라, 해외의 속령을 갖게 되었다. 시칠리아는 로마의 첫 프로빙키아(속주)가 되었다.

한니발

시칠리아를 잃은 것은 카르타고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하밀카르 바르카스는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가 원주민을 차례로 정복하고 은광을 개발하는 등, 점차 국가의 부를 회복해 하고 있었다. 바르카스의 큰 아들이 바로 이름 높은 한니발이었다. 군대의 진영에서 태어난 한니발은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와 턱수염, 게다가 굉장히 검은 피부를 지녔다. 그 당시 대부분의 카르타고인은 셈족과 아프리카 흑인의 혼혈아였다. 한니발은 전쟁중인 군진에서 성장하였는데, 로마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이 남달랐다.
한니발은 원주민들로 구성된 용병대를 훌륭하게 훈련시켰다.
BC 220년 이베리아 반도(지금의 스페인)를 정복한 한니발은 로마를 쳐들어갔다.
동부 지중해안에 있던 로마의 동맹시 사군툼에 내분이 일어났는데, 이를 기화로 한니발은 8개월 동안 포위 공격을 함으로써, 끝내 사군툼을 함락시켰다. BC 218년이었다. 이로써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하는 제 2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한니발은 제 2차 포에니 전쟁의 모든 국면에 지배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는 보병 5만 명, 기병 9천 명과 40마리의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고, 알프스를 넘는 고난의 행군을 이겨냈다. 아무도 그가 북쪽의 눈 덮인 산을 넘어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BC 216년에는 반도 남부의 칸나에(칸네)에서, 결사의 로마군을 전멸시킨 한니발의 획기적인 전술은 명장으로서의 그의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게 하였다.

초반부터 대패한 로마는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으로 선출하여 한니발과 싸우게 했다. 파비우스는 한니발에게 싸움을 걸지 않고, 카르타고군의 자멸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파비우스의 반대파들은 그를 비겁자라고 욕하였다. 칸나에에서의 참패는 파비우스의 반대파가 무모하게 전쟁을 이끈 탓이었다. 로마군은 8만 6천 명의 군사 가운데 1만 4천 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카르타고군의 전사자는 6천 명이었다. 전사자 비율은 로마군이 90%, 카르타고군이 12%였다. 칸나에 전투는 전쟁의 역사에서 전술 연구의 자료가 되었다.

한니발의 코끼리부대와 로마군의 난전그러나 패전을 거듭했지만, 로마 국민의 조국에 대한 충성심은 오히려 더욱 깊어졌다. 로마의 동맹시들도 한니발에게 점령된 도시들을 제외하면, 로마를 배반한 도시는 없었다. 한니발은 로마가 도시 동맹 공동체기 때문에, 쉽게 와해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가 못했던 것이다.BC 207년 한니발의 동생 하스두르발이 원군을 거느리고 왔다. 그러나 그의 밀서가 아쉽게도 로마군의 손에 우연히 들어가게 되었다. 하스두르발의 군대는 로마군에게 탐지되어 전멸하고 말았다.
명장 한니발도 이로부터 차츰 힘을 잃기 시작하여, 점차 이탈리아의 남부로 쫓기게 되었다.
카르타고에게는 경제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이베리아 반도의 전선이 오랜 고전 끝에 로마에게 제압되었다. BC 206년의 일로 전쟁이 시작된 지 12년이 지나서였다.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이베리아로부터 개선해왔다. 그는 여론을 들뜨게 하여 스스로 사령관이 되어 단숨에 카르타고를 쳐들어갔다. 대승을 거둔 스키피오에게 카르타고는 화의를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한니발은 급히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그는 최후의 결전을 위해 방비를 튼튼히 했다.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해상을 완벽하게 방어하고 있었다.

우티카 유적지그러나 로마군은 우티카에 상륙하여 육로로 쳐들어 왔다. 한니발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제 2차 포에니 전쟁의 승패를 가른 BC 202년 자마의 전투에서 최후의 승리자는 로마였다. 지와 용을 겸비한 명장 한니발은 불운한 장군이었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15년간을 싸웠어도, 본국에서는 원군을 보내지 않았고, 그나마 동생인 하스두르발이 원군을 이끌고 왔지만, 로마군에게 발각되어 전멸당하고 말았다. 만일 카르타고에서 한니발에게 지속적인 원조를 보냈다면 포에니 전쟁의 결말은 달라질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한니발의 불행은 패배에 그치지 않았다.
한니발은 시칠리아, 소아시아 등으로 망명하여 떠돌게 되었다. 후에 로마가 더욱 힘을 불려 소아시아 지역에까지 그 세력권을 넓히자, 한니발은 스스로 자살하고 말았다.
카르타고는 패전국으로서, 20척을 제외한 모든 선박을 로마에 양도하고, 50년 동안 해마다 200 탈렌트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로마의 허락이 없이는 그 어떤 경우에도 외국과 교전할 수 없었다.
로마는 한니발을 도운 마케도니아왕 필립 5세와의 전쟁을 통해 동부 지중해에 대한 지배권을 넓혀 나갔다.
BC 146년 마케도니아를 멸망시키고 로마의 속주로 삼았으며, 그리스의 오랜 도시 코린트를 격파하고 코린트 주민을 모두 노예로 팔고,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그리스도 로마의 속주와 다름없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멸망시켜야 한다

카토는 집정관으로서 “카르타고는 멸망시켜야만 합니다.”라고 ‘카르타고 격멸론’을 줄기차게 주장하였다.
BC 174년 카토는 카르타고와 마시니시 간의 불화를 조사하기 위해 북아프리카에 파견되었다. 그는 포에니 전쟁에서 패하고도 카르타고가 번영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그는 카르타고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어서는 안된다고 다짐하였다.
제 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자, 카르타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지만, 지중해의 무역권을 놓고 로마와 맞서고 있었다.
그는 원로원에서 아프리카산 무화과를 보였다. 사람들이 그 크고 탐스러운 열매에 감탄하자, “이것은 뱃길로 사흘밖에 걸리지 않는 땅에서 난 것입니다.”라고 말을 꺼내고는 카르타고에 대한 경계심을 일깨웠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원로원에서 발언하게 되면, 늘 말미에 “그건 그렇다 치고, 카르타고는 마땅히 멸망시켜야만 합니다.”로 맺곤 했다. 실로 대단한 집념이었다.
마침내 로마는 제 3차 포에니 전쟁(BC 149∼146)을 일으켜, 카르타고를 정복하고 지중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카토는 평생 소원처럼 입으로 부르짖던 카르타고의 멸망을 보지 못하고, 제 3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될 무렵에 죽고 말았다.

굴종의 삶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죽음을 택하다

카르타고의 멸망을 그린 삽화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제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긴 명장이었다. 그는 카토의 ‘카르타고 격멸론’에 대하여 ‘카르타고 존속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그가 ‘카르타고 존속론’을 주장한 것은 카르타고가 있음으로 해서 로마 시민들이 경계심을 가지고 살아야 타락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카르타고를 파괴한 것은 스키피오 일족이었다.
제 2차 포에니 전쟁 후에, 이베리아 반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총독은 원주민(켈트 이베리아족)들을 지나치게 착취하였다. 이에 원주민들은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로마는 오랜 고전 끝에 BC 133년 그들의 아성인 누만티아를 공략하여 이를 불사르고 간신히 진압하였다.
한편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락 없이 외국과 교전을 할 수 없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카르타고의 옆 나라 누미디아왕 마시니사는 심심하면 카르타고의 국경을 넘나들며, 그 영토를 야금야금 빼앗아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로마에는 카르타고의 잠재적 능력을 과장하여 보고함으로써, 로마가 카르타고의 군사적 대응을 막도록 하였다. 로마의 원로원에서는 ‘카르타고 격멸론’이 늘 주장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카르타고의 대응을 막았다.
카르타고는 참다 참다 로마의 허락 없이 누미디아와 전투를 벌였다. 로마는 지체없이 카르타고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제 3차 포에니 전쟁이 터진 것이었다. 로마와 싸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카르타고는 사절단을 보내고 간곡히 사죄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카르타고에 파견된 로마군은 카르타고를 완전히 무장해제하였다. 그리고 카르타고 시민들에게 해안에서 10마일 이상 떨어진 곳으로 퇴거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한다고 포고하였다.
이 포고를 들은 시민들은 “굴종의 삶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죽음을 맞자.”고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 그들은 성문을 닫고, 남녀를 가리지 않고 무기를 만들고, 도시 방위를 위한 시설을 새로이 만들었다. 여자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쇠뇌(노포:弩砲)의 탄력받이 스프링을 만들고, 노예들은 해방되어 전선에 참여하였다.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우며 시작된 농성은 BC 149년부터 시작되어 장장 4년 동안 계속되었다. 로마군은 이 지루한 농성전에 탈진할 지경이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손자, 즉 스키피오의 장남의 양자인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가 로마군의 지휘관이 되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대(大)스키피오라고 하고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스키피로를 작은 스키피오, 즉 소(小)스키피오라고 구별한다. 소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에 대한 공격을 훨씬 강도 높게 퍼부었다.
기아와 질병에 시달린 카르타고 시민들은 1주일 동안 시가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토록 결사적으로 저항한 카르타고도 끝내 주저앉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카르타고의 주민은 총 인구의 10%도 되지 않았다. 처참한 결사 항전에 모든 시민이 동참하여 처절히 죽어간 것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노예로 팔려갔다.
카르타고는 무려 17일 동안이나 불탔다. 카르타고 500년의 번영과 영화는 한 줌의 재로 변하고 말았다. 지금의 카르타고 유적지는 그 전쟁의 잔해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로마에 멸망당한 이후 카르타고의 이름을 다시는 역사에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로마의 잔학한 파괴는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절시키고 말았다. 카르타고는 이제 없어지고, 로마의 속주 아프리카만이 그 땅의 이름을 대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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