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흰색이 박트리아입니다. 옆에 흐르는강은 옥수스, 즉 아무다리야강이죠. 녹색은 셀레우코스 제국입니다. 박트리아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노란색은 마우리아 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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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부,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등으로 이루어진 고대지방 이름. 옥수스강(아무다리야강) 중류지역의 비옥한 계곡을 포함한다. 중국·인도·서방을 잇는 내륙교역로의 교차점이다. 그 이름은 옥수스강지류인 박트로스강에서 비롯되는데, 수도 박트라는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다가, 후세에는 발흐라 하였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예언자 조로아스터가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아케메네스왕조의 페르시아제국시대에는 속령(屬領)으로서, 이곳을 통하여 시베리아의 금이 유입된 듯하다. 그 뒤 이 땅을 지배한 셀레우코스 1세는 이곳 귀족의 딸과 결혼하지만, 그 뒤 디오도투스라는 유력자가 반란을 일으켜, 그리스인·인도인·이란인 등이 섞인 독립왕국 박트리아를 일으켰다. 40명 가량의 왕이 지배하였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에우티데무스 1세, 데메트리우스 1세 부자의 치세(BC 235∼BC 185) 때 가장 번영하여, 한때 영토가 아프가니스탄·중앙아시아·파키스탄 등을 포함하였다. BC 2세기 말이 되자 북방유목민이 옥수스강을 넘어 침입했다. 그 일부는 쿠샨족으로, BC 1년 무렵 왕조를 세웠다. 쿠샨왕조는 카니슈카왕 때 가장 번영하였으나 3세기 중엽에 쇠퇴하였다. 카니슈카시대에는 간다라식 불교미술이 성립되고 불전(佛典)의 결집이 행하여졌으며, 박트리아에서는 그리스·이란·인도의 여러 문화가 융합되었다.
힌두쿠시산맥과 아무다리아강 사이에 고대 그리스인이 세운 나라(BC 246∼BC 138). |
중국에서는 대하(大夏)라고 하였다. 아케메네스왕조 때는 페르시아제국(帝國)의 박트리아나주(州)였다. 알렉산드로스대왕 제국이 붕괴한 뒤에는, 그 유장(遺將)인 셀레우코스 1세가 세운 시리아왕국의 한 주가 되었다. 그러나 시리아왕국이 쇠퇴한 틈을 타, 사트라프(Satrap:州知事)로 임명된 디오도투스가 중앙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왕이 되고, 박트라(지금의 발흐)에 수도를 정하였다. 왕 에우티데모스와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는 힌두쿠시산맥을 넘어서 인도에 들어가, 한때는 대제국으로서의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의 동정(東征)을 틈타, 장군 유크라티데스는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었고, 이후 많은 왕위 찬탈자(簒奪者)가 국가를 약체화시켰다. 이때 서쪽으로부터 파르티아의 침입을 받았고, 특히 북쪽에서 유입(流入)한 대월지(大月氏)에 정복되어 왕국은 멸망하였다. |
박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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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트리아는 힌두쿠시 산맥과 아무다리야 강(옥서스) 사이에 위치한 나라로 박트리아라는 명칭은 고대 그리스어로 지어진 이름이다. 그 수도는 박트라(오늘날 발크)였다. 박트리아는 동쪽으로 고대 간다라 지방과 마주하고 있었다.
박트리아 언어는 박트리아어(고대 이란어 계열)로 인도이란어파와 인도유럽어족 계통이었다. 박트리아인들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남부에 거주하고 있는 타지크 족 선조들의 일파다.
박트리아는 기본적으로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북쪽이다. 그것은 적합한 기후의 산지이다. 물이 많고 땅은 비옥하다. 박트리아는 이란족의 고향이다. 근래에는 중앙아시아의 모든 나라를 지칭하는데 쓰인다.
역사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고고학 복합체
박트리아 마르기아나 고고학 복합체(BMAC)는 옥서스 문명이라고도 알려져있으며 기원전 2200년에서 1700년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청동기 문명의 고고학적인 명칭이다. 현재의 투르크메니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북부, 우즈베키스탄 남부, 타지키스탄 서부를 포함하며 아무다리야 강(옥서스) 상류의 고대 박트리아 영역도 포함된다. 그 지역은 소련의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되었고 명명되었다. 박트리아는 박트라(오늘날 발크)의 그리스어식 이름이며 마르기아나는 페르시아인 총독 마르구에 대한 그리스식 이름이였으며 그 수도는 메르브였는데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에 속한다.
몇몇 학자들은 박트리아는 아리아인의 고향이였다고 한다. 기원전 2500-2000년경 그들은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이란과 인도로 들어왔으며 후에 중앙 아시아 페르시아 제국의 북부 지역이되었다. 산지 국가의 비옥한 토양이 투란 사막으로 둘러싸인 이 영역에서 조로아스터교(자라투스트라)가 성장하였다. 아베스탄은 조로아스터교의 아베스타의 최고 오래된 부분의 언어로 산스크리트어와 연관된 고대 이란어이다. 오늘날 학자들은 아베스탄 언어는 산스크리트어의 사투리였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두 언어 모두 아리아인의 인도 이란어 이기 때문이다.
키루스와 알렉산더
박트리아가 메디아 제국의 일부였는지 아닌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키루스 대왕에 의해 병합되었다. 그 후 페르시아 제국의 총독령의 하나가 되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3세가 알렉산더 대왕에게 격파되고 살해된 후 그의 가해자였던 박트리아의 총독 베수스는 민족적 저항을 조직하려고 하였다.
알렉산더는 소그디아나와 이란을 어렵지 않게 정복하였다. 다시 옥서스 강 너머로 향하던 그는 강력한 저항을 만났다. 2년간의 피의 전쟁후에 마케도니아 제국에 병합하였지만 백성들을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알렉산더의 사후에 마케도니아 제국은 결국 나누어졌고, 박트리아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셀레우코스 제국
마케도니아인들은 (특히 셀레우쿠스 1세와 그의 왕자 안티오쿠스 1세)가 셀레우코스 제국을 창건하고 동 이란에 많은 그리스 마을을 세웠다. 그리고 그리스 어가 그곳에 잠시 지배적이였다. 그리스의 존재가 그리스에 더 가까웠던 영역보다 박트리아에 더 유명한 파라독스는 페르시아 왕의 제신뢰성이 부족한 그리스 인을 제국의 가장 먼 지방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그레코-박트리아 왕국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들이 싸워야 했던 많은 어려움들과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공격은 박트리아 총독 디오도투스에게 독립(기원전 255년)을 선언하고 소그디아나를 정복할 기회를 주었다.
그는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의 창건자였다. 디오도투스 1세와 그의 계승자들은 셀레우코스 제국 특히 안티오쿠스 3세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결국 기원전 190년 로마에 의해 격파되었다.
그레코-박트리아는 매우 강하여 그들의 영토를 인도로 팽창시켰다. 박트리아는 대부분 아리아나의 동쪽과 윗쪽에 위치하지만 부분이 아리아나에 북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기름을 제외한 모든 것을 생산하였다. 박트리아를 반란케 한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주인이 된 아리아나의 비옥함 때문에 매우 강력하게 되어 아리아나 뿐만아니라 인도와 더 많은 종족이 그들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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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은 기원전 250년에서 125년까지 중앙아시아의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를 지배했던 고대 왕국이다. 기원전 180년 그레코-박트리아인의 북인도로의 팽창은 인도-그리스 왕국을 세웠고 이는 서기 10년까지 지속되었다.
목차[숨기기] |
[편집] 독립(기원전 250년)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은 기원전 250년 창건되었는데 그때 셀레우코스 제국의 박트리아, 소그디아나와 마르기아나의 군사적 총독 디오도투스(테오도토스)는 프톨에마이오스 이집트와 분쟁에 휩쓸린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쿠스 2세로부터 그의 영토의 독립을 위해 씨름하였다.
디오도투스는 박트리아의 천 도시의 총독으로 스스로를 왕으로 포고하였다. 새로운 왕국은 동방의 도시화된 부유한 왕국으로 고려된다. 그것은 동서쪽으로 영토가 팽창하였다.
박트리아가 반란케한 그리스인은 나라의 비옥함으로 강력하게 성장하여 아리아나 뿐만아니라 인도의 제왕이 되었다. 그들의 도시는 박트라, 다랍사 그리고 다른 여러 도시가 있었다. 그중에는 지배자의 이름을 딴 에우크라티디아도 있었다.
[편집] 디오도투스의 전복 (기원전 230년)
유티데무스 1세는 마그네시아 그리스인으로 소그디아나의 총독이였으며 기원전 230년경 디오도투스 2세를 전복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의 왕국을 시작하였다. 유티데무스의 지배는 소그디아나로 팽창하였고 페르가나에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건설된 알렉산드리아 너머로 진행하였다.
[편집] 디오도투스 가
박트리아, 소그디아나, 페르가나, 아라코시아의 영토 :
디오도투스가의 세번째 왕 안티오쿠스 니카토르는 불분명
[편집] 유티데무스 가
- 유티데무스 1세 (재위 c. 223- c.200 BCE) 디오도투스 2세를 전복.
그레코-박트리아 왕 유티데무스 가 기원전 190년 인도로 침입하였다. 그들의 왕국은 기원전 170년까지는 버려졌다. 그러나 적어도 기원전 150년까지는 인도의 영역에 남았다.
그레코박트리아 왕이며 인도의 정복자.
드미트리우스는 여러 하부왕을 두어 여러나라로 나누었다.
찬탈자 유크라티데스에 의해 패함
- 판탈라온 (190s 또는 180s BCE)드리트리우스 1세의 다른 형제
- 아가토클레스 (c180-170 BCE) 다른 형제?
- 아폴로도투스 1세 (재위 c. 175–160 BCE) 네번째 형제?
- 안티마쿠스 2세 니케포로스 (160-155 BCE)
- 드미트리우스 2세 (155-150 BCE)
- 매난더 (재위 c. 150–135 BCE).
[편집] 유크라티데스 가
헬리오클레스는 박트리아의 마지막 그리스인 왕으로서 월지 유목 민족의 침입을 받았다.[출처 필요] 유크라티데스의 후손은 인도-그리스 왕국을 다스렸다.[출처 필요]
청동 헤라클레스 상, 아이 칸노움 2세기 B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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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가 새겨진 돌 블록. 아이 칸노움. |
Diodotus Ⅰ(디오도투스 1세) 박트리아 제 1왕조 창건자
?~?
BC 3세기 중반에 활동한 셀레우코스조(朝) 박트리아의 총독.
아들 디오도토스와 함께 박트리아에 그리스계(系) 왕국을 세웠다. 셀레우코스조의 안티오코스 1세와 2세를 차례로 섬겼으나 BC 250년경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를 박트리아 왕이라 칭했다. 그의 치세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셀레우코스 제국이 혼란에 빠짐에 따라 위기감을 느낀 셀레우코스 2세의 요청으로 BC 246년 그의 여동생과 결혼했다고 한다. 아들 디오도토스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죽은 뒤에는 소테르(구원자)라는 이름으로 숭배되었다.
Coin depicting the Greco-Bactrian king Euthydemus (230-200 B.C.) 박트리아 제 2 왕조 창건자
Euthydemos(에우티데모스)
?~?
BC 3세기말에 활동한 박트리아의 왕.
처음에는 박트리아의 왕 디오도토스 2세의 총독이었던 것 같으며 나중에 그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 BC 208년 셀레우코스의 왕 안티오코스 3세의 침략을 받아 오랫동안 전쟁을 벌였다. 아리우스(하리루드) 강 전선을 지키려고 애썼으나 실패하고, 수도 박트라(아프가니스탄 북쪽에 있는 발흐로 추측됨)로 후퇴해 2년 동안 포위 공격을 견뎌냈다. 마침내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는데 그는 왕국을 계속 보유하는 대신에 셀레우코스의 패권을 인정해야 했다. 그뒤 파르티아로부터 영토을 빼앗았으며,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소그디아나·아라코시아·드랑기아나·아리아 등 동쪽 지방도 정복했다고 한다.
아이하눔유적 [Ai Khanoum]
요약
아프가니스탄의 타리칸 북방, 아무강과 코크차강의 합류점에 있는 박트리아시대의 대도시 유적.
소재지 아프가니스탄의 타리칸 북방, 아무강과 코크차강의 합류점
시대 빅토리아시대
지정 1965년
본문
1965년부터 프랑스의 조사단이 박트리아에서 처음으로 발굴하였다. 이 유적에는 헬레니즘과 전통적인 재래의 기법이 결부된 건축물이 있다. 남동쪽의 아크로폴리스와 아무강 사이에 시가지가 있고 북동쪽에 성벽 ·시문(市門)이 있으며 중앙의 대로는 직선으로 1,600 m이다. 건물벽은 진흙 벽돌로 되어 있고, 140×100 m의 열주회랑(列柱廻廊)이 있는 큰 방과 이에 부수되는 18열주 사이에는 석회암으로 된 원주(圓柱)가 있다.
주초(柱礎) ·주두(柱頭)는 방에 따라 다르지만 밀레투스의 공회당과 파르티아의 니사의 주두 등과 유사한 것이 있다. 최고(最古)의 묘소와 김나지움(체육장) 등에서 그리스어 이외의 비명(碑銘)이 출토되어 델포이와의 연락방법이나 건설자 크레아르코스의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4회의 건축기(建築期)와 3회의 붕괴에 관한 연대는 미상이다.
시바르간의 유물 [-遺物 Shibarghan]
요약
아프가니스탄 북부 시바르간시에 있는 차리 유적에서 1979년 발견된 껴묻거리[副葬品]. 연대는 기원 전후, 요람기 쿠샨왕조의 박트리아로 짐작되고 있다. 6기의 무덤이 조사되었는데, 피장자는 지하 수m 깊이에 묻힌 널[棺] 속에 안치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금제품과 보석세공을 몸에 걸친 사람은 왕으로 보이고, 그 밖의 피장자는 친척으로 짐작된다.
내용
아프가니스탄 북부 시바르간시에 있는 차리 유적에서 1979년 발견된 껴묻거리[副葬品]. 연대는 기원 전후, 요람기 쿠샨왕조의 박트리아로 짐작되고 있다. 6기의 무덤이 조사되었는데, 피장자는 지하 수m 깊이에 묻힌 널[棺] 속에 안치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금제품과 보석세공을 몸에 걸친 사람은 왕으로 보이고, 그 밖의 피장자는 친척으로 짐작된다. 껴묻거리 가운데 주요 유품은 금제접시·관·동물형 조각·수목형 조각, 보석을 박아넣은 금팔찌·반지·드리개장식 등이다. 이들 유품에서는 그리스·로마·인도 등의 영향이 발견되며, 비단길의 요충이었던 박트리아의 역사를 해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딜베르진 [Dil'berdzhin]
요약
아프가니스탄 북부 발흐 오아시스에 있는 그레코 박트리아시대 및 쿠샨왕조시대 유적. 달베르진 카잔이라고 한다. 383393m² 성벽으로 둘러싸이고 중앙에 사방 150m의 내성지(內城址)가 있다. 1970∼72년 소련·아프가니스탄 공동고고학 조사단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내용
아프가니스탄 북부 발흐 오아시스에 있는 그레코 박트리아시대 및 쿠샨왕조시대 유적. 달베르진 카잔이라고 한다. 383393m² 성벽으로 둘러싸이고 중앙에 사방 150m의 내성지(內城址)가 있다. 1970∼72년 소련·아프가니스탄 공동고고학 조사단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거주구·신전·불교사원 등이 발굴되면서 소[牛] 위에 올라앉은 시바와 파르파티의 상이 있는 벽화·불상과 헤라클레스의 조각·스토퍼 등 많은 미술품이 발견되었다. 또 남서쪽 모서리에서는 저수지의 유적도 발견되었다. BC 3세기부터 BC 2세기 무렵까지의 박트리아문화에 대한 귀중한 자료이다.
BC175년 박트리아의 영토(데메트리우스 1세의 치세)
Greco-Buddhist representation of Buddha, Gandhara, 1st-2nd century AD
페니키아가 현재의 레바논 땅이라면 박트리아는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땅에 세워진 나라입니다. 셀레우코스 제국에서 독립한 박트리아는 역시 그리스인의 국가입니다. 기원전 2세기를전후하여 최전성기를 누렸으며 간다라 문화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습니다. 이후 이 지방에는 쿠샨왕조가 문화를 이어 받아 바미얀 석굴같은 훌륭한 문화 유적을 많이 남겼습니다. 바미얀은 미친 똥슬람 광신도 탈레반 새끼들에 의해 유네스코등 수 많은 공익단체들의 구입 제안에도 불구하고 처참히 파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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