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만티아 전쟁은 히스파니아 내륙의 켈트이베리아인들이 기원전 153년부터 기원전 133년까지 로마와 벌이 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켈트이베리아인의 저항 거점이었던 누만티아시가 파괴되고 로마의 지배가 본격화 되었다.
켈트이베리아인은 로마에 의해 성벽 도시를 쌓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그 무렵 강대해지기 시작한 사라고사 시가 주변 마을에 성벽을 쌓기 시작했고 로마는 이전의 조약을 근거로 이를 제지하려 했다.
그러자 사라고사는 금지된 것은 새로운 마을의 건설이지 이전부터 있던 마을은 해당되지 않으니 괜찮다고 답했고 결국 로마는 병력을 파견하여 사라고사에 공납과 병력 공출을 요구했다.
1차 켈트이베리안 전쟁 후 사라고사는 공납과 병력 제공의 의무를 면제 받았으나 이는 로마에 충실한 경우에 한해서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결국 사라고사는 로마의 요구를 거절했고 로마는 이를 빌미삼아 사라고사를 공격하게 되었다.
기원전 153년
로마는 Quintus Fulvius Nobilior의 지휘하에 약 3만의 병력을 히스파니아에 보냈다.
사라고사인은 성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켈트이베리아인인 Arevaci인들과 동맹을 맺고 2만의 보병과 5천의 기병을 동원해 매복을 하여 행군중이던 로마군에 피해를 입혔다.
3일 후 Nobilior는 누만티아 근처에 도착했고 누미디아 왕 마시니사는 로마를 원조하기 위해 300의 기병과 10마리의 코끼리를 보내왔다.
Nobilior는 코끼리로 마을을 공격하려 했으나 부상당한 코끼리가 폭주하여 아군을 공격하는 바람에 혼란에 빠져 켈트이베리아군의 역습을 받아 패주했다.
Nobilior는 기병 장교를 파견해 주변의 우호 부족으로부터 기병을 모으게 했으나 매복으로 인해 전사했다.
로마군이 잇달아 패하자 로마의 보급 창고가 있던 마을이 켈트이베리아 편을 들어 반란을 일으켰다.
Nobilior는 일단 군사 작전을 보류하고 겨울을 나기로 했으나 물자는 부족하고 다수의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기원진 152년
로마는 지휘관을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로 교체했다.
마르켈루스는 교체 되기 전까지 지난해 로마군을 배신한 마을을 항복시키고 누만티아 근교까지 진군했으나 그 이상 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기원전 151년
집정관 리키니우스 루쿨루스가 히스파니아에 도착해 마르켈루스를 대신했고 그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小 스키피오)를 부관으로 삼았다.
루쿨루스는 전쟁이 계속되길 원했기 때문에 전쟁과 관련이 없던 주변 부족들의 영토를 침범했다.
하지만 크게 얻은 것이 없이 귀환할 수 밖에 없었다.
기원전 143년
켈트이베리아인은 당분간 독립을 유지했으나 기원전 143년 퀸투스 메텔루스 마케도니쿠스가 로마군을 인솔하여 갑자기 켈트이베리아에 침입했다.
갑작스러운 로마군의 침입에 Arevaci인들은 부득이하게 로마 편에 서게 되었고 남은 유력 도시는 누만티아를 테르만티아(?) 뿐이었다.
기원전 141년 - 기원전 140년
메텔루스에 이은 퀸투스 폼페이우스는 누만티아 부근에 진을 쳤다.
이에 누만티아군은 로마군과 소규모 전투만을 벌이며 괴롭혔고 결국 폼페이우스는 누만티아 공략을 포기하고 테르만티아로 향했으나 여기서도 패배하여 물러났다.
기원전 140년에 다시 누만티아 공략에 나선 폼페이우스는 강줄기를 바꿔 누만티아인들을 굶주리게 하려 했으나 누만티아인은 가끔씩 출격하며 공사를 방해해 로마군에 피해를 입혔다.
로마군의 피해가 이어지자 폼페이우스는 누만티아와 평화교섭에 들어갔다.
기원전 139년
마르쿠스 폼필리우스 라에나스가 폼페이우스를 대신해 지휘권을 인수받았다.
폼페이우스의 평화교섭은 원로원에 의해 각하 되었고 폼필리우스는 공격을 재개 했으나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하고 귀환했다.
기원전 137년
후임인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마니키우스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등을 대동하여 누만티아를 공략했으나 연전연패를 당했다.
마니키우스는 진영을 철수시키려 했지만 누만티아군이 이를 눈치채고 공격하여 포위를 당하게 되었다.
결국 마니키우스는 누만티아와 로마를 대등하게 놓는 조건으로 화약을 맺고 포위에서 벗어났으나 이후 로마 원로원은 이 화약에 분노하여 동료 집정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포르키나를 파견하여 사령관을 교체했다.
기원전 136년
아이밀리우스 역시 식량 부족으로 철수하다 추격을 받아 큰 손해를 입었다.
기원전 135년
마니키우스와 누만티아의 화약을 심의한 원로원은 화약을 파기하고 대신에 마니키우스를 누만티아에 인도하기로 결정했으나 누만티아는 이를 인수 받지 않았다.
로마의 사령관은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가 되어 누만티아와의 전쟁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피소는 누만티아에 대해 군사 행동을 일으키지 않았고 근교를 몇번 약탈하고는 임기를 마쳤다.
기원전 134년 - 기원전 133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小 스키피오)가 피소의 후임이 되었는데 그는 동맹국의 파견 부대와 클리엔테스를 통해 모은 사병을 이끌고 히스파니아로 향해 로마 정규군과 합류했다.
이후 스키피오는 군의 훈련을 다시 진행한 후 원정에 나섰다.
스키피오는 누만티아 근처에 진영을 건설하고 부근의 들에 씨를 뿌려 곡물을 수확했다.
그런 후에 약탈에 나서 누만티아 근교의 토지를 망치고 그들을 식량부족에 빠뜨리려 했다.
스키피오는 주변의 켈트이베리아인들과 화의를 맺은 후 진영으로 돌아가 겨울을 나게 되었는데 그 동안 누미디아로부터 유구르타가 12마리의 코끼리와 궁병, 투석병을 인솔하고 원군으로 왔다.
스키피오는 겨울 동안에도 약탈을 반복했다.
다음 해에 스키피오는 군을 두개로 나누고 누만티아 양쪽에 진영을 만들어 누만티아를 포위하는 성벽을 만들기 시작했다.
누만티아인은 자주 출격하며 공사를 방해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로마군이 달려들어 격퇴했다.
출격할 때마다 번번이 격퇴당한 누만티아인은 궁핍해졌고 몇몇 결사대가 빠져나가 주변 부족들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했으며 오히려 그들은 로마군에 원군을 파견했다.
결국 누만티아인은 식량이 떨어져 항복했다.
스키피오는 누만티아인들을 노예로 삼고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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