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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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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는 19세기 독일 철학자이며 음악가이자 시인이다. 그는 종교, 도덕 및 당대의 문화, 철학 그리고 과학에 대한 비평을 썼고, 특유의 문체를 사용했으며 경구(aphorism)에 대한 자신의 기호(嗜好)를 드러내었다. 니체의 영향력은 철학과 철학을 넘어서는 다른 영역에도 실질적으로 남아있는데, 특히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그러하다.
니체의 문체와 진리의 대상 및 가치에 대한 그의 근본적인 질문은, 중요한 해석의 문제를 제기했고, 대륙철학(현상학)과 분석철학 모두에서 방대한 이차 문헌이 생겨나게 했다. 그의 주요한 사상이 생(生)의 긍정으로서의 해석의 비극을 포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는 셀 수 없는 해석으로 빠져드는 것이며, 플라톤 철학에 대한 뒤집기이다.
니체는 철학으로 자신의 분야를 바꾸기 전에 이미 철학자로서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24세에 그는 바젤 대학에서 고전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지만, 살아있는 동안 계속 그를 괴롭혔던 건강상의 문제로 1879년에 그만두었다. 1889년 그는 심각한 정신질환의 증세를 보였으며, 1900년에 사망할 때까지 어머니와 여동생의 돌봄을 받으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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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편집]
니체는 독일의 철학자·사상가이다. 작센 주의 레컨에서 출생하여, 5세 때 목사인 아버지와 사별하고 할머니의 가정에서 어머니에 의해 양육되었다. 1864년 본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신학·철학을 배우고, 후에 리첼의 지도로 문헌학을 연구하였다. 1865년 스승 리첼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에 전학한 후, 주로 그리스 문헌학을 연구하고 몇몇 논문을 발표하는 한편, 이때부터 쇼펜하워를 읽는 동시에 바그너의 음악에도 심취하였다. 1869년 리첼의 소개로 바젤 대학에서 고전 문헌학을 강의하였고,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위생병으로 종군하였으나 병으로 바젤로 귀환하였다. 이후에 계속하여 병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1872년 처녀작 <비극의 탄생>에서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을 예술적 형이상학으로 쌓아 올렸다. 그 후 주로 북이탈리아와 남프랑스에 머물면서 저술에 전념하여 사색의 심화와 함께 가장 독창적인 저서를 냈다. <여명> <환희의 지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선악의 피안> 등에서 그는 크리스트교와 이상주의의 도덕을 '약자의 도덕', '노예의 도덕', '데카당스'라고 배격하고, '초인' '영원 회귀'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일종의 형이상학을 수립하여 뒤에 생의 철학이나 실존 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1889년 정신병의 발병으로 어둡고 괴로운 말년을 보내면서, 인간의 삶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저작에만 몰두하였다. 특히 <즐거운 지식>에서는 신의 죽음을 선언하였다. 그가 크리스트교를 비판한 것은 유럽을 비판한 것으로, 키에르케고르와 더불어 실존주의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생애 [편집]
출생과 학업 (1844 – 1869) [편집]
니체는 1844년 10월 15일 예전의 프로이센 (독일)의 작센 지방의 소읍인 뢱켄(Röcken)에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프러시아의 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서 빌려온 것으로, 빌헬름 4세는 니체가 태어나던 날에 나이가 49세를 넘었었다(니체는 훗날 그의 이름에서 가운데에 있던 "빌헬름"을 빼 버렸다.[1]) 니체의 아버지인 카를 루트비히(1813-1849)는 루터교 목회자이자 전직 교사이었고, 프란치스카 욀러(1826~1897)와 1843년에 결혼하였다. 그의 여동생인 엘리자베스는 1846년에 태어났고, 뒤를 이어 남동생인 루드비히 요셉이 1848년에 태어났다. 니체의 아버지는 뇌 질환으로 1849년에 사망했다. 그의 어린 남동생은 1850년에 사망했다. 그 후 가족은 나움부르크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니체의 할머니와 아버지의 결혼하지 않은 두 자매들과 함께 살았다. 니체의 할머니가 1856년에 사망하자, 가족은 그들의 집으로 이사했다.
1861년 니체는 소년학교에 출석했고 그 다음에는 그가 구스타브 크루크와 빌헬름 핀터와 친구가 되었던 곳인 사립학교에 다녔다. 두 친구는 모두 명망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1854년 그는 나움부르크에 있는 돔 김나지움에 다니기 시작했으나, 그의 특출한 재능은 음악과 언어에서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 후 국제적으로 유명한 슐포르타에 동료들처럼 입학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그의 학업을 1858년부터 1864년까지 계속했다. 그는 파울 도이쎈, 칼 폰 게르도르프와 친구가 되었다. 또한 그는 시를 짓고 음악을 작곡하는 데 시간을 들였다. 슐포르타에서, 니체는 특히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에 대해서 중요한 입문 과정을 이수 할 수 있었다. 그 동안에 그는 살면서 처음으로, 조그만 시골 마을의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가족의 삶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다.
1864년 졸업을 한 후에, 니체는 신학과 고대 철학을 본 대학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 동안, 그는 도이쎈과 함께 대학생 학우회(Burschenschaft Frankonia)의 구성원이 되었다. 한 학기 후에 어머니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학 공부를 중단했고, 자신의 신앙도 상실하였다.[2] 그것은 아마도 그가 1835~1836년에 다비드 슈트라우스가 쓴 《예수의 생애》(Das Leben Jesu)란 책에서 그가 담당한 부분을 읽어나가던 중에, 그 책의 내용이 젊은 니체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을 것이다.[3] 그 후 니체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리츨 교수 밑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데 집중하였고, 이듬해에 그는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다. 거기서 그는 에르빈 로데와 친구가 되었다. 이 무렵 니체의 첫 철학 저서의 출판이 곧 이루어지게 된다.
1865년에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글들을 알게 되었고, 그는 1866년 프리드리히 알베르트 랑게의 책, 《유물론의 역사와 그 현재적 의미에 대한 비판》(Geschichte des Materialismus und Kritik seiner Bedeutung in der Gegenwart)을 읽었다. 그는 두 사람의 저서 모두와 자극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의 저서는 니체가 그의 지평을, 철학을 넘어서는 영역까지 확장하도록 격려했으며, 그의 학업을 지속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1867년 니체는 자원하여 나움부르크에서 프로이센 포병으로 한해동안 복무하였다. 그러나 1868년 3월에 그는 말을 타다가 사고를 당해서, 군복무를 지속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니체는 그의 관심을 다시 그의 학업에 둘 수 있었고, 학업을 끝낸 후 그 다음 해에 바그너와 처음으로 만났다.
바젤 대학교에서의 교수 생활 (1869–1879) [편집]
24살에 리츨의 도움으로, 스위스 바젤 대학교의 고전문헌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바젤 대학교에 들어선 이후, 그는 프로이센의 국적을 포기했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공식적인 시민권이 없었다고 한다.[4] 하지만 그는 1870년에서 1871년까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했는데, 카우프만은 그가 군의관 활동 당시 매독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어떤 이들은 니체가 미친 까닭이 매독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바젤 대학교로 돌아오면서 그는 독일제국의 성립과 비스마르크의 등장을 보았다.
그는 대학교에서 취임 강의로 “호메로스와 고전문헌학”(Homer und die klassische Philologie) 을 연설했다. 그는 신학과 교수인 프란츠 오버베크와 어울렸으며, 그와 평생동안 친구로 지냈다. 당시 러시아 철학자였던 아프리칸 스피르,[5] 니체가 자주 강의를 들었던 동료 역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등도 니체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니체는 이미 1868년부터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만나기 시작했었는데, 그의 부인과 그에 매우 감탄하곤 했다. 또한 바그너는 니체와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에 초대하기도 했다. 니체는 1872년에 《비극의 탄생》을 썼다. 하지만 리츨과 같은 니체의 동료들은 이 책에 대해 별로 열정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873년과 1876년 사이에는 《반시대적 고찰》을 썼는데, 총 4편으로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로 나눠진다. 네 편의 에세이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가 주장하는 대로, 독일 문화의 발전 노선에 도전하는, 문화 비평의 방향을 공유하고 있다. 1873년이 시작할 무렵, 니체는 또한 고대 그리스 비극에 나타난 철학 같이 사후에 출간된 기록을 점차로 모으고 있었다. 이 시기 동안 바그너와 그의 동료들 사이에서, 니체는 말비다 폰 메이센부르크와 한스 폰 뷔로우를 만났고, 1876년에 그에게 영향을 주어 그의 초기 저작에 나타난 비관주의를 해소시킨, 파울 리와 우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는 1876년에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진부한 공연과 대중의 천박함에 혐오감을 느끼고 실망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바그너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1878년 니체는 그 특유의 경구가 가득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출판하였다. 또한 니체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철학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즈음에 혼인을 하려 애쓰기도 했다. 1879년, 건강이 더욱 악화되면서 니체는 바젤 대학교이 교수직을 사임했다(사실 그는 어릴 적부터 병치레가 잦았는데, 가끔 두통이나 복통을 겪기도 했다. 1868년에 낙마사고와, 1870년에 걸린 병 때문에 니체의 건강이 더욱 악화된 것으로 보이며, 실제 바젤 대학교에서 휴가를 많이 갖기도 했다.).
독립 철학자 생활 (1879–1888)과 죽음 [편집]
바젤 대학교에서 나온 이후 병든 몸이 적응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집필생활에 몰두하였다. 1881년, 프랑스가 튀니지를 점령했을 때, 튀니지로 여행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이내 그 계획을 접고 만다.(건강에 대한 문제로 여행을 취소한 것으로 보인다.)[6]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졸도한 후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생애의 마지막 10년을 보냈다. 니체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킨 후 완전히 정신 상실자가 되었고, 이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예나에서 거주했다. 어머니가 죽자 누이동생 엘리자베트가 니체를 바이마르로 옮겼고, 니체는 1900년 8월 25일 바이마르에서 죽었다. 니체가 죽자 엘리자베트는 고향 뢰켄의 아버지 묘 옆에 니체를 안장했다.[7]
철학 [편집]
도덕가치 비평 [편집]
니체는 주인과 노예의 도덕성을 구분하였는데, 전자는 강자로서 인생의 축복에서 기원되었으며 후자는 약자로서 주인에 대한 원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별은 주인의 도덕성은 '선함'과 '악함'의 차이로 요약되며 노예의 도덕성은 '선함'과 '악함'으로 나아간다. 강자의 선은 강한 의지가 기준이 되며 '선함'은 강하고 힘이 넘치며 고상한 것이고 '악함'은 나약하고 소심하며 미약한 것이다.
반면 약자의 선은 약한자의 처지가 기준이 되며 '선함'은 약한 처지를 견딜 수 있거나 개량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하며 '악함'은 약한 처지의 집단을 불안하게 만드는 강한 의지, 도전, 힘 등이다. 즉, 주인의 도덕성에서의 '선함'과 노예의 도덕성에서의 '악함'은 도덕적 동등성을 지닌다.
힘에의 의지와 초인 사상 (Wille zur Macht und Übermensch) [편집]
니체는 의지가 자신의 존립을 위해 힘을 얻기를 의지하는 것을 힘에의 의지라고 하였다. 여기서 니체는 인간의 힘에의 의지는 일종의 '가식'으로 보았는데, 상황에 따라 일관적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숨기는 것은 인간이 살아남기 위한 힘에의 의지로 보았다. 또한,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도 힘에의 의지로 보았는데, 이는 인간은 진리를 통해 변화무쌍한 자연을 예측가능하게 만들어 변화무쌍한 자연에 대응하고자 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니체는 노예의 도덕에 허우적대지 말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고, 인간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모을 것을 주장했다. 또한 그는 이런 이상적인 사람을 '초인'(Übermensch)이라고 불렀는데, 이 초인이 인류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인종차별주의자였던 그의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다르게 해석하여,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허무주의 (Nihilism) [편집]
사회는 나날이 안정적으로 변하고 문명은 더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더욱 권태로워진다. 점점더 말초적인 쾌락을 원하고 문화는 타락해간다. 니체는 이러한 현상이 허무주의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미 수명이 다한 낡은 가치관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목표를 잃고 방황한다고 보았고,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허무주의로 흐르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새로운 사회를 요구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초인 중심의 사회였다.
신의 부정 [편집]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다. 이는 니체가 보기에 기독교가 힘찬 강한 자(주인)의 도덕을 망치고 순종, 겸손 등 소극적인 것을 미덕으로 하는 약한 자(노예)의 도덕을 강조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몸이 병들고 약한 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기독교는 그의 철학에 있어 적대적이었다. 게다가 그가 보기에 기독교는 약하고 저열한 것들의 기준에 맞추어 인류를 타락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기독교를 비판했으며, 강한 자의 도덕을 갖춘 초인이 인류를 이끌어 가야 한다고 보았다.
평가 [편집]
생전에는 학계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했으나, 사망 이후 유럽의 철학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되고 있다.
니체의 사상은 매우 파격적이고 충격적이기 때문에 엄청난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실제 그를 평하는 데 있어서도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때도 많은데, 일부 기독교 신자들은 맹렬한 비판을 하며, 어떤 철학자들은 니체를 천재적인 철학자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현대 철학사(특히 포스트모더니즘)에 끼친 영향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프로이트나 마르크스 등과 함께 현대 철학을 뒤흔든 철학자로 인정받는다.
흔히 니체를 나치즘과 반유대주의, 인종차별주의의 시초라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런 말이 나온 것은 인종차별주의자였던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니체의 저서들을 왜곡했기 때문이다.[8] 엘리자베스는 흩어졌던 그의 저서들을 모아 일종의 보관서까지 열었으며, 미쳐 있던 니체에게 흰 사제복을 입혀 전시하기도 했다. 게다가 엘리자베스는 히틀러에게 '니체의 초인이란 당신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1961년 《니체》를 출간한 이후 달리 평가되어 오늘날 니체에 대한 오해는 거의 해결되었다. 그리고 실제 니체는 오히려 자국인 독일을 매우 싫어했고 민족주의 또한 매우 혐오했다고 한다.[9]
저작 [편집]
니체의 초기 저작은 《비극의 탄생》이며, 중기저작으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서광》, 《즐거운 학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있으며, 정신병 발병 직전인 1888년에는 《우상의 황혼》, 《반그리스도》, 《도덕의 계보》, 《이 사람을 보라》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 1872년 :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ödie)
- 1873~6년 : 《반시대적 고찰》(Unzeitgemässe Betrachtungen)
- 1873년 : 1부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David Strauss: der Bekenner und der Schriftsteller)
- 1874년 : 2부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Vom Nutzen und Nachtheil der Historie für das Leben)
- 1874년 : 3부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Schopenhauer als Erzieher)
- 1876년 : 4부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in Bayreuth)
- 1878~9년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 1881년 : 《아침놀》(Morgenröte)
- 1882년 :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
- 1883~5년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 1886년 : 《선악의 저편》(Jenseits von Gut und Böse); 《비극의 탄생》,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아침놀》 개정판 서문
- 1887년 : 《즐거운 학문》 개정판 서문; 《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 1888년 : 《바그너의 경우》(Der Fall Wagner), 《우상의 황혼》(Götzen-Dämmerung), 《안티크리스트》(Der Antichrist),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디오니소스 송가》(Dionysos-Dithyramben), 《니체 대 바그너》(Nietzsche contra Wagner)
니체 저작의 판본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니체 저작의 판본입니다.
니체가 쓰러진 뒤 [편집]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1888 ~ 89년 해가 바뀔 무렵 정신적 암흑에 빠졌다. 그의 저작들은 정본이라 할 만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부분적으로 예전 저작들은 여러 출판사에서 여러 판본으로 나와 있었으나, 두 저작은 — 니체가 잘못된 곳들을 지적한 가운데 — 인쇄작업이 진행 중이었고, 아울러 인쇄되지 않은 자료들이 다양한 마무리 수준 상태로 존재했다. 이 인쇄되지 않은 자료는 프란츠 오버베크(Franz Overbeck)가 하인리히 쾨젤리츠(Heinrich Köselitz)(페터 가스트(Peter Gast))와 협의하여 처음으로 수집했다. 이들은 또한 니체의 최종 출판업자인 콘스탄틴 게오르크 나우만(Constantin Georg Naumann)과 함께 계속적인 출판작업을 두고 논의했다. 그리고 1890년 말에 처음으로 파라과이에서 귀향한 니체의 누이 엘리자베트 푀르스터-니체(Elisabeth Förster-Nietzsche)가 가족을 대표하여 논의에 참견했다. 그간에 니체 저술의 판매고가 올랐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1892년 초에 처음으로 전집판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다. 이 전집판은 나우만 출판사에서 간행되었으며, 쾨젤리츠가 이를 담당했다.
1930년 저작권 보호기간의 만료 [편집]
1930년, 니체의 저작권 보호기간이 만료되었다.
작곡 [편집]
니체는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되지 않지만, 13세 무렵부터 20세 무렵에 걸쳐 가곡과 피아노곡을 작곡했다. 그 후 작곡하는 일은 없게 되었지만, 바그너와의 만남을 통해 자극을 받고, 바젤 시절에 몇 개의 곡을 남겼다. 작풍은 전기 낭만파적으로, 슈베르트나 슈만을 연상케 한다. 그가 후에 전혀 작곡을 하지 않게 된 것은, 본업으로 바쁘게 보냈다고 하는 이유 외에, 자신의 작품인 《맨프레드 명상곡》을 한스 폰 뷰로에게 혹평 받은 것이 이유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니체가 작곡가로서 인식되는 일은 전무하지만, 저명한 철학자가 작곡한 작품이라는 이유로 일부 연주가가 녹음하게 되었고, 서서히 그의 '작곡도 하는 철학자'로서의 측면이 밝혀지고 있다. 그의 작품은 모두 가곡이나 피아노곡이지만, 2인 연탄곡 작품 중에는 《맨프레드 명상곡(Manfred-Meditation)》 교향시 《에르마나리히(Ermanarich)》 등, 오케스트라를 염두에 두고 쓰여졌을 것이라 여겨지는 작품도 있다. 또, 오페라의 스케치를 남기고 있는데, 2007년에 지크프리트 마트스가 그의 스케치를 골자로 한 오페라 《코지마(Cosima)》를 작곡했다.
주석 [편집]
- ↑ Kaufmann, Walter, Nietzsche: Philosopher, Psychologist, Antichrist, p.22.
- ↑ a b Schaberg, William, The Nietzsche Can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p.32.
- ↑ a b Schaberg, William, The Nietzsche Can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p.32. 슈트라우스는 신학자이자 철학자로서 헤겔의 제자이었다. 그는 《예수의 생애》라는 책에서 예수 전승이 신화적으로 변형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당시 슈트라우스의 책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지탄을 받았으며, 출간 이후 슈트라우스는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생을 마감해야 했다. 게르트 타이쎈, 아테네 메르츠, 《역사적 예수》, 손성현 옮김, 다산글방, 2001, 32쪽 참고: 《역사적 예수》- 옛 연구.
- ↑ Hecker, Hellmuth: "Nietzsches Staatsangehörigkeit als Rechtsfrage", Neue Juristische Wochenschrift, Jg. 40, 1987, nr. 23, p.1388~1391; and His, Eduard: "Friedrich Nietzsches Heimatlosigkeit", Basler Zeitschrift für Geschichte und Altertumskunde, vol.40, 1941, p.159~186. 도이쎈과 몬티나리를 포함한 일부 저자들은, 니체가 스위스 시민권을 획득했었다는 잘못된 주장을 하기도 했다.
- ↑ ^ A biography of Spir.
- ↑ ^ Stephan Güntzel, "Nietzsche's Geophilosophy", p.85 in: Journal of Nietzsche Studies 25 (Spring 2003),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University Park (Penn State), 2003-10-15; re-published on HyperNietzsche's website (English)/(German)
- ↑ 지만지 선과 악의 저편 책소개
- ↑ 슈테판의 시간여행, 막스 크루제 저
- ↑ 철학, 역사를 만나다.
참고 문헌 [편집]
바깥 고리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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