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족 (종족) [── 族, Sioux, 다코타족] 1800 2009. 5. 3. 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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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코타족 [Dakot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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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족
- 요약
- ⇒ 다코타족
-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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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그레이트 플래인스에 거주하는 평원 인디언부족. 수족(Sioux族)이라고도 한다. 수는 앨곤킨계제속(系諸族)들이 부르는 이름이며, 그들 스스로는 다코타라고 한다. 언어는 수어족(語族)의 수어를 사용하며, 동부의 삼림지대로부터 서부의 미주리강 유역까지 펼쳐지는 7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다. 평원인디언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며, 백인의 침입에 대해서도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1876년 S. 불 등의 인솔로 커스터장군 지휘하의 제7기병대를 전멸시킨 리틀빅혼전투는 유명하다. 또한 1890년 운디드니에서 학살되어, 인디언 반항의 최후를 장식한 것도 다코타족이었다. 생활상은 다른 평원인디언과 기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데, 채집수렵과 간단한 농경을 겸하는 경제생활이 말의 도입과 동시에 들소 사냥에 전면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티피라는 원뿔형 텐트에 거주하며, 밴드, 즉 몇 가족으로 구성된 정치·경제상의 공동집단으로 나뉘어서 생활하고 있는데, 각 밴드는 독립해 있으며, 지도자는 선견지명과 무용(武勇)을 겸비한 개인적인 능력에 따라 선출되었다. 또한 태양춤이라는 고통이 수반되는 종교의례가 중요하다. 현재에도 다코타족은 그 수가 많으며, 인디언 복권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Dakota, 라코타족이라고도 함.
북아메리카의 평원 인디언으로서 수어족(語族)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인디언들의 부족연합.
수족 /활을 만지고 있는 북아메리카 ...
17세기 중반 이전 샌티족은 슈피리어 호 근처에서 줄·콩 등을 채집하고 사슴과 물소를 사냥하거나 카누와 작살을 이용해 고기를 잡아 생활했다. 샌티족은 오지브와족과 오랫동안 계속해서 전쟁을 벌인 결과 미네소타 서부와 남부로 밀려나게 되었다. 테톤족과 얀크톤족은 미네소타 지역을 영원히 떠나 그레이트플레인스(지금의 다코타 남부와 북부)로 이주해야만 했다. 이곳에서 이들은 전통적으로 행하던 농사를 그만두고 평원 인디언의 생활양식을 받아들여 물소 등 큰 동물의 사냥을 주로 하며 이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수족은 다른 평원 인디언과 문화적 속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티피(tepee : 수족어로 '천막집'이라는 뜻)에서 살았다. 남자들은 전쟁에서 보여준 용맹스런 행위로 사회적 지위를 얻었는데, 다른 부족을 습격해서 얻어낸 말과 머리가죽은 용맹함의 증거가 되었다. 신비적 관점에서 제시된 여러 가지 도안이 적으로부터 전사를 보호하기 위해 방패에 그려질 정도로 전투와 초자연주의는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또한 주요 행사인 태양춤 축제를 열었다. 이들의 종교체계에는 우주를 주재하는 4가지 힘이 설정되어 있었고 각각의 힘을 다시 4단계의 서열로 구분했다. 물소의 형상 또한 이들의 종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테톤족에게는 곰이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환각을 통해 얻은 곰의 힘은 병을 고치는 효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샌티족은 전투에 나서기 전 자신의 용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곰사냥 의식을 행했다. 수족 여자들은 베 짜기와 기하학적 문양의 구슬 자수 솜씨가 뛰어났다. 치안유지는 주임무로 물소사냥 감독을 하던 전사집단이 수행했다. 다른 집단들로는 춤·주술·여성 집단들이 있었다.
수족은 전체 평원부족들 가운데 그들의 땅을 침입한 백인에 대해 가장 완강하게 저항했다. 19세기 중반 미시시피 강 서쪽으로 백인 개척자들이 전진해옴에 따라 미국 정부는 수족·쇼쇼니족·샤이엔족·아라파호족 등 서부 인디언들과 1차 라라미 요새조약(1851)을 체결함으로써 인디언 문제의 기선을 제압하고자 했다. 이 조약에 따라 그레이트플레인스 북부 전역에 걸쳐 각 부족의 경계가 정해졌으며, 인디언 지역 내에 요새와 도로가 배치되었다. 1851, 1859년 샌티족은 미네소타에 있는 그들의 땅 대부분을 포기한 뒤 정착농경지가 있는 보호구역을 할당받았다. 그러나 서진(西進)해오는 백인 개척자들의 압력과 함께 조약에 대한 위반행위 때문에 샌티족은 1862년 리틀 크로의 지도하에 유혈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들은 패배했으며, 그후 서쪽의 다코타와 네브래스카 보호구역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유목생활을 하던 테톤족과 얀크톤족의 영토는 미주리 강과 티턴 산맥 사이의 땅과 남쪽의 플랫 강과 북쪽의 옐로스톤 강 사이의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1849년의 골드 러시 이후 점점 백인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수족은 특히 자신들이 가장 아끼는 빅혼 산맥의 사냥터를 가로질러 몬태나 주 보즈먼 행의 파우더 강 도로를 놓고자 하는 정부의 시도에 대해 격분했다. 1865~67년 오글랄라족의 추장 레드클라우드는 수천 명의 수족 용사들을 이끌고 도로건설을 중단시키기 위한 전투를 벌였다. 1866년 12월 21일 추장 하이 백본의 지휘 아래 한 무리의 용사들이 페터먼 학살을 일으켰다. 이 전투중 80명이 넘는 미군이 필카니 요새 근처에서 납치되거나 살해되었다. 결국 미국 정부는 2차 라라미 요새조약을 통해 굴복하게 되었다.
이 조약에서 미국 정부는 보즈먼 도로건설을 중단하는 데 동의하고, 미주리 강 서쪽의 사우스다코타 지역을 수족이 독점할 것을 보장했다. 그러나 1870년대 중엽 사우스다코타의 블랙 구릉에서 황금이 발견되자 수천 명의 광부들이 2차 라라미 요새조약을 무시하면서 수족 보호구역에 몰려들었고, 이 때문에 1876년 또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1876년 6월의 리틀빅혼 전투에서 수족과 샤이엔족의 대규모 분견대가 육군 중령 조지 A. 커스터를 패배시키고, 266명의 부대원들을 전멸시켰다(→ 색인 : 리틀빅혼 전투). 그러나 이러한 영웅적인 인디언의 승리가 이후의 대규모 전투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그해 여름 텅 강 유역에서 3,000여 명의 수족이 앨프레드 H. 테리 장군의 주력부대의 포로가 되었다. 수족은 10월 31일 항복한 뒤 대부분 자신들의 보호구역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시팅 불, 크레이지 호스, 골 등 수족의 추장들은 전사들을 이끌고 보호구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크레이지 호스는 1877년 항복한 뒤 살해되었고, 시팅 불은 캐나다로 도피했다가 1881년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1890~91년 구세주의 도래와 옛 유목사냥 생활로의 회귀, 사자(死者)와의 재결합을 설파하는 고스트 댄스(Ghost Dance)가 수족 사이에서 성행하게 되었다. 이들은 보호구역에 갇혀 사는 동안 혹독한 빈궁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불안정한 평화를 위협한다고 여긴 미국 정부는 주모자를 체포하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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