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쿼이        1800  2009. 5. 3.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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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쿼이족 [Iroquois]
요약
북아메리카 동부 삼림지대에 거주하는 아메리카 인디언.
본문

이 지방의 종족 가운데 가장 조직화되고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한때 세력 범위가 허드슨만()에서 캐롤라이나강(), 코네티컷강에서 미시시피강까지 미쳤다. 형질()은 아메리카 인디언으로서는 키가 크고 근육질이며, 피부는 황색기가 도는 담갈색이다. 모발은 직모()이며 보통 크기의 머리에 코는 큰 매부리코이고 몽골인종과는 다른 점이 많다. 인구는 약 1만 6000으로 알려졌으나 백인과의 혼혈이 많아 정확한 수는 알 수 없다.

현재는 주로 뉴욕주()에 많이 살고 있다. 사회구성은 씨족―포족()―부족()식으로 정비된 조직을 가지고 있고 수렵·어로 외에 옥수수·고구마·콩 등의 재배로 정착농업을 하였다. 각 부족의 사회·경제생활의 최소단위는 개개의 확대가족으로, 이것을 기초로 한 모계씨족 50~150명으로 이루어졌다. 씨족 내의 일을 지휘하는 사람은 나이 든 여성이다. 1개 또는 몇 개의 확대가족이 목조로 된 길다란 집에 살며 모처혼제(), 모계외혼(), 토템씨족제가 행해지고 있다. 일군()의 모계 씨족이 모여 모이어티(반쪽이라는 뜻)를 이루고, 이 모계 모이어티 2개가 합쳐 한 부족을 구성한다. 모이어티는 정치적 기능은 가지지 않으며 경제적·사회적 기능만을 가진다.

부족은 공통적 영역을 가지는 정치적 단위인데 이 부족을 구성하는 여러 씨족의 대표자, 즉 남자 추장들이 모여 회의를 열어 중대한 일을 결정한다. 부족은 자립성을 가지는데, 여러 부족이 공통적인 이해를 가지는 전쟁 등과 같은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서 5부족이 합동하여 이로쿼이 연맹을 조직하고 있다. 이 연맹은 각 부족의 추장 50명으로 이루어진 대추장회의에 의해 운영된다. 현재는 근대화하여 정착농업이나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샤머니즘·가면무도 등의 유습()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종교행사나 제사에서 여자는 남자와 거의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또 종교적인 비밀결사가 발달되었으며 남녀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다.

이로쿼이 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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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쿼이 연방의 깃발은 1980년대에 제작되었으며, 데가나위다(피스메이커)가 통합한 초기 5개 연합을 대표하고 있다.

이로쿼이 연방(Iroquois Confederacy)은 다음의 다섯 오족 연합을 이루었던 북아메리카, 뉴욕 북부의 오족 연합/아메리카 원주민의 그룹을 말한다.:

6번째 그룹인 투스카로라족(Ska Ru ren, 대마를 채집하는 사람들)은 원래의 오족 연합이 구성된 뒤에 참가하였다. 이로쿼이, 이로쿼이족으로 자주 부르지만, 이 연합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Haudenosaunee(롱하우스를 짓는 사람들)로 부른다.

또한, 이로쿼이 연방은 오족 연합(Five Nations), 육족 연합(Six Nations), 롱하우스 민족 등으로도 불린다.


이로쿼이 연맹

미국 식민지시대의 인디언 연맹.

17, 18세기에 북아메리카를 차지하기 위한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에서 전략적인 역할을 했다. '공동주택에 사는 사람들'로 자처하던 이 연맹의 5개 종족은 모호크족·오나이다족·오논다가족·카유가족·세네카족이었다. 1722년 투스카로라족이 합류한 후, 이로쿼이 연맹은 영국인들에게 6개 부족 연합으로 알려졌다. 전통에 따라 휴런족 출신인 데카나위다가 1570~1600년 연맹의 조직을 맡았다. 그는 모호크족과 함께 살던 오논다가족의 추장 히아와타를 설득해서, 연맹을 승인하는 조치로 식인풍습을 버리고 '평화, 시민권력, 공정함, 위대한 법'을 받아들이게 했다고 전해진다. 주로 침략에 공동대항하려는 목적으로 연맹을 맺은 부족들은 씨족과 마을 추장들로 이루어진 공동회의를 통해 뭉쳤는데, 부족마다 투표권이 하나씩 있었고 만장일치제를 원칙으로 했다. 50명의 추장(sachem)으로 이루어진 공동재판소에서 부족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쟁 이외의 모든 문제를 다루었다.

이로쿼이 연맹은 동북부 삼림지대의 다른 인디언 연맹과 달랐다. 우선 조직이 잘 되어 있었고, 입장이 더 명확했으며,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또한 지도자를 뽑고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의 의식은 세심하고 정성스러웠다. 식민정부를 설득해서 공동협상을 할 때도 의식은 행했으며, 뛰어난 개인보다 의식을 통한 승인에 바탕을 두는 정치적인 지혜의 전통을 소중히 했다. 행정적인 통제가 없었기 때문에 부족들이 항상 일치된 행동은 하지 못했으나, 부족 내부가 안정되어 있어 이룰 수 있었던 전쟁에서의 눈부신 승리를 통해 그러한 부족감이 메꾸어졌다.

연맹이 형성되던 1600년 무렵 5개 종족은 뉴욕 주 중부와 북부에 집중해 살았는데, 네덜란드인과의 교역을 통해 총을 공급받던 이웃 휴런족·마히칸족에 정복되지 않고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1628년 모호크족이 외딴 삼림지역에서 허드슨 계곡과 뉴잉글랜드로 진출하여 마히칸족을 공격하고 다른 부족들을 위협해 물건과 화폐로 사용하던 조가비 염주를 바치게 했다. 모호크족은 영국인·네덜란드인 등과의 교역을 통해 비버 가죽을 주는 대신 화기(火器)를 사들였는데, 비버의 수가 감소하자 더 많은 비버를 확보하기 위해 연맹에 속한 부족들을 끌어들여 멀리 떨어져 살던 부족들과 전쟁을 일으키게 했다. 1648~56년 이로쿼이 연맹은 서쪽의 휴런족·티오논타티족·뉴트럴족·이리족과 싸워 승리했다. 1675년 안다스트족이 이로쿼이 연맹에 정복되었으며, 그후 안다스트족과 동맹을 맺었던 동부 수족에 속한 여러 부족들이 공격을 받았다. 1750년대가 되자 피에몬테에 사는 부족들 대부분이 이미 연맹에 정복·흡수·전멸되었다. 이로쿼이족은 17세기 후반 프랑스인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프랑스인들은 이로쿼이족의 적인 알공킨족과 휴런족의 동맹군이었기 때문에, 1648~50년 이로쿼이족은 휴런 연맹을 공격한 뒤 이후 15년 동안 뉴프랑스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후 1666~87년에 연이은 프랑스 원정군의 공격으로 일시적으로 주춤했으나, 1687년 드농빌 후작의 공격을 받은 후 이로쿼이족은 다시 프랑스 영토 한가운데로 쳐들어가 1689년 몬트리올 부근 러신에서 프랑스군을 섬멸했다. 이 전쟁은 1693~96년 뉴프랑스 총독 프롱트나크 백작이 이로쿼이족과의 계속적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마침내 끝났다.

미국 독립전쟁 전까지 이로쿼이 연맹은 올버니에서 오대호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수면 높이의 이 통행로에 프랑스인들이 정착하지 못하도록 막거나 네덜란드인·영국인 등의 통행을 봉쇄했다. 18세기에도 이로쿼이 연맹에는 이들의 적과 동맹을 맺은 프랑스인들이 가장 큰 적이었다. 이로쿼이 연맹은 올버니에 사는 영국인들로부터 유럽 상품(몬트리올보다 올버니에서 값이 더 쌌음)을 공급받았기 때문에 올버니는 절대로 공격하지 않았다. 프랑스인과 영국인 사이에서 그들이 독립을 유지한 것은 겨우 1만 2,000명의 주민 중 2,200명밖에 전투에 동원할 수 없었던 원주민으로서는 대단한 성과였다. 미국 독립전쟁 동안 이로쿼이 연맹 사이에는 불화가 생겼다. 오나이다족과 투스카로라족은 미국을 지지한 반면, 모호크족의 조지프 브란트 추장이 주도하던 나머지 부족들은 나이애가라 지역의 영국인들을 위해 싸우면서, 미국인들이 사는 여러 외딴 마을에서 많은 주민들을 학살했다. 1779년 이로쿼이 연맹은 지금의 뉴욕 주 앨마이라 부근에서 미국의 존 설리번 중장이 이끌고 온 4,000명의 원정군에게 패함으로써 사기가 크게 꺾였을 뿐만 아니라, 밭·과수원·곡창지대까지 모두 파괴당했다. 1784년의 스탠윅스 요새 2차 조약에서 패배를 인정한 후 이로쿼이 연맹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10년 후 뉴욕 주 카넌데이구아에서 맺은 조약을 통해 이로쿼이 연맹과 미국정부는 각자 이미 양도했거나 보유하고 있는 영토에서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6개 부족 가운데 오논다가족·세네카족·투스카로라족은 뉴욕에 남아 결국 인디언 보호구역에 정착했으며, 모호크족과 카유가족은 캐나다로 갔다. 1세대 후 오나이다족은 위스콘신으로 갔다.


이로쿼이족
넓게는 이로쿼이어에 속한 언어를 쓰는 북아메리카 인디언 부족들을 말한다. 특히 카유가족·체로키족·휴런족·모호크족·오나이다족·오논다가족·세네카족·투스카로라족이 포함된다. 이로쿼이어를 쓰는 부족들은 오대호 하류 주변의 광활한 영토에서 살았으나, 남동쪽의 저지대와 애팔래치아 고원지대에 사는 부족들도 있었다. 이 지역에는 이른바 동부 삼림지대 문화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반(半)정착민인 이로쿼이족은 농사를 짓고 필요에 따라 울타리를 친 마을에서 살았는데, 가옥은 여러 가족이 함께 사는 공동주택이었다. 이 공동주택의 지붕을 이을 때나 접시·통·카누 등을 만들 때 느릅나무 껍질을 사용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사회·경제 단위였다. 남자들은 집단적으로 모여 집을 짓고 울타리를 세웠으며, 고기잡이·사냥·여행·교역·도박을 했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고 전쟁에 참여했다. 여자들은 마을 주변에서 여자 감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옥수수·콩·호박을 재배했다. 추수 후 가족이 무리를 이루어 깊은 숲속에서 야영을 하며 사냥을 하다가 한겨울이 되면 집으로 돌아왔다. 봄이 되면 가까운 강이나 호수로 나가 떼지어 다니는 물고기를 잡았다. 공동주택에 사는 가족은 이로쿼이족 사회의 상징이었다. 가족이 모여 씨족을 이루었으며, 씨족이 모여 반족(半族)을, 반족이 모여 부족을, 부족이 모여 연맹을 이루었다. 친족관계와 사는 지역이 정치생활의 바탕이었으며, 공동체마다 추장이나 추장단을 지도하는 성인 남자들의 회의가 있었다. 모임을 즐긴 이로쿼이족은 많은 시간을 회의하는 데 보냈다. 지역, 성(性), 연령, 회의에서 다루게 될 특별한 문제에 따라 회의를 주관할 집단이 결정되었으며, 집단마다 의견의 일치를 얻을 수 있는 자체적인 규약과 방법이 있었다. 이들의 정교한 우주론은 하늘에서 떨어진 한 여자에 관한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었는데, 대홍수와 추락이라는 모티프가 중요한 특징이었다. 이로쿼이족처럼 초자연의 호전성과 잔혹함·마법·고문·식인풍습에 몰두한 부족도 없었다. 그러나 신화에는 이와는 다르게 때때로 아름다운 별에 관한 신화와 내세(來世) 여행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공식적인 종교행사는 6번 치러지는 농사 축제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오랫동안 감사 기도를 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조약 체결과 같은 정치활동을 승인하는 의식도 있었는데, 대부분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들은 전쟁이 체질화되어 있었으며, 개인의 명예는 자존심이 달린 문제였다. 노인들은 젊은 전사들을 다룰 수 없다고 늘 불평했다. 전쟁으로 인구가 줄었기 때문에 포로를 잡으면 노예로 삼거나 죽은 친척 대신 양자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아서 17세기말에는 이들이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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