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건국 (1871년)        1800  2009. 5. 4.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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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으로 독일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진 지는 얼마 안 되었다. 이탈리아보다도 늦게 만들어진 나라이다.

독일의 전신은 프로이센인데 신성로마제국(제국이라는 표현이 적당할까)이라는 나라는 오스트리아의 전신이다.

즉 독일은 프로이센이라는 나라가 신성로마와 싸워서 영토를 확장시켜 세워진 나라라 할 수 있다.

그 일을 완수한 인물이 프로이센의 총리 비스마르크였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을 건국한 후 독일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1871 ~ 1890)

대부분의 영토를 프로이센에게 빼았긴 신성로마는 영토가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아 오스트리아 본토로 쪼그라들었다. 오스트리아로 쪼그라들었지만 오스트리아는 계속 제국의 지위를 유지했다. 다시 말하지만 중세이후 황제라는 명칭은 국력과 상관없이 기독교 위계서열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황제는 계속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비록 땅도 코딱지만하고 국력도 형편없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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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독일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도를 억압하기 위하여 1872년 이후 ‘문화투쟁(Kulturkampf)’을 벌여 왔으나 실패하였고 사회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자진압법(1878)을 제정하는 한편, 슈몰러 등의 강단()사회주의 사상을 도입하여 사고·질병·양로보험 등의 사회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럼에도 사회주의 세력은 증가하고 결국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문화투쟁 [, Kulturkampf]
요약
1872년 이래 독일 가톨릭교회와 국가 사이의 투쟁.
본문

비스마르크는 제국통일() 이후 유력한 반정부당()인 중앙당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중앙당은 가톨릭정당이었기 때문에 의회에서의 정쟁()은 마침내 교회와 국가의 다툼으로 발전하였다. 문제는 우선 학교관리에 관한 일로 발단되었다. 즉, 비스마르크는 1871년의 교단조항()에 이어 1872년 1월 학교감독법안을 성립시키고, 교육을 교회로부터 국가에 넘기도록 하였다. 교회측에서는 이에 분노하여 양자의 싸움이 격화되었다.

비스마르크는 1873년 유명한 ‘5월법’을 공포하고 세속적인 일에 대한 교회의 간섭을 금지하고, 성직자의 임면()감독권을 국가에 이양할 것을 규정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탄압이 가하여짐에 따라 교회의 저항도 격렬해져 드디어 사회민주당 세력의 확대와 더불어 비스마르크도 타협할 수밖에 없게 되어 1880년 문화투쟁은 종식하였다.


강단사회주의 [, Kathedersozialismus]
요약
186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 독일 경제학의 주류를 이루었던 신역사학파의 경제학자들이 주창한 사회정책론에 붙인 명칭.
본문

독일에서는 산업혁명 후 자본주의의 성숙과 함께, 산업 기계화로 인한 실업(), 분배의 불균형, 재래식 수공업적 부업의 몰락 등의 사회문제가 격화하였다. 이러한 현실을 눈앞에 두고, 독일의 신역사학파 사람들은 고전학파자유방임론()에 반대하고, 국가의 입법적 간섭에 의한 사회개량을 추진하여 사회문제 해결을 시도했으며, 동시에 이렇게 함으로써 노동자계급 사이에 사회주의가 성장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G.슈몰러를 중심으로 사회정책학회를 창설하여(1872) 당시의 비스마르크식() 사회정책을 위한 윤리적 기초를 제공하였으며, 또한 교단을 통하여 활발하게 사회개량을 위한 계몽을 담당하였다.이 때문에 그들의 사회정책론은 당시 자유주의자에 의하여 강단사회주의라 불렸다.

그들은 당시 사회문제가 가지는 다양성()에 따라서 여러 사회정책을 제창하였다. 예컨대, 몰락해 가는 중산적() 수공업자의 구제와 육성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슈몰러 등의 중앙파(), 조세정책을 통하여 분배의 불균형을 시정하려고 하는 A.H.G.바그너국가주의, 노동조합의 보호 육성을 급선무로 보는 L.J.브렌타노자유주의 등이 있었으며, 각자의 입장에서 사회정책 발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국내시장이 좁아서 자연히 해외시장 획득에 나섰던 독일 독점자본영국과의 경쟁에 이기기 위하여 생산가격의 저하와 산업에 따른 사회정책적 부담을 제거하도록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또한 노동자 사이에 본래의 사회주의가 강력한 세력을 펴게 되자, 강단사회주의자의 사회정책론에 강력히 반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강단사회주의는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역사학파 [, historische Schule]
요약
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경제학파.
본문
F.리스트선구자로 하여, W.G.로셔, K.G.크니스, B.힐데브란트 등의 구()역사학파와, G.슈몰러, L.브렌타노, A.H.바그너 등의 신()역사학파로 대별된다. 역사학파는 영국자본주의가 선진적 지위를 이용하여 후진자본주의인 독일에 침투해 오는 것을 막고 독일이 자국의 유치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탄생되었다.

구역사학파는 A.스미스나 영국 고전학파의 자유주의 경제이론이 후진국인 독일에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편타당적이고 추상적인 경제법칙을 부정하고, 경제현상이나 국민경제는 자연적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나라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라 하여 역사적 연구나 통계적 조사를 중시하였다. 또한 각각의 경제발전단계에는 상이한 경제정책이 있다고 판단하고, 독일 국내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보호무역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여 고전학파의 자유무역주의를 배척하였다.

한편, 신역사학파는 사회윤리적 입장에서 노사협조이론사회정책론 등을 내세워 경제학사 및 사회정책론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역사를 지나치게 존중한 나머지 이론을 경시하는 경향이 심해졌다. 그러나 후에 C.멩거, W.좀바르트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아 유명한 방법논쟁이 전개되었다. 신역사학파는 사회정책학회파 또는 강단()사회주의자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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