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극우 격파 2        좋은 말씀  2012. 6. 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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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랑 생각이 같네요.

 

히틀러는 '유태인'을 죽였기에 욕 먹는 것입니다.

 

포르투갈, 벨기에, 스페인, 미국 처럼 힘없는 나라에 처들어가서 원주민을 학살했다면

 

히틀러는 욕을 안 먹었을 것입니다.

 

히틀러는 종교적 이유때문에 욕을 먹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이끄는 젊고 참신한 당, 즉, 나치는, 1933년에 정권을 잡고 1936년에 800만에 이르는 실업자 모두 구제,

1938년에... 4% GNP성장... ●
그당시에 800만 실업자 모두 구제!GNP4% 성장이라... 딴나라 대통령들이 원했던것이고 부러워 했을 거 아닐까요..? 실없자 800만 모두 구제라.. 참 울나라랑 비교하면 히틀러의 벽은 더욱이 높아보이는 군요.(히틀러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닙니다)

  

히틀러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그가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완벽한 악인도, 미치광이 전쟁광도 아니라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당시 시대적으로 아주 흔해 빠진 정치지도차일 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나치 빠돌이니 하는 비난을 감수할 줄 알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히틀러가 선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당시 정치 지도자들의 수준이 모두 그 모양 그 꼴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일 예로 유태인 학살을 히틀러의 비인간적인 면으로 제일 먼저 꼽는 사람이 많지만, 

 

 

테오도르 루즈벨트가 인디언 학살을 옹호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는 사실에는 무지합니다.(경제의 신 프랭클린 루즈벨트 아닙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그리스도교를 믿지않았습니다)

 

또한 히틀러가 비밀경찰을 운영하여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죽였다고 비난하지만,

처칠은 아일랜드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서 일요일에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모인 아일랜드 민중을 향해 탱크를 동원하여 기관총을 난사시킨 인물입니다.

 

뭐 프랑스 드골의 수뢰 행위는 너무 유명해서 말할 필요도 없고......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지만 도토리 키재기인 당시 연합국 지도자들이 히틀러를 희생양 삼아서 자신들의 악행은 감추는 꼬라지가 보기 싫어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뭐 요즘도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을 기습했다는 개도 안 웃을 거짓말을 일삼는 영미권의 역사 다큐를 믿는다면야 할말은 없습니다만...

 

 

 
 [상식의 오류] 레지스탕스는 대중운동이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는 항상 소수와 관련된 일에 불과했다.오늘날 프랑스 도처에는 수없이 많은 기념비와 ‘레지스탕스 박물관’이 있지만 당시 프랑스 국민은 거의 대부분 독일 점령군에게 잘 적응하고 있었다.유럽에서 독일군에 의해 점령된 나라들 가운데 프랑스만큼 기꺼운 마음으로 나치에게 많은 도움을 준 나라도 없을 정도였다. 경제활동도 활발히 이뤄졌고 남자들은 더 이상 전쟁터에서 싸울 필요가 없었다.1941년부터 1944년 사이에 프랑스에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의 책이 출간되고 있었다.적극적인 레지스탕스 대원의 수는 5만명을 넘지 못해 프랑스 전체 인구 가운데 약 1,000분의 1밖에 안됐다.독일의 패전이 불 보듯 뻔한 1944년에도 프랑스에서는 열성적 대중 저항운동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여기 세계에 유태인 학살과 이민족에 대한 학살에 대한 태도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를린=연합뉴스) 최병국 특파원=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유례없는 어두 운 과거의 짐을 지고 있는 독일이 1백년 전 아프리카에서 벌인 잔혹한 식민 통치와 인종학살이라는 또다른 치욕의 역사 때문에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아프리카 나미비아를 방문 중인 하이데마리 비초랙-초일 독일 대외원조개발부 장관은 13일 독일 대사관에서 나미비아 헤레로 부족 대표들과 만나 "독일은 헤레로 부족에게 특별한 책임이 있다"며 과거 식민 시절 잘못을 사과했다.

비초렉-초일 장관은 "독일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었으며, 이제는 과거의 장벽을 부수고 화해할 때"라고 말하면서 헤레로 부족이 미국 법정에 독일 정부와 기업을 상 대로 제기한 손배배상 소송 취하를 요구했다.

장관은 이날 대화가 `건설적이고 유익했다'고 밝혔으며, 볼프강 마싱 나미비아 주재 대사는 이날 만남이 `역사적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헤레로 부족과 독일 인권단체들은 이날 대화가 `진일보한 것'이기는 하 지만 여전히 화해에 앞선 조치로는 미흡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과의 내용도 물론이지만 무엇 보다 비초렉-초일 장관이 헤레로 부족에 대한 손해배상에 대해서는 거부했기 때문이다.

헤레로 부족과 국제 인권단체와 역사가들은 유대인 대학살 보다 훨씬 앞서 일어 난 `독일인에 의한 최초의 인종 대량학살'인 이 사건이 제대로 조명받거나 정당한 보상이 이뤄지지 못하고 주장해왔다.

지난 1880∼1915년 나미비아를 지배한 빌헬름 2세 황제 치하의 독일제국은 1904 년 1월12일 나미비아 수도 빈 트후크 북쪽 70㎞ 지점의 오카한자에서 헤레로족과 나 마족이 일으킨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만 명을 학살했다.

당시 황제의 명령을 받은 독일 점령군 사령관은 "독일 영토 내에 있는 모든 헤 레로족들은 총이나 토지 소지 여부 등에 관계없이 총살하라"고 지시한 뒤 1907년 까 지 3년 동안 추적, 학살작업을 계속했다.

독일군은 총과 칼로만 살육한 것이 아니었으며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우물에 독 을 풀었다. 사막으로 쫓겨난 헤레로족들은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한 채 죽어갔다.

독일의 인권단체 `위협받는 민중을 위한 모임(GfbV)'은 올해 초 낸 보고서에서 "독일인들이 저지른 최초의 `인종학살'에 의해 약 7만5천명이 사망했으며 많은 수가 국외로 탈출해야 했다"고 밝혔다.

GfbV는"헤레로족의 봉기로 시작된 당시 나미비아인들의 저항은 권리를 박탈당하 고 독일 이주민에게 땅을 빼앗긴 유목민들의 생존권 투쟁이었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이 사건이 유대인 학살 및 보상과는 다른 문제라고 이를 반 박하면서공식 사과와 보상 요구를 거부해왔다.

대신에 나미비아 정부에 대한 경제원조를 해왔다. 지난 1990년 이후 원조액은 5 억유로이며, 2003 년과 2004년에는 원조규모가 2천300만유로로 줄었다.

반면 헤레로 부족은 명확한 사과와 나미비아 내에서 소수 인종인 자신들에 대한 직접 배상을 요구했다. 결국 헤레로족 후손들은 독일 정부와 당시 식민정책으로 이 득을 본 독일 기업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미국 법정에 제출했다.

이와 관련해 법률 전문가들은 헤레로부족의 승소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고있으 나 인권단체들은 "독일 정부는 이 소송을 자신들의 범죄행위에 대해 값싼 변명을 하 는 기회로 삼지말라"며 배상책임 인정을 요구하고 있다.

인권단체들은 또 최근 나미비아에서도 짐바브웨에서 처럼 식민통치의 유산으로 인해 토지를 둘러싼 분쟁이 격화될 우려가 있다면서 독일 정부는 이와 관련해 당시 피해자들의 후손을 돕기 위한 노력을 크게 강화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현재 남은 헤레로족과 나마족은 12만2천명과 6만1천명으로 나미비아 총인구의 약 10%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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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병들이 길고 짧은 창을 들고 '살인의 추억'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발이 닿는 곳곳마다 보이는 족족 노인, 어린이, 임산부 등 무자비하게 죽였다.

그들은 사람들을 죽이는 걸 내기를 걸고 경쟁하듯이 마치 개미죽이는 듯이 미성년자 관람불가 딱지로 사람들을 거시기했다.

꼬꼬마애덜은  같은 모습으로 잡아 땅바닥에 -삐 해서 - 삐 했다. 혹은 콜라병에 개미들을 쓸어담아 강물에 던져 떠내려가는 것을 돌멩이로 쏴 박살내는 것처럼, 아이를 던져, 살고 싶으면 엄마 뱃속에서 연습하던 것처럼

하라고 했다.

 이것도 지겨우면 에수와 그 제자를 기린다고 교수대를 만들어 한꺼번에 13명을 자린고비의 굴비로 만들고 바둥거릴 때

불 태워버리기도 했다. 그 밖에도 쇠를 달구어 인디언들을 숯불구이 바비큐로 만들었다. 이러한 만행은 7.1채널로 생생하게 울려퍼졌고, 이에 스페인인들은 음량조절을 위해 사람들의 목을 조르게 하거나 입에 콩을 집어넣어 음량을 조절하였다.

이 산지옥을 피하기 위해 도망친 인디언은 스페인인이 풀어논 개에 의해 물려 죽었다.

 물론 이러한 참상을 피하기 위해 인디언들은 스페인인이 오면 극진한 대접을 했지만, 이 악마같은 스페인인들은 그 자리에서  인디언 3,000명을 이유 없이 죽였다.

 그리고는 인디언들에게 우리가 오는데, 환영식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저항하거나 도망가면 모조리 죽인다고 방송을 했다.

이에 인디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죽을 자유였으니, 일가족이 함께 지옥같은 세상을 함께 가거나, 마을 전체가 단체로 집단자살을 하였다.

스페인 관리들은 300명의 인디언을 받으면 단 3개월만에 30명만이 살아남는 재주를 보였고, 인원이 충당되면 그만큼 그들을 죽이는 놀라운 능력을 보였다. 또한 단 4달동안 인디언의 아이 6,000명이 죽는 것을 보았는데, 이들의 부모가 모두

아오지 광산에 끌려갔기 때문이다.

 

가톨릭 선교사들이 나서 학살과 사원 파괴의 만행을 저질렀고요

 

스페인이 과거의 일을 참회하기 위해 가톨릭 인구가 줄고 있다는군요. 다행입니다. 하지만 반성없는 꼴통 천주개독 포르투갈..

 

 

청교도들의 아메리카 원주민 살육

 

북미 원주민의 멸망

 




몇 년 전 미국에서 라스베가스를 지나고 모하비 사막을 거쳐 나바호 지역을 지난 일이 있다. 길
가에 덩그러니 놓인 한 식품점에 들렀는데 물건도 별로 없어 보이고 점원들만 서성거리고 있었
다. 그들은 바로 우리가 인디언이라 부르는 원주민의 후예들이었다. 검고 퉁퉁한 얼굴에 활짝 웃
으면 누런 이가 보이는 것이 영락없이 1950년대나 60년대 분 바르지 않은 우리 시골의 당고모 같
은 이도 있었다.

이주민의 쇄도, 땅에 대한 욕심 그리고 충돌
실제로 북미원주민들은 빙하기가 끝날 무렵인 1만4천년 전 시베리아와 북아메리카가 붙어있을
때 지금의 베링 해협을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 대륙의 원주민들은 백인들이 그 땅에
발을 디디기 이전에 원시의 에덴 같은 땅에서 그들만의 고유하고 온전한 삶을 이어왔다. 어느 누
구의 손도 타지 않은 이런 무구한 상태는 15세기 후추와 황금을 얻기 위해 인도로 가는 길을 찾
아 나선 탐험가들의 발길이 미치면서 깨어졌다. 그 뒤를 이어 유럽인들은 ‘신대륙’을 향해 대
서양을 건너오기 시작했다. 이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한 이유로 맨 먼저 내세우는 것이 종교의 자
유이지만 그것은 여러 동기 중의 하나일 뿐이다. 원주민들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무작정 달려든 이 창백한 얼굴의 이방인들을 적대하지 않고 우호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이주
민들에게 주거지와 먹을 것을 제공하고 땅도 떼어주었다. 그러나 이주민들은 끊임없이 밀려오고
땅에 대한 욕구가 근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한 충돌과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여기저기서 간헐적으로 터진 충돌 가운데에서 포카노켓의 메타콤이 일으킨 전쟁은 가장 규모가
큰 본격적인 전쟁이었다. 메타콤은 오랫동안 내러갠싯 족을 비롯한 동부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1675년 오만무례한 백인들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켰다. 여러 달 동안 결사적인 전투가 계속되었지
만 백인들의 엄청난 화력을 당할 수 없었다. 그는 전사들과 친척들을 잃고 아들과 아내까지 적에
게 포박되어 홀로 남았지만 삼림이나 늪을 뚫고 돌아다니며 배반한 부하의 총에 맞아 사살될 때
까지 무릎을 꿇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그에게 마지막 도피처를 제공한 내러갠싯 족의 대추장인
카노체트도 항복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최후의 항전에서 포카세트의 웨타모 여왕도 강
을 건너다가 죽음을 당했다. 백인들은 여왕의 목을 잘라 포로가 된 부하들의 애가 끊어지도록 기
둥에 매달아 전시했다. ‘립 반 윙클’이라는 이야기로 유명한 작가 워싱턴 어빙이 「포카노켓
의 필립」이라는 제목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러한 정경은 백인들이 원주민을 다루는 일
반적인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휴지조각이 되기 일쑤인 평화조약
이주의 물결은 계속 이어졌다. 특히 1830년대 유럽에 7년여의 대기근이 들자 굶주린 세궁민들은
도제계약 노동자로 신대륙에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한편 1861년에 일어난 미국의 남북전쟁
에서 북군이 승리하자 미합중국의 헤게모니는 북부에 돌아갔다. 갈등을 봉합한 미합중국의 시선
이 이제 아직 미개척지로 남아 있는 서부로 돌려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은 이미 프
랑스의 나폴레옹에게 루이지애나를 매입하고 멕시코와 싸워 플로리다와 캘리포니아 그리고 텍사
스를 미국의 영토로 편입한 뒤였다. 땅에 대한 미국인의 욕망이 광활한 서부를 내버려둘 리 없었
다. 게다가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자 서부로의 이주는 도화선에 불을 당긴 격이 되
었다. 미대륙 분수계인 콜로라도 산맥에서도 금이 발견되자 골드러시는 중서부 전지역으로 확대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 지역을 점하고 있던 원주민의 생존과 존립이 핵심적인 문제로 떠올랐다. 이 당
시 미 중서부 지역에는 네브래스카의 원주민 성소인 ‘검은 언덕’을 중심으로 가장 수가 많고
강대했던 수우 족이 거주하고 있었고 아라파호 족과 샤이엔 족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 록
키 산맥에는 산악부족인 유트 족이 살고 그 서쪽에 네즈페르세 족이 있었다. 아칸소 강 남쪽에
는 카이오와 족과 코만치 족 그리고 남부 샤이엔 족이 와서 거주했다. 남서부의 애리조나에는 아
파치 족이 자리 잡고 뉴멕시코 북쪽에는 나바호 족이 있었다.
어빙이 그려낸 비극적 일화는 1860∼1890년에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백인들은 원주민들과 수많
은 평화조약을 맺었지만 그런 조약들은 그들의 이득이나 편의에 따라 휴지조각처럼 폐기되기 일
쑤였다. 이주민들이 침범해 들어와 자신들을 몰아내려 했기 때문에 땅과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선 싸움. 일방적으로 쫓기고 몰살당하는 것이었으니 전쟁이나 전투라 할 것도 없
었다. 그러니 이들이 당하는 참상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 중 악명 높았던 샌드 크리크의
학살 장면을 혼혈인 로버트 벤트는 이렇게 전한다.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무차
별 살육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본 죽은 사람은 모두 머리가죽이 벗겨져 있었으며 한
임신한 여자는 배가 갈라져 있었는데 태아가 끄집어내져 있었다. 흰영양의 시체는 성기가 잘려
져 있었다. 나는 한 미군이 그걸 가지고 담배쌈지를 만들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직접 전
투에 참가한 미군 제임스 코너 중위도 그 말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나는 한 녀석이 여자의
성기를 잘라 그것을 막대기에 걸어 전시하겠다고 떠벌리는 것을 들었다. 그 녀석은 인디언의 손
가락에 끼어 있는 반지를 빼내기 위해 손가락을 잘라냈다… 많은 병사들이 여자의 성기를 잘라
말안장에 걸치고 다니거나 모자 위에 꽂고 돌아다녔다.”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원주민들도 공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백인들은 원주민들을 이간시키고
모반을 부추겼으며 그들을 용병으로 고용해 다른 부족을 공격하는 데 정찰대나 수색대로 이용했
다. 이런 식으로 학살을 당하고 삶의 터전이 파괴된 원주민들은 미 정책 담당자들의 주거지역정
책에 의해 고향에서 수천리 떨어진 유폐지역으로 끌려갔고, 혹은 국경을 넘어 캐나다와 멕시코
로 도피하기도 했지만 추격의 발길은 집요했다.

한 민족의 꿈이 거기 죽어 있다
이주의 물결을 막을 수 없는 한 원주민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
다. 그러나 대지는 무한하며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고 믿고 있던 이들이 그들의 땅을 나누
어 주었듯이, 전제적인 폭압이나 빈곤으로 미지의 대륙으로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주민들도
원주민들과 최소한도의 공존의 길을 찾았더라면
이런 무도하고 반인륜적인 행위는 범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이런 점은 근본적으로 백인들이 그들과 다른 인종들을 어떤 식으로 보고 있었던가와 관련이 깊
다. 신대륙에 맨 처음 당도한 콜럼버스는 원주민들을 ‘고상한 야만인’으로 보았다. 1862년에
나바호 족을 몰아냈던 북부군의 칼턴 장군에게 원주민은 ‘산 속을 달리는 늑대’이므로 사냥을
해 없애버려야 할 짐승이었다. 다코타의 한 지방신문은 인디언을 ‘여물통의 개’로 부르기도 했
다.
1877년 1월 퐁카 족의 추장 선곰이 500마일 떨어진 주거지역으로 강제로 이주당했다가 죽은 아들
을 고향에 묻기 위해 떠났다. 길을 가는 도중 관을 싣고 가던 그의 일행은 오마하에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재판의 주요한 논지는 선곰이 ‘사람’이냐 아니냐였다. 그는 다행히 원
주민의 곤경에 공감하는 소수의 백인들의 도움으로 원주민도 사람이므로 이주의 권한이 있다는
판결을 받아 석방이 되었다.
이미 흑인들을 짐승같이 노예로 부리고 있던 오만하고 비인도적인 백인들에게 원주민이 사람인
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청교도적인 더 많은 부를 소유하려는 욕망, 자신의 이득만을 좇는
이런 배타적 야망은 소위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주의로 극명히 호도되어 있다. 그것은 백인들이 신대륙을 다스리도록 운명 지
워져 있으며 지배민족으로서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원주민과
평화조약을 맺는 미 정부대표단에 목사나 주교, 선교사들이 참여했고 그들이 다른 누구 못지 않
게 이들을 감언이설로 속이고 그들의 땅을 갈취하는 데 앞장섰다는 사실도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점에서 백인으로 당대의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모았던 영향력 있는 소설가인 어빙
이 인디언의 참경을 있는 그대로 절절하게 묘사한 것은 그 자체가 충격적일 뿐만 아니라 그런 적
나라한 언급은 어느 누구의 글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전무후무하다.
이러한 허울좋은 명분과 무자비한 강압을 앞세운 백인들의 진군 앞에서 원주민들은 그들이 사냥
하던 들소와 영양처럼 스러져갔다. 검은 사슴의 술회이다. “그 당시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이 끝
장났는가를 모르고 있었다. 이제 나이 들어 높은 언덕에 올라 돌아보니 학살당한 여인네들과 아
이들의 시체가 굽이도는 계곡을 따라 겹겹이 쌓이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게 보인다. 나는 또
한가지가 그 피묻은 진흙 속에 죽어서 눈보라 속에 묻혀 있는 것을 본다. 한 민족의 꿈이 거기
죽어 있다. 그건 아름다운 꿈이었다. 이젠 사람간의 연줄은 끊어지고 흩어져 버렸다. 중심이라
곤 없고 신선했던 수풀은 말라죽었다.”
백인들의 출현은 그야말로 그 자체가 원주민들에게는 저주이며 재앙이었다. 자신들의 땅에 복 받
고 살아온 만년 이상의 세월에 비한다면 한순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부족이 멸족
을 당했고 살아남은 소수의 원주민들은 여전한 차별과 억압으로 미국인들 가운데 최저의 생활을
구차하게 감내하며 살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지금의 미국땅은 인다안들이 수만년 전부터 살아온 그야말로 지상낙원이었다. 그런데 1490년 유럽에서 컬럼버스라는 친구가 와서는 자기가 신대륙을 발견하였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신대륙에서 많은 금은보화를 얻을 것으로 착각하고 항해를 한 것이다. 그는 아메리카에 도착하여 그런 금은보화가 원주민에게 많이 없다는데에 크게 실망 하였다. 그러나 그래도 주위에 보이는 원주민의 귀금속은 모조리 약탈하여 유럽으로 가져갔고 그후에 몇번 다시 노략질을 위하여 신대륙을 찾아왔지만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고 말년에는 국가로부터의 지원도 끊어지자 술과 인디언에게서 얻은 병 매독으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그후 1500년대 말 메이훌라우어호를 타고 온 청교도를 시작으로 북미 대륙으로 침입해온 기독교도들은 개척이라는 미명하여 공개적으로 인디안 사냥과 학살을 시작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맨처음와서 추운 겨울에 얼어 죽으로 하는 것을 보고 인디안들이 옷과 음식을 주고 보호해주었는데 그들은 기운을 차리자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이다. 그들은 인디안 남자를 모두 학살하고 여자는 그들의 성의 노리개로 삼아버렸다.

이러한 만행은 특히 스페인이 침략한 중남미에서 더욱 심하였으며 그결과 오늘날 중남미에는 순수한 인디안은 거의 없고 메스티족 (인디안 여자 + 스페인 남자 강간) 물라트족 (인디안 여자 + 흑인남자)등의 혼혈족들만 남게 되었다. 한마디로 민족의 씨가 마르고 멸종을 당한것이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자. 만일 컬럼버스가 조선국에 상륙하여 자기가 새로운 땅을 발견하였다고 헛소리하고 그뒤를 이어온 기독교 이민자들이 우리의 남정내들을 모두 학살하고 우리 아녀자들을 겁탈하여 오늘날 한국에는 혼혈족만 남아 있다면 이것이 과연 진정한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하는 짓이란 말인가? 또 그들이 믿는 신 야훼가 정말 자비와 사랑의 신이란 말인가?

그런데 오늘의 한국에서의 현실은 이와 같은 아녀자에 대한 겁탈은 없다 하더라도 수많은 한국 국민들이 기독교의 배타성, 잔인성을 모르고 무조건 야훼 하나님만이 진정한 하나님만이라 외치고 그들의 두뇌는 야훼 사상으로 완전히 세뇌되어 있으니 기독교인에게 멸종당한 인디안보다 몇배 더 심각한 지경이 되었다고 볼수있다.

육제을 빼앗긴 민족보다 정신을 빼앗긴 민족이 더욱 불쌍하고 희망이 없는 법이다. 그들은 우리 민족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아브라함, 이삭, 다윗과 그들의 역사를 줄줄이 외우면서도 자기 부모, 조상, 역사 문화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오히려 철저히 부정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빠지게되면 아편 중독보다 그 증세가 더욱 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중독 증세에서 벗어나려면 "성경"이라는 애매모호한 소리로 가득찬 아편을 먹을 것이 아니라 많은 문화, 종교, 역사, 과학 서적을 읽어 분별력을 키움으로서 아편증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독교 죄악사"를 책도 그중에 하나이다.

일본이 잔학한 식민국가임은 분명하지만 기독교인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안됩니다.
정말 기독교인들은 잔학의 극치를 달리는 자들이죠.
이 세상에 최고의 코미디가 기독교단체가 일본을 욕하는 거죠..
일본과 미국을 비교해보죠..
일본이 처음 한국을 점령했을당시 한국인구는 3000만이었는데 해방당시 인구는 4천만으로 늘어났습니다.
해외인구까지 합친 숫자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당시 만주로 이주한 사람들도 많았으니.. 하여튼 인구가 늘었지요.
미국에 식민지가 건설될 당시 미국엔 2500만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현재 살아남은 순수인디언의 숫자는 20만입니다. 혼혈까지 합치면 이백만이 넘는다고 하고 최대 육백만이란 이야기도 있으나 이들은 혼혈이고 순수 인디언은 단지 20만뿐입니다.
한마디로 몰살당했습니다. 일본이 미국처럼 행했다면 한국인구는 삼천만에서 단지 30만명만 남고 몰살당했겠죠.. 하지만 한국인구는 4천만명으로 늘었지요..
그리고 저 육백만에 이르는 혼혈숫자는 강간의 결과입니다. 성노리개로 가지고 놀았거든요...
이것만 봐도 기독교인들의 잔학성은 상상내지 비교를 불허하는 거의 겨~~엉~~~아~~악 그 자체입니다.
문제는 이 잔학하기 이를데없는 미국의 인디언들에 대한 학살은 기독교인들의 전체 학살역사에선 조그마한 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것말고도 기독교인들의 잔혹 잔학역사는 끝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천황제국주의자 일본 우익 꼴통쓰레기들도 기독교의 미친개들에 비하면 천사로 보일정도 이니 기독교가 실제론 악마교라고 불러도 틀림이 없지요.

 

<"콜럼버스는 희대의 살인마">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11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인류 사상 최대의 학살 원흉”이라고 주장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그는 이날 아메리카대륙 원주민 대표 회의에 참석해“콜럼버스 원정대가 처음 도착한 이후 150여년 동안 스페인, 포르투갈,영국 등 서방 침략자들이 10분에 1명꼴로 원주민을 학살했다”면서 “그결과 원주민 인구는 1492년 1억 명에서 1640년대 300만 명으로 절멸되다시피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이 침략자들은 히틀러보다 더 악랄했다”고 비난했다.
차베스 대통령은 “그런데도 중남미인들이 ‘콜럼버스의 날’을 기념하는것은 치욕”이라고 말했다. 차베스는 지난 해 콜럼버스가 1492년 10월 12일 바하마 제도의 산살바도르섬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과 일부남미 국가에서 제정한 이 날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꾸는 대통령령을공표한 바 있다.
그는 특히 35만 원주민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저리로 사업자금을 빌려주는 ‘과이카이푸로(스페인 침략자에 저항한 원주민 추장 이름) 계획’을추진하겠다고 밝혔다.


 1864년 콜로라도 주의 동남부 지역의 샌드크리크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아라파호 족과 샤이엔 족의 혼합 거주지로 정부에 의해 주어졌던 이곳에는 당시 남자 장정들은 사냥을 떠난 사이에 280여 명의 부녀자 및 어린이들이 남아있었다. 이 때 미국 기병대들이 기습적으로 몰려와서 원주민 전원을 학살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기병대 대장 존 치빙턴 대령은 이전에 광산촌에서 기독교 선교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전직 감리교 목사였다는 사실이다.
치빙턴 대령은 이 사건이 있기 2년전 [글로리에타 협곡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뉴멕시코 지방을 장악하려는 남군의 의지에 쐐기를 박은 북군의 전쟁 영웅으로 콜로라도에서는 '싸우는 목사'로 명성을 날리던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원주민들을 핍박하고 학살하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철저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그는 "알을 그대로 두면 이가 되는 법"이라고 하면서 원주민들과의 신사협정을 매정하게 깨뜨려버리고 그들을 몰살시켜버리고 말았다. 지금도 덴버 시로부터 동남쪽 약 1백 마일 지점에 있는 샌드크리크 학살 현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마을 이름이 치빙턴으로 이름지워져 있는 것은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드는 역사적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샌드크리크 학살에서 자행된 만행은 인디언에게는 뼈에 사무치는 한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샤이엔 족과 아라파호 족 인디언은 어릴 때 어머니의 무릎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자란다고 한다. 자녀에게 당시의 만행을 이야기 해주는 어머니는 만행의 주범이 백인 목사였음을 잊지 않고 말해준다는 것이다.
백인병사들이 인디언의 머리가죽을 벗기고 사지를 절단하는 등 끔찍하기만 했던 만행의 잔혹성은 1996년 2월 하순 덴버공립도서관이 [진짜 서부]라는 이름으로 열었던 전시회를 통해 생생하게 재현되기도 하였다.
치빙턴 대령은 연방의회와 육군이 샌드크리크 학살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여 결국 군복을 벗었으나 덴베에서는 여전히 유지로 행하였으며 1894년 감리교회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조객으로 가득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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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는 콩고민주공화국을 1885년부터 지배하였습니다.

콩고를 지배하던 벨기에는 고무를 착취하면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마을 주민을 학살했습니다.

이에 따라 적게는 1,000만 명에서 2,000만 명에 달하는 콩고인이 학살되었는데,

인구비례로 보면 무려 40~70%에 달합니다.

결국 영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들의 항의로 레오폴트 2세는 학살을 중단합니다.

그러나 콩고는 벨기에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1960년 콩고가 벨기에에서 독립한 이후 벨기에는 아무런 입장 표명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국제적으로 이는 전혀 논의되고 있지 않습니다 =ㅅ=

 

물론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에도 항의할 처지는 못 됩니다.

영국은 호주 원주민을 무차별 학살했고,

영국인들에 의해 세워진, 원주민에게는 '식민 정부'는 원주민의 정체성을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수 많은 어린이들이 원주민의 문화를 배울 수 없도록 강제로 부모한테서 격리되었습니다.

현재 호주 총리가 2007년에 사과를 했고, 미국의 경우에도 사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외에도 독일은 나미비아를 지배한 이후 나미비아의 헤레로 족의 가축과 땅을 빼앗았습니다.

헤레로 족은 1904년 독일인에 저항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제국주의 독일 정부는 헤레로 족에 대한 몰살을 지시했고,

헤레로족의 80%가 살해당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수용소에 강제로 이주당해 생체실험을 당했습니다.

독일은 1990년대까지 사죄를 거부해 오다 최근에 사죄를 했습니다.

 

 

전쟁을 일으켰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고요? 나치에 맞선 대영제국은 다른 원주민 나라를 침략하여 힘없는 원주민을 착취하여(정당하게 강한 나라를 정복한게 아니라, 깃발만 꽂고 자원을 수탈하였습니다)

 

이건 침략이 아닌가요? 그리고 세계 1차 대전을 일으킨 비스마르크한테는 왜 아무도 누구도 욕을 하지 않을까요? 유태인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스마르크가 일으킨 1차대전때도 수백만명이 죽엇습니다..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서 전쟁이 일어나고, 사망자가 발생하는 건 어짜피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나쁜 일이죠. 히틀러보다 더 잔혹한 포르투갈, 스페인,미국은 왜 지탄 받지 않는 것일까요?

 

식민지 착취를 한 포르투갈,벨기에,스페인,네덜란드,일본,영국,프랑스,이탈리아,독일,미국 모두 받아야겠죠.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그건 과거 일이고, 예전 일이라고, 그들은 바뀌었다고. 저도 동감합니다. 일본도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극우들은 왜 옜날 1세기 전의 일을 아직도 헐뜯나요?



 

마녀마남 처형 색깔 설명

하늘색 : 처형이 없었던 곳                       
연노랑 : 100 명 이하
진노랑 : 1000 명 이하
오랜지 : 7500 명 이하
분홍색 : 7500 명 이상
빨강색 : 15000 명 이상

 

 

그리스도교는 중동에서 들어왔죠, 서양문명과는 관련 없는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님이 생각하는 그게 아닙니다.(초기 그리스도교는 님이 현재 보는 이슬람과 같았다고 보면 됩니다. 실제 두 종교가 야훼를 믿죠)

 

현재의 모습도 그리스도교가 붕괴되고 르네상스라는 서양문명의 부활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마녀사냥이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 이교도를 찾아 살육하는 것입니다. 중세에 그리스도화율이 100%가 된 것은 그리스도교가 우수하거나 좋은 사상이라서가 절대 아닙니다. 강력한 권력으로 세속을 마구 지배하엿으므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사악한 고문에 수많은 이교가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중세의 그리스도교는 개신교가 아니라,

 

콘스탄틴이 공인한 동방 정교(이게 오리지날 그리스도교입니다)와 천주교이죠..

 

그리스도교는 사람만 죽인 것이 아닙니다, 과학도 말살하고 콜로세움, 도서관도 파괴하고 원래 서양 전통의 종교건물(신전들)도 파괴하였습니다.

 

피와 살육과 광기와 어둠의 시대가 바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이 일어나 지배한 중세시대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초기적(동방정교)부터 으스스하고 무시무시한 종교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이전에 서양은 이미 발달할 대로 발달 해 있었고, 그리스도교로 말미암아 미개화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서양에 들어왔을 때, 정치인, 학자, 과학자, 귀족들은 서양 다신교를 지킨데 반해, 거지, 비정상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믿었던 것에서 볼 수 있지요.

 

그것을 로마제국 '말기' 콘스탄틴이라는 얼간이가 개인의 권력강화의 탐욕으로 정치적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물론 허용만 하였지 콘스탄틴 스스로는 역시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전투 전날에 px를 보았다는 구라도 후세에 비잔틴 수도사에 으해 날조된 기록임으로 판명났고요..

 

중세에 들어오면서 서양이 발전읋 못하고 정체된 것은 그리스도교때문입니다.

 

지금 정치와 종교가 완전 분리되며 우리가 세속적인 삶(종교 자유)를 누린 것도 근대 계몽주의 사상의 대두와 그리스도교 세퇴에 기인한 것입니다.

 

현대에 르네상스 이후 그리스도교(천주교,개신교,동방정교) 모습을 초기적 그리스도교(중동)의 모습이라 생각하면 절대 안 됩니다..

 

 

1. 그리스도교 이전 문화

 


기원전 1세기 공화정 시대 로마 시가지

파르테논 신전, 판테온, 사모라트라케의 니케

 


밀로 섬의 비너스 상

파르테논 신전


 

콜로세움(그리스도교 공인후 그리스도인들이 부숨)


로마의 수로(BC 2C)
 
바알베크의 바쿠스 대신전


판테온 

 
 
 
 
 
 
 
 
 
 
 
 
 
 
 
 
 

 2. 그리스도교 이후의 서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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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파티아(Hypatia the Muz): 그리스도교가 득세한 격동의 시기 5세기에 로마다신교를 지켰던 인물로 여성 수학자로는 주목할 만한 첫 인물이다. 역시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테온의 딸로서 알렉산드리아에서 뛰어난 지적 재능과 달변·품위·미모를 두루 갖추어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다. 412년 키릴이 알렉산드리아의 수장이 된 뒤 히파티아는 니트리아 수도사들과 키릴을 따르는 광신적인 그리스도교도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되었는데 그 사건 직후 많은 학자들이 이 도시를 떠나게 되어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학문의 주요중심지라는 지위를 잃기 시작했다. 370~415

 

히파티아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작가인 드니 게디의 소설 <앵무새의 정리>에 히파이타가 이렇게 등장한다. '415년의 어느 날,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교 광신도들이 길을 지나던 그녀의 마차로 달려들어 그녀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발가벗긴 채 성소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칼날처럼 예리하게 깎은 굴껍데기로 그녀를 고문한 뒤 산 채로 불태워버렸다'. 그밖에도 1853년에 찰스 킹슬리(Charles Kingsley)가 쓴 소설 <히파티아>에서도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쇠망사>에서 그녀의 비극적인 최후를 각별히 다루고 있다고도 한다.)




 

히파티아의 명성은 그녀의 아버지 테온(역시 수학을 연구, 교수했던)을 능가할 정도였는데, 테온은 영특한 딸에게 직접 수학을 가르친 것은 물론, 이탈리아와 아테네로 유학을 보내 교육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히파티아의 저술은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아버지와는 달리 공식적인 직위를 지니고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오늘날의 우리는 그녀가 어디에서 언제 수학과 철학을 강의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아버지가 관장으로 있던 무세이온에서 일정한 직위 없이 강의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그녀가 강의할 때마다 알렉산드리아의 부호, 명사들이 강의를 듣기 위해 타고 온 마차가 줄을 이었다고 한다. 히파티아는 유창한 강의와 뛰어난 수학 문제 해결 능력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당시 수학자들은 몇 달 간 풀리지 않는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녀에게 편지로 질문했고, 그녀는 한 번도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키릴(Cyrilus of Alexandria, Saint): 광신적 주교. 415년 그리스도교도들을 시켜 천문학자이자 최초의 여류 수학자이며 이교도였던 히파티아를 납치해 옷을 벗기고 조개껍질로 썰어 죽였다. 사체는 불태워 버렸다.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해 이단적 견해를 주장한 콘스탄티노플 주교 네스토리우스에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412년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주교인 삼촌 테오필루스를 이어 주교가 되었다. .375경~444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2k1145a 키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라.








비잔틴의 후예인 현대의 개독 그리스에서 영웅으로 받드는 키릴의 초상화


이것은 로마시대 개독의 만행 즉 동방정교의 만행. 동방정교는 이후 비잔틴과 루마니아, 러시아, 현대 그리스에서 국교인 종교.

 

 



 

중세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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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 미술(그리스도교 이전 시대 문화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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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리스도교를 공격하는 이유=이슬람


그리스도교가 유럽에 퍼진 암흑 미개에 시간동안

1. 수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알라)를 숭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고

2. 수많은 학문이 절멸당하고

3. 경직되고 경건한 사회가 조성되며

4. 현대의 이슬람처럼 여러가지 제약이 많은 시대가 됨..

5. 그리스도교의 특성으로 인해 망한 나라가 한 둘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동방정교)화된 로마제국이 패망하고, 비잔틴도 연명만 하고 패망한다..

6. 그리스도교는 사단이라는 이유로 고대 유럽종교의 신전을 모두 파괴하였으며 신상들의 목을 치며

7. 손금보기, 올림픽, 아고라가 폐쇄되며, 민주정이 붕괴되고 왕권신수설에 기초한 그리스도교 독재정이 일어나며

8. 관용이 없는 일신교의 광신성이 마치 유교가 지배하는 조선처럼 서양을 참혹하게 만들었다..


9. 지금 이슬람이 미개한 이유와 그리스도교가 유럽을 장악했을 때 유럽이 패망한 이유가 같다.

10. 현대 그리스도교(천주교, 개신교, 동방정교)를 꾸미는 수많은 요소들이 그리스도교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알라. 그리고 그것은 좋은 것들이고 그리스도교가 없어도 있는 것들이고 받아들여야 할 것들이다.

다른것을 자기것으로 만들어 거짓된 이미지로 치장하면 안 되 그리스도교..

 

 

중세 유럽은 완전히 그리스도교 위주로 돌아갔으며, 그리스도교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며, 세속에서 종교가 무시무시한 권력을 가진 때였으며, 어떠한 과학도 사고의 자유도 주어지지 않던 어둠과 무지의 시대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종교를 개혁하였다고 떠드는

 

'그들의' 개혁가 17세기 칼빈과 루터의 실체는?

 

루터는 과학을 혐오하며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의 검소한 자급자족의 생활을 중시하는 '원칙주의' 중농주의자였으며,,

 

칼빈은 원래 그리스도교의 자급자족 사상(낙타 바늘구멍 사상)을 완전히 부정한 이단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

 

칼빈의 일대기

사람의 가죽을 벗기고 잔혹한 고문을 가한 칼빈과 그의 종교국 
상상을 초월한 칼빈과 칼빈니스트의 악마적 살인 행각
  
  
 *. 칼빈과 그의 종교국(칼빈니스트)은 어떻게 고문했나
 
1) 다양하고 잔악한 칼빈과 망나니 종교국의 고문방법
(1) 엄지손가락을 조이고 발바닥을 불로 지지고 밧줄로 잡아당기는 참혹한 고문
 
칼빈과 그의 종교국이 가한 고문은 악명 높은 카톨릭의 종교재판소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칼빈)의 권고에 따라 심문할 때에 나사로 엄지손가락을 조이는 고문과 밧줄로 잡아 당기는
고문외에 발바닥을 불로 지지는 고문까지 더해졌다(stefan Zweig. op. cit. p.80)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칼빈의 종교국에 의해 자행된 밧줄로 잡아당기는 고문이란 높다란 천장에 도르레를 달아 놓고
사람을 밧줄에 묶어 반대편에서 잡아당기면 사람이 들려 올려 공중에 매달리는 고문을 말한다.
그렇게 매달린 사람은 혹은 그 상태에서 떨어뜨리면 바닥에 내 동그라지는데 그러면 신체의
부위들은 탈구되어 죽거나 그런 방식으로 해서 그 천장에 매달린 상태로 죽거나 아니면
그렇게 고문을 당하다가 끌어 내려져 사형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발바닥을 불에 달군 쇠로 지지는 고문으로 가혹하기가 이를 데 없는 고문을 하는 등, 이러한
고문은 카톨릭의 종교재판에서도 그대로 행해진 방법들이며 칼빈에 의해서도 동일하게 자행되었다.
주목할만한 것은, 바로 '단순한 혐의만 받고 잡혀온 사람들'에게도 너무도 잔인한 고문이 행해졌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잔인한 고문을 가했기 때문에 그들은 고문실로 끌려가 다시 그
처참한 고문을 받지 않기 위해서 차라리 목숨을 끊었다.
그만큼 가혹하고 잔악한 고문이었음을 말해준다.

(2) 창자가 튀어나오도록 꼬쟁이로 쑤시는 칼빈과 종교국
(망나니의 대명사인 칼빈니스 트 종교조직)
칼빈이 고문한 방식을 보면 '자신의 교리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창자가 튀어나오도록
꼬쟁이로 쑤시고'(stefan Zweig. op. cit. p.193)라고 하였다.
칼빈과 그의 종교국이 얼마나 잔악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고문하고 학살하였는가 하는 것은
그들이 사람들을 어떻게 죽였는가에 대한 그 참혹한 방법을 보면 여실히 드러난다.
그들이 사람에게 얼마나 잔악하게 학살하는 방법을 보면 사람들의 배를 가르고 꼬쟁이로
쑤셔 죽이는 방법을 동원한 것을 보면 그 참상이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는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칼빈은 살인마이다.
그는 섭리예정이라는 기묘한 교리를 통해서
칼빈이 참혹하게 사람들을 죽였는가? 그의 위장된 교리의 잔악상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그 사상에 그 행위가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칼빈의 교리는 사람을 죽이는 교리이기 때문이다. 칼빈의 교리를 냉정히 들여다 보면
사람을 죽이는 교리라는 것이 통렬하게 그 정체가 드러나고 만다.

(3)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칼빈과 그의 종교국
    (망나니인 칼빈니스트 종교국)
칼빈은 자신의 교리에 맞지 않는다고 '사람의 가죽을 벗기고 죽였다'
(stefan Zweig. op. cit. p.193)고 역사는 고발하고 있다.
가죽을 벗긴다는 것은 유럽에서 관행적으로 자행되었던 고문방식의 한 유형인데 이는 머리의 가죽을
벗긴다거나 하는 유형의 것이다. 머리의 가죽이나 살갗의 가죽을 벗긴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새로운 신교를 창설하였다는 개신교에서 이러한
만행이 저질러졌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엄연하게 자행된 것이다.
칼빈과 그의 종교국은 사람의 가죽까지 벗기는 잔악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고문하였다.
 
이들의 고문이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그 다음의 행위가 무엇이었는가를 보면 그 참상과 끔찍함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렇게 가죽이 벗겨진 사람의 다음 운명은 죽음이나 추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칼빈과 그의 종교국의 이와 같은 만행을 가증스럽게 할 수 있었던 근거는
교리에 의해서
칼빈주의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시켰다는 것이다.(야훼경에서 야훼는 그런 존재다)

(4) 가죽 벗긴 사람 소금으로 문지르는 칼빈과 망나니인 칼빈니스트 종교국
칼빈이 자행한 참혹한 고문을 보면 '(사람의 가죽을 벗겨낸 후) 소금으로 문질렀다'
(stefan Zweig. op. cit. p.193)라고 하였다. 피가 흐르는 그 곳에 소금으로 문지르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인가를 상상해 보라. 이 고통이 얼마나 끔찍하고 사악한 행위인가는
두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다.
이러한 만행을 저질러 놓고 칼빈주의 자들이 외치기를 '칼빈주의 원리에서 세운 나라 치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높이 보지 않는 나라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행위들이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높인 것인가?
그렇게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서 지금 스위스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개신교(칼빈 예수교)의
교세가 땅에 떨어졌는가?
칼빈과 그의 종교국은 이러한 만행이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였다'고 하는데 우리는 칼빈의 예정론이 외치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하나님이고 누구의
하나님인지 그들이 외치는 신적 존재의 실체가 누구인가를 가려야만 한다.

(5) 칼로 찢고 고문한 칼빈과 그의 망나니 칼빈니스트 종교국
칼빈은 자신의 교리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잡아 들여 '칼로 찢었다.'
(stefan Zweig. op. cit. p.193)고 하였다.
칼로 찢었다는 것은 배를 찢고, 사람의 가죽을 찢고 송곳 같은 것으로 신체의 민감한 부분들을 불로
달구어진 도구로 잔악하게 지져대고 하는 것을 포함하는데 이러한 고문은 카톨릭의 종교재판에서
흔히 사용되던 것('Babylon Mystery Religon', Relph Edward Woodrow', 기독교문서선교회 편
김덕군 '로마카톨릭의 어제와 오늘' 1994.3.10. p.146)으로 이는 주로 카톨릭의 종교재판소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고문 방식이 칼빈과 그의 종교국에서도 그대로 시행된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칼로 다스린 칼의 사람이다.
그가 수많은 책을 썼다고 그것이 모두 성경에 관한 책이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하나같이 가면의 신학이며 위장된 거짓의 교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그의 손에 실질적으로 주어진 것은 칼이며 그는 자신을 추종하는 총신(寵臣)들에게 칼을
쥐어주며 칼로 저항하는 자들을 다스리라고 독려했다.
그런 칼빈이기에 잡아들인 사람들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칼로 사람을 찢어대는
만행으로 사람들을 고문했던 것이다.

(6) 불에 그을려 죽인 칼빈과 그의 종교국
칼빈은 '불에 그을려(화형) 죽이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한 천천히 온갖 방법으로
고통을 주라고 명령하였다(stefan Zweig. op. cit. p.193)고 하였다.
불에 그을려 죽인다는 것은 곧 화형을 시킨다는 것을 말한다.
카톨릭이 자행한 종교재판에 의하면 1211년 라바우어(Lavaur)라는 지역에서는 하루에 400명의
사람들이 산채로 화형을 당하기도 하였는데, 칼빈의 제네바에서는 주로 샹펠 광장에서 화형이
처해지곤 하였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칼빈은 4년 동안에 35명의 사람들을
공식적으로 화형에 처해 죽인 것이다. 그런데 불을 사용하는 것은 반드시 공개적인 제네바 시의
샹펠 광장 같은 곳에서만 자행된 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자행하는 고문장소에서 불로 달구어진 쇠를 이용하여 고문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불에 태워 화형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고문실에서 불에 그을려 죽게 하는 방식은
중세 시대에 흔히 사용되는 가장 흔한 고문의 방식 가운데 하나였다.

(7) 사람을 절단내는 고문을 가한 칼빈과 그의 종교국
칼빈과 그의 종교국은 자신들이 잡아들인 사람들을 '절단 내는 살상을 저질렀다'
(stefan Zweig. op. cit. p.193)고 한다.
'사람을 절단 냈다'는 것은 사람의 몸을 절단 즉 '잘랐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목을 자르는 것이든 몸을 자르는 것이든 모두 마찬가지였다. 칼이나 기타 수단들을 통해서
사람의 몸을 자르는 것으로 잔악하다는 것은 달리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고문 방식은 도르래에 의해 높은 천장에 올려져 거기서 매달려 죽는 방식이나 아니면
그 높은 곳에서 아래로 추락시켜 죽이는 방식도 함께 동원되었다.
 
이러한 고문 방식은 가혹하기로 유명했던 카톨릭의 고문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이와 같은
고문 방식이 종교의 자유를 외친 신교에서 자행되었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칼빈이
이를 그대로 재현한 이후로는 개신교도 당연히 이러한 살인을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 결과 당시 서구에 점차 가열된 르네상스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나 사회로부터 개신교는 집중적인
공격을 당하게 되어 개신교는 양쪽으로부터 협공을 당해 1650년 이후로는 사람들은 신교에 큰
실망을 하고 빠져나감으로 급격하게 무너지는 현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런 점에서 칼빈이 사람을 절단 내는 인간 사냥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결과를 안긴 것이다.

(8)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인 칼빈과 그의 종교국
물에 빠뜨려 죽이는 것은 주로 마녀 재판에 많이 사용한 것이나 반대파나 종교재판으로 상대방을
죽이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것도 포함한다. 칼빈이 주도한 종교국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을 물에 빠뜨려 죽였다'(stefan Zweig. op. cit. p.193)고 하였다.
물에 빠뜨려 죽이는 방식은 칼빈과 그의 종교국 그리고 청교도들과 같은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흔히
사용된 재판의 대표적인 한 방법이었다. 이러한 관행은 급속히 퍼져나가 당시 칼빈주의 자들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물에 빠뜨려 심판하는 관행이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특히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마녀재판의 경우 이 방법이 가장 흔하게 사용되었다.
칼빈 역시 자신의 교리에 일치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을 발가벗긴 채 밧줄로 묶고 사람을
물 속에 넣고 죽이는 방법을 사용하였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의 이러한 심판의 방식은 이후에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유럽의 칼빈주의 자들의 인간사양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발전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무수히 죽이는 심판의
양식으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9) 해충들이 뜯어먹게 방치하는 칼빈과 그의 종교국
칼빈의 사상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한 세르베토는 그가 감옥에 있으면서 해충들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하소연하였다.
그는 탄식하기를 '벼룩이 나를 산채로 물어뜯어 죽이고 있어요 신발은 다 망가졌고 옷도
내복도 없습니다'(stefan Zweig. op. cit. p.151)--나의 배설물조차 치울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너무나 잔혹한 짓입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stefan Zweig. op. cit. p.151)고 하였다.
칼빈과 그의 종교국은 세르베토의 몸을 벼룩이 뜯어먹도록 방치하였다. 그리고 세르베토의
하소연에도 불구하고 그의 배설물까지 치울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런 고문 방법은 카톨릭이 행하였던 고문방식과 같은 것으로 카톨릭은 마룻바닥이니 벽에 쇠사슬로
묶어 두고 피냄새로 달려온 쥐들이나 해충(vermin)의 먹이가 되도록 하여 극심한 고통을 주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고문 방식이 칼빈에게도 동일하게 취급되어
실행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0) 사람들은 칼빈과 그의 종교국에 의해 고문 받기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칼빈과 그의 종교국은 터무니없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 들였다. 그래서 제네바의 감옥은
항상 넘쳐 났으며, 칼빈의 종교국은 정말 하찮은 문제로 잡혀 들어온 사람들에게도 참혹하기
그지없는 고문을 가하였다.
'단순한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에게도 너무나 잔인한 고문이 행해졌기 때문에 고발된 사람들은
고문실로 끌려가기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stefan Zweig. op. cit. p.80)고 하였다.
칼빈과 그의 종교국이 얼마나 잔인한 집단이었으며 무자비한
고문을 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칼빈과 그의 종교국의 가하는 고무의 유형들은 카톨릭의 종교재판소가 자행한 고문 방법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사람의 가죽을 벗기고 찢으며 물에 넣는 등의 방법에서
볼 수 있듯이 가혹하기로는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11) 자살하지 못하도록 밤낮으로 박수 치게 하는 정책
제네바 감옥의 한가지 특징은 하찮은 죄목으로 잡혀 들어온 사람들에게도 잔혹한 형벌을 가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 같은 고문을 당해 본 사람은 다시 고문을 당하기 전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시의회가 취한 아주 특이한 자살방지 제도가 다름 아닌 밤낮으로
감옥의 죄수들로 하여금 박수 치게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하자 그와 같은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서 마침내 시의회는
죄수들이 밤낮으로 손뼉을 치라는 규정을 만들어야만 했다'(stefan Zweig. op. cit. p.80)는 것이
그것이다.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손뼉을 치라는 칼빈의 자살방지 정책이야말로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정책인가? 자살을 선택해야 하는 무고한 사람들의 극단적인 선택은 칼빈의
종교국이 가하는 고문이 얼마나 심각하게 자행되었는가를 여실히 말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아니다. 종교개혁이라는 간판을 내 걸고 자행한 살인 행위들이다.
이런 종교가 인간의 존엄성을 운운하거나 인간의 가치 따위를 논한다는 것은
가증스러운 위선적인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칼로 사람들을 짓밟고 죽이고 이룬 개혁이라면 그런 개혁은 형식만 다를 뿐이지 역사적으로
칼빈만이 아니라 얼마든지 있다. 가령 한국의 어느 군사독재자(전모씨는 가톨릭 신자였음)도 수많은 사람들을
삼청교육대로 보내 죽이고 한 것을 사회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하였다.
 
그런데 칼빈과  인구비율이나, 다스린 범위나, 고문의 방식인,
사람을 죽이는 방법이나 어느 면을 비교해 보아도 전성기 천주교에 뒤처지지 않았다

 

가톨릭 벨기에의 식민지 대학살과 만행

 

네덜란드 왕은 벨기에 땅을 포기할 마음이 없었지만 열강의 이해관계에 따라 벨기에는 독립을 쟁취하고 레오폴드 1세를 국왕으로 모신다. 이 독일 귀족 출신의 왕의 아내는 프랑스 7월 혁명으로 ‘시민의 왕’으로 옹립된 루이 필립의 딸이었다. 이 사이에서 오늘 이야기할 왕자 하나가 탄생하게 된다.

이 왕자는 전반적으로 둔했다고 한다. 장가를 들어도 ‘음양의 이치’를 몰라 코치를 받아야 했을 정도였다니 어련했을까. 공부 성적도 시원찮았는데 유독 두각을 드러낸 과목이 있었다고 한다. 그건 ‘지리’였다.

국왕이 되어 레오폴드 2세로 불리우게 된 뒤에도 그의 관심은 지리였다. 그리고 신생 독립국으로서 이미 전 세계를 갈라먹고 있는 인근 국가들이 자기네 깃발들을 꽂아 놓은 세계 지도를 보며 책상을 쳤다. “우리 벨기에 것은 없단 말이냐.”

여기서 또 다른 인물 한 명을 돌아보자. 헨리 모턴 스탠리. 어디서 많이 듣던? 그렇다 바로 그 사람이다. 행방불명된 리빙스턴 박사를 원주민 마을에서 찾아냈고 “Dr. Livingston? I presume….. ” (리빙스턴 박사님 맞으시죠?)라는 역사적인 대사를 쳤던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은 신문 기자이면서 탐험가면서 동시에 악당이기도 했다. 그는 빅토리아 호수에서 콩고강에 이르는 자신의 탐험 내내 원주민들에게 채찍을 아무렇지도 않게 휘둘렀고 탐험(?)을 방해하는 원주민들을 아낌없이 죽였다.

빅토리아 여왕의 표현에 따르면 “단호한지는 몰라도 추한” 남자였던 스탠리를 주목한 것이 레오폴드 2세였다. 지리를 좋아했던 레오폴드답게 그는 스탠리를 후원하여 아직은 열강의 손이 닿지 않은 아프리카 내륙을 살피도록 했다.

1878년 레오폴드 2세는 국제 은행가들의 도움으로 상(上)콩고 연구위원회를 창설했다. 콩고 강을 따라 콩고 오지로 들어가는 길을 개척하려는 목적이었다. 후일 ‘콩고 국제 협회’로 이름을 바꾸는 이 단체의 후원을 받으며 스탠리는 오늘날의 콩고 일대를 휩쓸고 다니며 “전혀 원주민 추장들은 이해할 수 없는” 수백 개의 조약을 맺었다.

거기에는 원주민들의 주권을 레오폴드가 설립한 ‘협회’에 양도한다는 엄청난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열강들은 해안 지역은 몰라도 아프리카 한복판의 내륙 지역에는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레오폴드 2세는 후일 그의 격렬한 반대자가 되는 윌리암스라는 사람으로부터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군주의 한 분이다. 기독교 문명에 봉사하고, 백성들의 복리를 촉진하고 지혜, 자비, 정의로 통치하려는 높은 이상을 가지신 분” (레오폴드 왕의 유령- 무우수 출판사)이라 찬양받을 정도의 연기력을 발휘한다.

북부 아프리카의 무슬림들이 자행하는 노예 사냥에 분노하는 척 했으며, 원주민보호협회 명예 회장으로서 “오로지 콩고에 문명의 빛을 주기 위해” 봉사하겠다는 레오폴드의 거짓말과 콩고를 벨기에 왕 치하의 국제 식민지로서 자유롭게 드나드는 중립지대 정도로 간주한 열강의 판단을 거쳐 벨기에 영토의 76배에 달하는 콩고 땅은 레오폴드의 ‘사유지’가 된다. 1885년 5월 2일이었다. 그리고 콩고 땅에는 지옥이 깃든다.

처음 레오폴드 2세가 눈독을 들인 것은 상아였다. 콩고 땅에서 평화롭게 살던 원주민들은 요구하는 상아를 대령하느라 죽을둥 살둥 뛰어야 했고 상아들을 나르느라 어깨 살이 짓물러야 했다. 할당량에 미치지 못하거나 잠시 게으름이라도 피울라치면 바로 죽음의 벌이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상아는 양반이었다. 유럽에서 고무 타이어가 발명되자 레오폴드 2세는 환호성을 지른다. 콩고에는 고무나무가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은 그때부터는 고무나무에 매달려야 했다. 역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거나 반항하는 원주민들은 죽이거나 손발을 잘라 버렸다.

손발이 잘린 콩고의 원주민들

여자와 아이들을 인질로 잡은 뒤 고무 생산 작업을 시키고 만족할만한 성과에 이르지 못하면 인질들을 죽였다. 어떤 마을에서는 공포에 질린 마을 주민 전체가 집단자살하기도 했다. 최소 5백만, 최대 1천만에 가까운 대학살이 일어났다.

이 콩고 ‘자유국’의 한 관리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원주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머리 수백개를 잘랐다. 그러면 이후로 죽 엄청난 (고무) 공급이 있었다. 나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인도적이다. 나는 백명을 죽였으나…그 덕분에 다른 5백명이 살 수 있었다.”

고무 생산량이 달린다고 생각하면 그들은 그렇게 보고서를 썼다. “더 많은 팔다리를 잘라내겠습니다.” 폴란드 출신의 작가 조셉 콘라드는 콩고를 여행하면서 사람의 머리로 쌓은 담벼락 같은 끔찍한 풍경에 치를 떨었고 이를 모티브 삼아 <어둠의 심연>이라는 소설을 쓰는데 이걸 수십년 뒤의 베트남으로 무대를 바꿔 만든 영화가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이었다.

이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가 점차 폭로되고 국제 여론이 끓어오르자 벨기에 정부는 콩고를 국왕의 사유지에서 벨기에 식민지로 바꿀 것을 요청한다. 이미 콩고에서 거둬들인 천문학적 수입을 사적으로 써 버린 레오폴드는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결국 벨기에 정부에게 자신의 ‘콩고 자유국’을 매각하게 된다.

즉 벨기에 정부는 콩고 자유국을 레오폴드 개인으로부터 샀던 것이다. 정식으로 벨기에의 식민지가 된 뒤에도 식민 통치는 여전히 혹독했고 채찍질은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그때부터 손발이 잘려나가지는 않았다고 하니 그나마 콩고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지.

참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이 레오폴드 2세는 꽤 소탈하고 격의없는 왕이었다고 한다.

“ 검소한 방에서 기거하면서 시장에 자주 나가 서민들과 어울리기에 임금인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어느 날 그의 방 문전에 아이 하나가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을 보고 임금이 물었다. 누구를 기다리느냐고ㅡ. 임금님이 보고싶어서 기다린다고 하자 「봐보았자 별볼일 없는 사람이다」 하며 들어갔다.” (이규태 칼럼 중)

그런 사람이 최고 천만 명을 죽인 학살자들의 우두머리였던 것이다. 그는 아무런 처벌도 천벌도 받지 않고 평온하게 죽었다. 그는 1909년 죽었는데 그의 추도식이 대한제국의 명동성당에서도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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