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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만으로는 인간들이 신뢰를 안 하는거 같아서

다른 사람 글도 검색해보았다.

http://mlbpark.donga.com/bbs/view.php?bbs=mpark_bbs_bullpen&idx=443737 원문 주소

삼청교육대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고문을 하며 광주시민을 학살한 이승만에 필적할만한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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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세월이 지나서 그런가 전두환 백담사간게 참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그당시 많은 사람들이 말하던건데 이젠 처음부터 불교신자였던걸로 아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나 보네요;

원래 전두환은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건 아니었고  정치적인 이유에 따라 불교를 대놓고 탄압하고 개신교는 엄청나게 밀어줍니다.


대략의 정황을 알수있는 진민용기자의 블로그글입니다.

http://blog.daum.net/jmy386/8967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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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주 스님 "신군부에 지지안한다" 며 '괴씸죄'로 신군부에 찍혀.. 전국 사찰들에 군화발로 무차별 숙청

지난 1980년 10월 27일 조계종스님 등 153명을 강제연행하고 전국 사찰 및 암자 5731곳을 일제 수색했던 ‘10.27 법난’은 신군부세력과 갈등관계인 월주 조계종 총무원장스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서 비롯됐다는 결론이 나왔다. 즉 당시 신군부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스님에게 신군부와 전두환 장군에 대한 지지표명과 문공부의 자율정화 지침, 그리고 불교재산관리법 등의 개정을 요구하는 등 신군부와의 갈등관계가 심화된데 따른 일종의 '보복성' 압력이라는 것.  

당시에 대해  월주 총무원장은 25일 인터뷰를 통해 "신군부의 그같은 요청에 대해 종교와 정치의 분리원칙에 따라 거부했던 것" 이라며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월주의 이같은 고집이 결국 불교계 전체의 수난으로 비화됐으며, 일부 불교계 원로들은 이때 받은 고통으로 인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불교계의 목숨을 건 투쟁과 대비되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전두환에 '용비어천가'

지난 1996년 당시 5·18 16주년을 맞이하여 전남대·조선대에 대자보가 나붙었다.  이 대자보는 당시 대학생선교회(C.C.C) 소속의 한 학생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글은  신군부와 전두환에 빌붙어 조찬기도회라는 명목으로 이들의 독재를 찬양했던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이 아직도 부끄러움없이 기독교계의 지도자로 행세하고 있음을 비판한다는 내용이다.

그는 여기서 " ... 현재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고, 정의의 심판대 앞에서는 등 정국의 과거 청산과 맞물려 있는 이때에, 12·12와 5·17을 통해 정군 찬탈을 위한 공작을 마무리해가던 그 신군부 세력을 위해, 80년 8월 6일의 '조찬 기도회'로 그들의 비열한 행위를 정당화하는데 협조해 준 일부 몰각한 교계(敎界)의 지도자들 또한 역사의 심판대에서는 것이 당연하다" 며 당시 기도회를 주관했던 대학생선교회 김준곤 목사의 처벌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또  "지난 80년 8월 6일 전두환씨가 5·18의 공로로 대장으로 진급하던 날 오전, 롯데 호텔에서 개신교 지도자 23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두환 국보위 상임 위원장을 위한 기도회가 열려, "구석구석 악(惡)을 제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내용과 전두환 상임 위원장을 위한 기도가 주를 이루었다. 이 사건은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소속 한나라 선교회 이선교 목사가 1980년 8월 6일 롯데 호텔에서 열렸던 '전두환 상임 위원장을 위한 조찬 기도회'를 주도하고, 순서를 담당하는 등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인물들을 '반란 방조죄'등으로 서울 고등법원에 고소한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고 당시 상황을 밝히기도 했다.

당시 이 기도회에 참석했던 목사들은 한경직, 김준곤, 정진경, 조향록, 김지길, 문만필, 지원상, 유흥목, 이봉성, 신현균, 김창인, 장성철, 김신명, 박정근, 김용도, 김종식 외 7명인데, 고소인 이선교 목사는 고소장에서  "불의를 보고 대항해야 할 목회자들이 오히려 불의에 동조하고, 더 나아가 불의한 정권의 등장에 일조하기까지 했다"고 지적하고, "1980년 신군부의 등장은 오늘날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평가되는 등 불법한 반란 행위임이 명백한 만큼, 민족의 대죄인 전두환, 노태우를 위해 기도로 협조해 준 교계 인사 역시 그 반란 행위의 공범자 내지 방조자로 봐야한다"고 고소 이유를 밝혔다.

21명 목사들 16년 만에 '참회성명' 발표해, 나머지는  '모르쇠' .. 역사의식 없는 목회자 자질 문제 

앞서 불교계의 월주 스님은 당시 신군부의 회유를 거부한 이유에 대해 "정교분리의 원칙" 이라고만 밝히고 있다.  즉 종교가 정치에 간섭해서는 안되며 정치 또한 종교에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불교가 정치에 무관했던 사례는 별로 없었다.

삼국시대불교는 호국불교였으며, 원효, 의상, 원광 과같은 고승들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인물들이었다. 특히 삼국중에도 신라의 불교는 가장 두드러졌는데.  신라왕실은 불교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국왕을 불타(佛陀)와 동일시하고 홍법(弘法)의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서 숭배하는 진종설화(眞種說話)를 성립시켰다. 그리하여 제 23대 법흥왕(法興王)시대부터 제 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시대까지의 왕명은 모두 불교에서 따와 신라사 시대 구분의 하나로서 불교왕명(佛敎王名) 시대라고 할 만한 독특한 시대를 연출한다.

신라의 대표적인 승려로 원광(圓光)이나 자장(慈藏) 등의 불교는 중국 문화와 폭 넓게 교류하여 국제적인 불교의 성격을 띠면서도 일면 국가 관념의 확립이라고 하는 정신적 특징을 보여주는데. 호국법회의 성격을 가진 백고좌회(百高座會)나 팔관회(八關會)와 같은 법회를 주관하는 것을 그들의 주된 임무의 하나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불교계의 신군부와의 마찰은 서로 인식하는 역사의식의 차이에서 불거진 것이다.  즉 신군부의 정권찬탈을 국민을 위한 것으로 보지않는 불교계와 신군부의 대의명분이 서로 맞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불교계는 이런 정치에 대해 거수기노릇을 거부했던 것이다.

반면 기독교 지도자들의 역사의식은 심각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드러난 전두환 조찬기도회에서 교계의 지도급 목사는 그를 향해 "여호수아와 같은 지도자" 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어떤 반론도 제기하지 않았다. 

독재정권의 비호를 받아온 기독교... 역사의식과 고통당하는 이웃의 인권 외면한 채 '기복'의 함정에 빠져 지금까지...

기독교의 엄청난 세력확대는 이 때부터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그야말로 기독교에 있어서 '허니문' 이었다.  건설업의 활성화에 따라 종교부지는 시중의 약 절반에도 못미치는 가격으로 사들일 수 있었고,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았으며 정치권은 바로 이런 교회의 확장과 늘어나는 교인숫자를 이용해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서로 상부상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야말로 사회는 민주화에대한 열망으로 몸부림 칠 때며, 안기부는 사흘이 멀다하고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지도자들을 각종 명분으로 잡아서 처단했고,  자유를 부르짖는 젊은이들을 삼청교육대에서 혹독한 정신무장을 시켰다.  1987년 6.29선언으로 대통령직선제가 시행되면서 급기야 민주화가 꽃을 피우는가 싶었지만 이번에는 정치권의 각종비리와 청탁, 그리고 돈으로 얼룩진 선거가 국민들의 가슴을 또 한 번 긁어놨다.

사회적인 혼란기를 겪던 이 때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교회였다.  암울한 현실을 타파하고 벗어나려는 민초들이 찾은 곳은 바로 하나님의 품이었으며, 신앙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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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당시 29만원이랑 신군부가 자신에게 반대하던 불교계지도자들 싹쓸이로 잡아다가 고문하고 했었습니다.  이때  신군부의 사주를 받은 건달들이 머리깍고 돌중으로 들어가서 대부분의 주요사찰의 주지자리와 각종요직들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래서 29만원의 위세가 높은 동안에는 기다리고고 있다가(이당시가 불교계가 가장 부패되었던 시기였죠)  민주화의 흐름을 타고   숨죽이던 개혁승들이 들고 일어나 이 돌중들의 축출에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이 돌중들이 근본이 건달들이라 쉽지 않았죠.  큰절 차지하고 있었으니 돈도 많아, 언제든 호출할수 있는 건달후배들 줄줄히 대기하고 있어..   결국 종교인답지 않게 낫들고 화염병 나오고 하는 소요가 몇년간 계속된 끝에 겨우 이 돌중들 축출하는데 어느정도 성과를 거둘수 있었죠.   사실 사람들은 승려들이 벽돌던지고 싸우고 하는걸 보고 욕하기 바빳지만 사실은 불교계의 뼈를 깍는 개혁작업의 일환이었고 그래서  지금은 정말 많이 깨끗해진겁니다.  개혁이란건 뼈를깍는 고통이 수반되지 않으면 이루어질수 없는 법이죠...


 그런데 29만원이 퇴임하고 끈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을때 차마 감옥으로는 갈수 없었고 대신 종교시설에 사실상 유배로 가름하는걸로 된건데 이때 29만원 재임기간중 그렇게 칭송하고 심지어 여호수아와 같은 지도자 라고까지 하던 사람들이 끈떨어진 신세 되자마자 그냥 토사구팽~ 해버렸죠.   그때 불교계에서 받아준다고 한겁니다-_-;


 참고로 10.27 법난에 대해서는 진상규명위원회에서 결론이 나왔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55&aid=0000110692

/지난 1980년 있었던 언론 통제조치와 불교계에 대한 탄압사건인 10.27 법난은 당시 신군부가 주도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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