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기아 [Phrygia]        기원전700~기원전600  2009. 4. 8.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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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기아 [Phrygia]
요약
소아시아의 중부에서 서부에 걸쳐 있던 고대 지역명.
본문

북쪽은 에게해() ·흑해에 면하고, 동쪽은 갈라티아, 남쪽은 피시티아, 서쪽은 리디아에 접해 있었다. BC 1500년경 유럽에서 인도 유럽어족()의 프리지아인이 침입하여 선주민을 정복하고 프리지아왕국을 형성하였다. 수도는 고르디온이며, 왕국의 건설자 고르디오스의 아들인 미다스왕은 ‘그의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황금으로 변한다’라는 전설로 유명하다.

아시리아의 기록에 의하면, 미타라고 불리고 BC 707년 사르곤 2세에게 복속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미다스왕 이후 키메리아인에게 정복당하고, 또 BC 546년에는 서쪽의 리디아왕국에게 정복되어 그 후로 독립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프리지아어()는 6세기경까지 사용되었는데, BC 7세기경의 고()프리지아어, 3세기경의 신()프리지아어로 된 비문()이 있으나, 문법적으로도 불명확한 점이 많아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는 않았다.

프리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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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기아 복장을 한 사람, 그리이스 시대(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1세기), 키프루스

고대의 프리기아( Φρυγία)는 아나톨리아의 중서부에 있었던 왕국이다. 프리기아 인들은 초기 역사에 브루게스(브리게스)라는 이름으로 마케도니아 지방에 살았다. 그것은 그리스어를 민족어로 채용하기 전에 프루게스로 진화하였다. 여러 민족들이 그곳에서 비 그리스어계 또는 그리스어 이전의 인도 유럽어에서 나온 발칸어를 사용하거나 초기의 그리스어를 사용하였다.

트로이아가 번영 시대에 브루게스의 부분이 트로이아의 보호 아래 트로이 연맹으로 아나톨리아로 이동하였다. 트로이어는 사멸하여 결과적으로 프리기아어와의 정확한 관계와 프리기아 사회와의 친화도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비슷하게 이동의 연대와 프리기아와 히타이트의 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기원전 1200년에 히타이트 제국이 끝났다. 프리기아는 히타이트 소속이였다는 것은 분명하고, 현재의 앙카라가 있는 할리스 강이 위는 곳에 위치하였고 히타이트 권력의 중심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프리기아 국가는 기원전 8세기에 고르디움을 수도로 부상하였다. 이 시기 동안 프리기아인은 동쪽으로 팽창하여 후르리인의 후손이며 이전 히타이트의 경쟁 상대였던 우라르투와 부딪혔다.

기원전 690년 한때 프리기아 왕국은 이란의 킴메리아 침입자로 넘쳐났고 그후 이웃 리디아에 의해 잠시 점령되었다. 그것이 키루스의 페르시아 제국으로 성공적으로 넘어가기 전에 알렉산더의 와 그의 계승자의 제국은 페르가몬의 왕에 의해 점유되었고 결국 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프리기아어는 서기 6세기까지 남아 있었다. 발칸 반도에서 브루게스는 그리이스 마케도니아에 흡수되기 전에 오래 버티었다.

파일:Anatolian regions.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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