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나소스 산계(山系)의 파이도리아데스 산괴(山塊)가 형성하는 단애(斷崖) 중턱, 해발고도 500m 지점에 위치하며, 남쪽 프레이스토스강(江)의 협곡에는 올리브의 수림(樹林)이 펼쳐진다.
BC 8∼6세기 폴리스 성립기에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神殿), 델로스의 아폴론 신전과 함께 그리스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BC 5세기 민주주의의 전성기에는 신전의 보고(寶庫)가 아테네의 아테네 신전과 함께 상업활동의 기금으로 큰 구실을 하였고, 헬레니즘 시대에는 아이톨리아 동맹의 이데올로기적 중심지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BC 2000년대부터 지모신(地母神)의 성소(聖所)가 있었으나, 역사시대로 접어들면서 아폴로신으로 대치되었다. BC 7세기에는 신탁의 중요성이 커지자 중부 그리스 제국이 구성하는 인보동맹(隣保同盟)의 중심이 되었다. BC 6세기 초 제1차 신성전쟁(神聖戰爭)으로 델포이의 중립과 독립이 보장되어, 4년마다 제전적(祭典的)인 피디아 경기가 개최되었다.
신탁은 식민(植民)이나 정치적인 결정 등에 관해서 조언을 하고,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는 것으로 숭배되었으며, 신역(神域)은 보고와 기념비로 가득 찼다. 이 곳이 대지의 중앙에 위치한다고 여겨 아폴론 신전의 1실(室)에는 ‘세계의 배꼽(Omphalos)’이 놓여 있었다.
390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하고 이교도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델포이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