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왕정시대        기원전700~기원전600  2009. 4. 27.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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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한 로마가 지중해의 패자가 되기전에...

로마공화국이 들어서기 전에, 로마는 왕국이었고 7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시작과 왕국시대를 정리해 놓은 것입니다.

 

 

★로마의 시작 --  왕정시대

 

● 건국왕: 로물루스

 

전설에 의하면 트로이전쟁에서 패한 트로이왕 프리아모스의 사위인

아이네아스가 탈출하여 그의 후손들이 로마를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적인 역사에서는 '로물루스' 를 시조로 여긴다.

늑대의 젓을 먹고 자랐다는 전설을 지닌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주위의 라틴계 양치기와 농민들을 끄러모아 알바롱가라는 도시를 쳐들어가

정복하지만 머물지는 않고 자신들의 고향인 로마인근에 터를 잡는다.

그리고 형과 동생은 각기 그 터를 양분해서 서로 침범하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레무스가 레물루스의 영역을 침범하고 이에 화가난 레물루스는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유일한 왕이 된다.

로물루스는 일단 로마의 팔라티누스(팔라티노)언덕에 성벽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753년 4월 21일. 로마의 건국일이다.

그리고 도시의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서 로마라고 칭하게 되었다.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는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는 왕이 되지 않았다.

국정을 3개로 나누었다. 왕--원로원--민회 라는 3중구조로

국정을 이끄는 정치체제를 만들었다.

원로원은 왕에게 조언을 해주는 귀족들의 집단이었고, 민회는 일반평민들의

정치기구였다. 그리고 왕은 민회에서 선출하도록 만들었다.

로마라는 국가의 기본형태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로마에는 큰 문제가 있었다.

나라에 여자가 매우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로물루스는 인근에 사는 사비니족을

축제에 초대했고 사비니족은 초대를 받아들여 온 가족까지 데리고 축제에 참가했다.

점차 축제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무렵, 로물루스의 명령으로 로마인들이 기습을 하여

사비니족의 처녀들을 빼앗았고 사비니족은 놀라서 황급히 달아난다.

그후 로마남자들은 빼앗은 처녀들을 아내로 맞아들인다.

하지만 사비니족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여자들의 반환을 요구하고

로물루스는 이를 거절함으로써 전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로마가 4차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고 또 로마에 온 사비니족 여자들의

간청으로 전쟁을 그만두고 화평을 맺는다.

 

화평이 이루어진후 로물루스는 라틴족인 로마와

사비니족을 하나로 합치자고 제안하였다.

사비니족은 자기들보다 힘이 쎈 로마와 합쳐도 나쁠게 없다고 생각하고

통째로 로마로 이주해서 로마주민이 된다.

그후 로물루스는 군대를 이끌고 주변영토를 점차 확장한다.

로물루스는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지 39년째인 715년에 사망했다.

기록으로는 군대가 모인 가운데 갑자기 세찬 비바람과 함께 사라졌다고 씌어있다.

 

● 2대왕: 누마 (기원전 715 ~ 기원전 673년)

 

로물루스의 뒤를 이어 등장한 왕은 '누마' 이다.

누마는 로마와 사비니족이 합친 후에도 사비니족땅에 남아 살고 있었는데

로마 원로원은 라틴족과 사비니족의 대립으로 침체된 분위기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여 모시고 온다.

누마는 얼마동안 거절하지만 곧 승낙하고 로마의 제2대 왕이 된다.

누마는 전쟁의 신인 야누스신전을 지었다. 이 문은 로마가 전쟁시에는

열리고 평화시에는 닫힌다. 로마가 제국이 된 후에도 존재한 문이다.

누마의 치세는 매우 평화로워서 이 문은 한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그는 법과 풍습을 개선하고, 전쟁보다는 농축업 진흥에 힘을 썼다.

또 시민들을 직업별로 분류해서 각기 단체를 조직하도록 했다.

이것은 직업에 긍지를 갖게 하고 그것에 신경을 쓰게하여 그즘에 점점 고조된

라틴족과 사비니족의 대립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누마는 아무 권력적 기반도 명분도 없이 왕이 되었지만 현명한 처세로

많은 사람들의 승인과 지지를 받으며 통치를 했다.

그리고 43년의 통치가 끝난후, 평화속에서 인생을 마친다.

 

● 3대왕: 툴루스-호스틸리우스 (기원전 673 ~ 기원전 641년)

 

누마의 뒤를 이어 '툴루스' 가 왕으로 선출됐다.

그는 처음부터 인근국가인 알바롱가를 정벌목표로 삼았다.

일전에 로물루스가 정복하기도 했던 국가이다.

하지만 4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알바롱가를 쉽게 정복하기는 힘들었다.

당연히 힘든 전투가 예상되어 툴루스왕은 알바롱가 왕에게 대표자끼리의

결투로 승부를 가르자고 제안하였다.

각국에서 3:3으로 전투를 벌였는데 로마대표 한명이 세명을 죽여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알바롱가 왕은 승복을 거부하고 저항을 한다.

전쟁이 일어나 알바롱가는 로마군에게 패하고 알바롱가 시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주민들은 로마로 강제이주된다.

하지만 로마는 알바롱가 주민들을 노예로써가 아닌, 로마인과 똑같은 대우로

그들을 맞아들인다. 유력자에게는 원로원의석도 주어서 완전히 로마인으로 만든다.

이때 알바롱가의 율리우스 가문도 로마로 들어가는데 훗날 로마의 운명를 바꾼

불세출의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 (쥴리어스 시져) 도 이 가문태생이다.

툴루스는 수많은 군사적 승리를 거두며 왕이 된지 32년후에 사망한다.

 

● 4대왕: 안쿠스-마르티우스 (기원전 641 ~ 기원전 616년)

 

툴루스왕의 사망후에 4대 왕은 사비니족 출신의 '안쿠스'가 된다.

그는 2대왕 누마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가 누마와 마찬가지로 평화로운 시대의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시대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로마에 살고 있는 라틴족과 사비니족은 각자의 민족에게서 떨어져 나온 것뿐이고

아직도 로마밖의 라틴족과 사비니족은 건재했다.

안쿠스는 많은 전투를 치루었다.

전투외에도 다른 사업을 완수하는데 로마옆을 흐르는 테베레강에 다리를 놓고

바닷가로 진출해 오스티아 항구를 정복하고 염전도 수중에 넣는다.

그리고 바다와 로마를 연결하기 위해 도로를 만든다.

이 도로는 훗날 로마가도로 이어진다.

 

● 5대왕:  타르퀴니우스-프리스쿠스 (기원전 615 ~ 기원전 579년)

 

'타르퀴니우스' 는 로마최초로 선거운동을 해서 왕이 되었다.

타르퀴니우스는 그리스계도시 코린트와 에트루리아인의 혼혈인이었다.

순수한 혈통을 중시하던 고대사회에서 그는 양쪽사회에서 외톨이였다.

결국 그는 출세와 운명의 개척을 로마에서 하기로 결심했다.

로마는 민족이나 출생에 관계없이 출세할 수가 있었다.

 

매력을 느낀 타르퀴니우스는 전재산과 가족을 이끌고 로마로 입성한다.

유능한 그는 정착한지 10년만에 인정을 받고 출세를 한다.

하지만 그는  그정도 출세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안쿠스왕의 사후에 유언집행자가 되었고, 시민들을 상대로 연설을 한다.

"난 로마태생이 아니지만 이방인들도 이곳에선 왕이되었다.

또한 나는 처자식과 전재산을 가지고 로마로 왔으니

이곳에 뼈를 묻을 각오도 하고 있다"

결국 민회는 압도적인 다수로 그를 왕으로 선출했다.

최초로 에트루리아인 왕이 탄생한 것이다.

 

5대 왕이 된 그는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즉시 원로원을 기반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으며,

전쟁에서는 수많은 전리품으로 시민들로 부터 인기를 얻기도 하였고

대대적으로 로마를 개발하였다.

그때까지 로마의 7언덕 사이의 평지는 습지대였는데 이곳을 개간하여

로마의 중심지로 만들고 기존의 하천은 하수도를 만들어 해결했다.

이곳은 '포로 로마노' 라는 구역이 되며 오늘날에도 이렇게 불린다.

그리고 대규모 공사들을 벌이는데 이때 필요한 기술들은

자기출신인 에트루리아인들을 고용하여 해결한다.

 

타르퀴니우스는 언젠가 우연히 '세르비우스' 라는 에트루리아 소년을 만나게

되는데 이 소년에게 끌려 나중에는 자기 사위로 삼게 된다.

나중에 타르퀴니우스가 만년이 되자 그의 자식들은 왕이 세르비우스를

왕으로 삼을까 두려워 왕을 죽이지만, 원로원은 세르비우스를 왕으로 선출한다.

 

● 6대왕: 세르비우스-툴리우스 (기원전 579 ~기원전 534년)

 

세르비우스는 왕이 되자마자 성벽건설에 착수한다.

로마전테를 둘러싸는 성벽으로 오늘날까지 일부가 남아있게 된다.

'세르비우스 성벽' 이라고 불리우는 성벽으로써,

훗날 카르타고의 명장인 '한니발' 조차 공략을 포기할 정도가 된다.

유능한 그는 군사적인 성공을 여러차레 거두기도 하고 군제개혁과 선거제도등의

개혁을 한다. 또한 최초로 인구조사도 실시했다.

그리고 병법을 확립하여 주변국에 대해 연전연승을 거둔다.

 

그는 만년에 두 딸을 결혼시킨다.

5대왕 타르퀴니우스의 두아들에게 두 딸을 결혼시키기로 한다.

근데 두딸도 두 아들도 각기 성격이 정반대였다.

한딸은 착하고 한 딸은 드세었다. 한 아들은 온건하고 한 아들은 야심가였다.

근데 세르비우스는 성격이 틀린 사람끼리 짝을 지어주었다.

이것은 후에 큰 화근이 된다.

 

● 7대왕:  거만한 타르퀴니우스 (기원전 534 ~ 기원전 509년)

 

세르비우스의 두딸중 하나인 툴리아는 자기의 순진한 남편을 무시해버린다.

그리고 남편의 형인 타르퀴니우스를 유혹한다.

그후 툴리아의 남편과 타르퀴니우스의 부인은 쥐도새도 모르게 죽고 만다.

과부와 홀아비가 된 그들은 결혼한다.

그리고 에트루리아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왕인 세르비우스를

암살해버린다. 세르비우스의 장례식은 금지되고 타르퀴니우스는 왕이 되었다.

그리고 선왕과 친했던 자들은 모조리 죽였다.

그 후, 시민들은 그를 '거만한 타르퀴니우스' 라고 부르게 됐다.

 

거만한 왕은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 주변국과의 싸움에서 늘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는 늘 불안했다. 시민들이 그를 미워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변국과의 화평을 매우 중요시했다.

특히 에트루리아와 세력을 믿고 의지했는데 이당시 에트루리아인은

로마에서는 막강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쇠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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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의 탄생 -- 유니우스 브루투스.

 

왕정인 로마가 공화정으로 이행하는데 가장 큰 공로자는

바로 '유니우스 부르투스'  이다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에겐 '섹스투스' 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친척 '콜라티누스' 의 아내를 강간하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자살을 하고

콜라티누스와 알고 지내던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전략에 따라 그녀의

시체는 로마시민들에게 공개된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시민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경위를 설명하고

타르퀴니우스를 비난하는 연설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타르퀴니우스에게 맺혀있던 시민들의 불만이 마침내 폭발했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당장에 민병대를 조직해 행동에 들어가 왕을

추방하기로 하고 이를 알고 로마로 황급히 달려온 왕은 로마입성을 거절당한다.

이로써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의 치세는 25년 만에 끝나고 만다.

이때부터 로마는 왕이 없는 공화정으로 이행한다(기원전 509년).

 

왕의 조카이기도 한 그는 선견지명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왕을 추방한 직후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시민들을 '포로 로마노' 에 모아놓고

앞으로 로마는 어떤 왕도 받아들이지 않을것이며, 어떤 인물도 로마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시킨다.

그리고 왕대신 해마다 민회에서 2명씩의 집정관을 선출하기로 결정한다.

임기는 1년이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콜라티누스는 최초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에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왕위를 되찾기 위해 공격해온 타르퀴니우스

왕과 전투를 벌이다 결국 장엄하게 죽는다.

 

그의 사후에도 로마인은 그를 기억하며 공화정을 필사적으로 지킨다.

이리하여 250년간 이어지던 로마의 왕국시대는 막을 내리고

500년간 이어지는 로마공화정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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