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올림피아 제전이라고도 한다. 고대 올림픽 기원에 관해서는 BC 1600년 또는 BC 776년 전후라는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후자가 정설로 되어 있다. 경기는 올림피아에 신전(神殿)이 있는 그리스의 주신(主神) 제우스에게 바치는 제전 경기로서 오늘날의 경기와는 차이가 많다. 개최시기는 오늘날의 7~9월 사이 만월(滿月)이 있는 날을 중심으로 실시되었는데 전성기에는 5일 동안 계속되었다.
경기종목은 개인경기로서 초기에는 경기장 끝에서 끝까지(1스타디:발굴 후 실측에 따르면 192.27m, 스타디움의 語源) 달리는 단거리경주뿐이었고, 제1회 대회 우승자는 에리스의 크로에포스였다. BC 724년 제14회부터 경기장을 1왕복하는 경주, BC 708년 제18회부터 레슬링과 5종경기(멀리뛰기·창던지기·단거리경주·원반던지기·레슬링) 등 점차 경기 종목이 증가하여 전성기에는 13종목에 이르렀다. 고대 올림픽 전기간을 통하여 행해진 경기를 순서에 따라 기술하면, 단거리·중거리(1왕복)·장거리(3~12왕복)의 각 경주, 5종경기, 레슬링, 복싱, 4두전차경주(四頭戰車競走), 경마, 판크라티온(레슬링과 복싱을 합성한 격투경기), 무장경주(武裝競走), 2두(二頭) 노새 전차경주, 빈마경마(牝馬競馬), 2두전차경주, 나팔수 경주, 전령(傳令)경주, 준마(駿馬) 4두전차경주, 준마 2두전차경주, 빈준마(牝駿馬)경마, 준마 10두전차경주의 19종목이었다.
BC 632년 제37회부터는 소년경기(少年競技)가 추가되어 경주·레슬링·5종경기·복싱·판크라티온 등이 실시되었다. 이외에도 올림픽에서는 시인·철학자·예술가들이 문학·시가·예술·연극 등을 겨루었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가 아테네의 역사적 연구를 처음으로 발표한 것도 올림픽에서였다. 올림픽 참가자 자격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시민권이 있고, 범법행위가 없으며, 주신 제우스에 대한 불신행위(不信行爲)가 없었던 자에 한정되었다. 또 여자는 참가가 금지되었고, 기혼여성은 관람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경기는 전라(全裸)에 맨발로 하였고, 우승자(전차경주는 소유자)에게는 올리브의 잎으로 만든 관을 주었다. 제전 전후 3개월간은 그리스 모든 폴리스(polis:도시국가)가 휴전하였다. 그리스가 마케도니아와 로마에 정복당한 뒤 경기에 상금을 주는 풍습이 나타났다. 그러나 BC 80년에 성년남자 전부가 로마에 끌려가고 올림피아에서는 소년경기만 실시되었으며, 67년 황제 네로가 직접 참가하기 위하여 제211회의 회기를 2년이나 늦추는 등 올림픽은 점차로 쇠퇴해 갔다. 고대 그리스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올림픽 제전경기는 393년 제293회를 마지막으로, 다음해 그리스도교를 국교(國敎)로 정한 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대제(大帝)의 이교금지령(異敎禁止令)에 따라서 1160년의 오랜 역사의 막을 내렸다.
제290회 이후에는 우승자의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426년 테오도시우스 2세의 이교신전파괴령(異敎神殿破壞令)으로 올림피아 신전도 파괴되고 잔해만 남은 것도 지진과 홍수로 폐허가 되었다. 신역(神域)의 유적은 1876~1881년 사이 독일의 고고학자 E.쿠르티우스가 발굴하였고, 이어서 1942년 독일 발굴대가 재발굴을 완료하였다. 또한 경기장의 유적은 독일의 발굴대가 1952년 발굴에 착수하여 1961년에 완료하였다.
승자에게는 월계관이 씌어졌으며, 500드라크마의 상금이 주어졌다. 또한 공개적인 축하행사에서 귀빈석을 차지할 수 있는 권리와 평생 연금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