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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당시 서양 제국들과 비교해 일본이 식민지에 쏟은 자본이 얼마나 됬을 까? 식민지와 본국을 구분하지 않은 일본. 당시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이 착취만 했던 것과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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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 공업단지 전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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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 공업단지 전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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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의 막대한 전력 자원을 공급하는 부전강 수력 발전소



1950년 7월30일, 8월1일, 8월3일, 8월24일 네차례에 걸쳐서 미극동공군 (FEAF : Far East Air Force) 는 1,582톤의 막대한 양의 폭탄을 흥남공업지대에 투하 하였다. 거기에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미공군은 개전초기부터 거기에 항공전력을 집중했던 것일까? 그리고 흥남대공습이 발생하자 일본의 언론들이 호들갑을 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제부터 그 이유를 하나하나 집어보도록 하자.

 

1917년 이래 조선총독부의 지원아래 일본의 민간자본은 조선제당, 평양시멘트공장, 미쯔비시 제철공장등을 세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전 산업은 불경기로 난항을 겪는다. 당시 일본 내지 시장에서는 쌀공급과잉으로 조선쌀의 일본본토 반입을 저지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조선총독부도 이에 응하여 산미증산계획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쌀의 본토 반입을 금지하였다. 또한, 일본 식민지 중에서 자립을 못한것은 조선 뿐이었는데 1932년까지 재정원조로 일본 정부당국을 곤혹스럽게 하였다.

 

이러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 농업 중심의 산업개발정책에 좌절을 맞본 조선총독부는 공업개발로 방향을 전환한다. 마침 중국대륙의 만주사변으로 수요의 급증을 예측한 측면도 있다. 민간 차원에서도 1931년부터 시작된 '중요산업통제법'의 시행으로 일본본토 카르텔의 탈출을 시도한 자본이 법 적용의 예외 구역인 조선과 대만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때 일본의 노구찌라는 인물이 흥남에 질소비료공장을 세우려고 했는데 ... 그의 지인들은 중국, 러시아 때문에 중국국경에 인접한 지역에 공장을 세우는건 매우 위험하다며 만류하였다. 이에 그는 조선이 위협받는 상황이 온다면 일본 본토역시 동일한 위험스러운 상황에 처한다는 말인데 ... 그런 일은 있을수 없는 일이라며 ... 그의 사업구상을 밀어 붙였다. 이러한 인식은 당신 일본 기업인들의 보편적인 정서 였다.

 

이렇게 시작된 흥남공업지대의 규모를 살펴보자. 먼저 공장을 돌릴려면 전기가 필요한데, 당시 흥남산업단지를 위해 건설했던 수력전기가 190만kw 이며, 종전 당시까지 건설중이었던 규모 역시 130만kw 로서 ... 총 320만 kw 규모 였다. 이게 얼마나 큰 규모였는가 하면, 당시 일본 본토 수력발전 총설비 규모가 650만kw에 불과 했다고 하니 ...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공장군의 면적은 부지 약600만평 이었으며, 이 중에서 사택 및 기타 후생설비가 300만평 이었다. 또한, 종업원 수는 45,000명 으로서 각종 중화학 공장에서 근무하였다. 각 공장의 규모를 보면, 수전해공장 세계1위, 암모니아합성공장 세계3위 였으며, 기타 일본 제1위는 유지, 화약, 카바이드, 마그네슘, 공작, 메탄올합성, 석탄액화공장 등 이 있었다.

 

요즘 남해안의 여천공단 등 거대한 파이프들이 펼쳐진 중화학공단처럼, 흥남공업단지의 각 회사들은 송전선, 용수파이프, 원료파이프 등이 종횡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 수송망 역시 ... 국철인입선, 신흥철도, 도록코선, 트럭 등의 수송망에 의해 하루 1만톤의 물자가 수송되었다. 전용항구에는 1만톤의 기선이 정박할 수 있었으며, 2~3천톤급은 10척이 동시에 접안 할 수 있는 규모 였다.

 

흥남공업단지의 사용전력은 보통 50만킬로 정도 되었는데 ... 이것은 당시 중국 만주국 전체 전기사용량 보다 많은 규모 였다. 공장용수는 120만톤으로 일본 6대도시 사용량의 중간 레벨에 들어갈 정도 였다. 추가적으로 ... 13억원의 전쟁재해보험에 가입되어 있었는데 ... 41년 당시 조선의 화폐총액은 7억4,160만원에 불과 했다. 해방 이후의 남한과 비교해도 ... 1961년 당시 하루 전체 전기사용량이 20만kw, 경제개발계획이 시행된 이후인 66년 55만kw에 이용율이 61.6%에 불과했다는걸 감안하면 ... 격차는 좀더 벌어진다.

 

어쨋든 ... 1927년 부지매수에 착수하여 20년 만에 이룬 흥남의 공장군 규모는 세계 1~2위를 점했던 것으로 예측된다. 즉, 이땅에 울산이나 창원, 안산, 구미 등의 강력한 공업지대의 부지조성이 시작되기 40~50년 전에 이미 ... 한반도에는 세계 1~2위를 다투는 공업단지가 있었던 것이다.

 

 학생들이 20세기초 철강업의 메카였던 미국의 피츠버그나 자동차의 디트로이트, 혹은 영국의 맨체스터 등은 잘 알면서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한게 아닌가 싶다. 대학원생을 포함하여 일제시대 당시 한반도의 공업상황에 대해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막연한 '장군의 아들' 분위기의 방아간 수준의 제분소나 떠올릴 것이다. 어쨋든 ... 타조처럼 외면하고 싶을때 머리를 모래 속에 박는다고 엄연한 현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핀란드나 스웨덴, 혹은 네덜란드 처럼 현실은 현실 그대로 받아들여야 ... 좀더 나은 미래를 건설할 수 있고, 자신을 정확히 평가할 수 있다.

 

근데 ... 패전 후 일본의 기업인들은 왜 그들의 회사를 그대로 두었을까? 당시 소련군이 8월7일 함경북도로 진입했음에도 그들은 태연히 출근하여 업무를 보았다. 점점 적군이 다가오는 것이 확실해 지자 회사 내부에서는 공업설비를 파괴하는 쪽과 그대로 남겨두자는 두 편으로 갈리게 되었다. 결국 공장설비는 그대로 보존 되었는데 그 사유인즉슨 ...

 

첫째, 1차대전 당시 폴란드에 있던 독일인들이 전후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공장을 경영했었고, 최악의 경우에도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즉, 그들은 전후에도 한반도에서 공장을 경영하고자 했으며, 정부에 의해 압류될 경우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 조선인은 공장을 운영할 기술적, 경영적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으며, 따라서 공장운영을 위해 일본인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 중요공장인 NP 관련 시설은 일본육군의 강압에 의해 파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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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의 원폭제조 기초 연구에 쓰인 입자가속기(사이클로트론)
이미 선진국의 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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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유가와 히데키 박사. 니시나 박사와 
함께 일본 핵 물리학의 거두로 손꼽힌다. 그런 그가 어느날 흥남의
노구치 공장을 방문해 연구원 들을 대상으로 핵 물리학 강연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왜 흥남을 방문했으며, 왜 이곳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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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미국 의료 지원단으로 파견되어 일본에서 근무한 
레온 톰슨을 미국 시애틀 근교에서 어렵게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일본 근무 당시 미국인 과학자들이 일본의  원폭 설계도를 놓고 
설명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가 미국 과학자들로부터 알게 된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일본의 원폭 설계도는 미국이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 폭탄과 매우 흡사했으며, 설계도대로 
제작 될 경우 작동도 가능했다.

간발의 차이였군. 미국은 해도 되고 일본은 하면 안 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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