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이슬람화 (서기 1000년)        1000 ~ 1100  2009. 4. 17. 09:59

반응형
 인도는 서기 5세기 굽타 왕조의 힌두교와 불교의 융화정책 아래 불교가 쇠퇴하여 인도에서 이미 사라져가 가고 있었다. 굽타왕조의 융화정책은 의도적으로 불교를 힌두교의 범주에 넣으려는 교활한 시도였으며 그것은 성공하여 굽타왕조 때부터 인도는 크게 미개화되는 사태를 맞는다. 결국 굽타왕조는 멸망하였으며 인도 전역에 경제력도 영향력도 별로 찾아볼 수 없는 힌두 약소국들만 난립하게 되었다.

서기 6세기 비잔틴에서 그리스도교를 공부한 마호메트는 이슬람을 창제했다. 그 이슬람 무리는 이윽고 서기 1000년대가 되자 인도지방까지 침략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앞서 페르시아제국이 비잔틴과의 오랜전쟁끝에 쇠약해진 틈을 타 교활한 이슬람의 후방공격으로 멸망하자 조로아스터교도들이 먼저 인도로 종교의 자유를 찾아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슬람의 침략은 쇠퇴하여 무기력한 인도의 소왕국들에게 이것은 엄청난 시련이었다.

처음으로 인도를 침략한 자는 아프가니스탄에 세워진 가즈니 왕조의 마흐무드(재위 998년~1030년)로 이교도라는 이유로 인도인들을 닥치는데로 살육하고 약탈하였다. 마흐무드의 의도는 정복이 아니라 살육과 약탈, 재산 축적에 있었다. 이슬람교에서는 마흐무드를 대왕으로 칭한다. 알라(야훼)에 대한 신앙심이 깊었으며 이교도들을 살육한 공로에서이다. 약탈과 침략은 무려 10회나 넘게 반복되었다. 침략은 받은 지역은 쑥대밭 또는 폐허가 되거나 사람이 살지 않거나 아예 지도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이슬람의 2차 침략은 가즈니 왕조를 쓰러뜨리고 세워진 고르 왕조가 계속했다. 고르 왕조의 술탄인 기야드 웃딘은 아우 무함마드(Muhammad of Ghor)에게 인도 정복과 알라(야훼)의 말씀을 선포할 것을 지시했다. 무함마드는 약탈뿐만 아니라 도시를 점령해나가며 인도 북부에 이슬람교를 강요 했다. 물론 개종을 거부한 마을은 파괴되고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무함마드는 불교세가 약하게나마 남아있던 지금의 인도 비하르주, 우타르프라데시 주등을 침략하며 불교인들을 닥치는데로 살육하고 불상의 목을 치며, 사찰을 불태웠다. 날란다 대학 포위전의 경우 달아나는 승려까지 잡아 10만 여명을 학살하여 날란다 대학은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 무장조차 하지 않은 승려들을 학살한 것이다. 이로써 인도에서의 불교는 끝나버린 것이다. 살육만 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파괴와 방화도 일삼고 그 지역을 대대로 탄압하여 비하르의 경우 이슬람시대부터 지금까지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주로 남아있다.

무함마드에 의해 북인도 전역이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었다. 북인도의 서쪽인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서부터 동쪽끝인 벵갈까지 이다. 하지만 무함마드는 1206년 내분으로 피살당했다.

이어 고르 왕조에서 노예로 있던 아이바크가 델리를 수도로 세우며 노예 왕조를 세우게 된다. 노예 왕조에서 부터 로디 왕조까지 4개의 왕조를 델리 술탄국(칼리페이트(칼리프국)는 기독교권에서 제국, 술탄네이트(술탄국)는 기독교권에서 왕국, 에미리트(에미레이트, 에미르국)는 기독교권에서 공국과 같은 위치를 차지한다.)라고 부르며 티무르의 후손이 무굴 왕국을 세워 멸망시킬 때까지 북인도를 지배한 이슬람 왕조였다.

 즉 델리는 이전 힌두교 시대때까지는 존재하지도 않는 촌동네에 불과했으나 이슬람이 인도를 침략하여 북인도를 지배하면서 수도로 세웠고 이슬람 왕조동안 쭉 수도로 군림해온 이슬람교 도시이다.

 1700년대에 대영제국이 인도를 정복할 시기에 인도에 불교란건 남아있지 않았으며, 이슬람교도는 인도 전체 인구의 50%를 육박했다. 특히 남인도는 이슬람 무굴왕조에 대항해 용감하게 싸운 힌두 왕조들이였으며 그들은 마라타 연맹이라 불린다. 즉 남인도에 이슬람에 퍼지지 않았다고 볼 때 북인도의 이슬람교도의 비율은 70%를 헤아리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인도는 북인도는 이슬람이 대부분이라 낙후되고 냄새나고 미개하지만 힌두교가 대부분인 남인도는 깨끗하고 IT의 중심지로서 떠오르고 있다. 현재 IT에 진출하는 인도인들은 이슬람교도는 없고 대부분 힌두교도들이다.
반응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