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마 주원장(명나라 태조)        1200 ~ 1300  2009. 4. 28.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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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중국 역사상 세 손가락(유교시작:한, 주자문치:송, 쇄국중화:명) 안에 꼽을 최악의 쓰레기 왕조 명(明)

중국이 개화기에 미개한 것은 쇄국을 해서가 아니라 동양문화 자체가 미개했기 때문이다.(그나마 비유교권인 태국이나 일본이 유교권인 베트남, 중국, 조선보다야 나았지만) 동양이 우수했다면 쇄국을 했어도 잘 살았을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의 서양은 동양의 문화를 압도해서 당시 미개한 동양 유교문화를 받아들일 필요가 전혀 없었다. 청나라의 경우는 유교국가로 한족들이 잘 동화했던 완벽한 중국인의 나라였다. 이런 나라를 만주족이라서 망했느니 하는 미친 유림들의 망언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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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원장의 부인이 마씨였는데 책에 말이 발이 크게 그려져있는 걸 보고 마부인을 욕하는거라고 생각하고 그걸 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물론이고 그게 쓰여진 마을사람도 다 죽이고 마을도 초토화시켰다.

2. 공신들 수만명을 이유도 없이 다 잡아죽이다.(살을 벗겨내고 불에 지지고)

3. 미친광이 살인마 주원장

자기이름이 책안에 딱 한 글자 들어갔다고 책을 불사지르고 사람을 산채로 땅에 끌어묻었으니 분서갱유보다 더욱 잔인한 자였다. 

주원장 얼굴

  

명(明) 태조(太祖)는 이름이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이다. 장지는 응천효릉(應天孝陵: 지금의 강소성 남경시 교외 종산<鐘山> 남쪽)에 있다.

주원장(朱元璋)은 호주종리(濠州鐘離: 지금의 안휘성 봉양현<鳳陽縣> 동쪽) 사람으로, 가난한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소년 시절에는 지주 집에서 목동으로 생활하기도 하였다.

 

1344년 가뭄과 역병으로 앞길이 막막해진 주원장은 황각사(皇覺寺)로 가서 승려가 되어 회서(淮西) 지방을 떠돌아다니기도 하였다. 당시에 홍건군(紅巾軍)의 봉기가 발발하자 1352년에 그는 호주(濠州) 곽자흥(郭子興)의 봉기군에 투신하였다. 곽자흥은 용감하면서도 지혜로운 주원장의 면모를 한눈에 알아보고 그를 호위병으로 발탁하였으며, 또 양녀 마씨(馬氏)를 그의 베필로 주기도 하였다. 그후 그는 군대를 확대 편성하여 남방으로 진격하였으며, 1356년에는 한림아(韓林兒)의 송(宋) 정권으로부터 좌부원수(左副元帥)에 임명되었다. 1356년 집경(集慶)을 점령한 후 응천부(應天府: 지금의 강소성 남경시<南京市>)라 개명하고, 송(宋)으로부터 강남행성평장(江南行省平章)에 임명되어 자칭 오국공(吳國公)이라고도 하였다. 이후에 그는 진우량(陳友諒)을 격파하고 오왕(吳王)이라 일컬었다. 또 장사성(張士誠)을 제거하고 한림아를 죽인 후 중원 정벌에 주력하였다. 1368년 정월 초나흘 응천(應天) 봉천전(奉天殿)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명(大明),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였으며, 응천을 수도로 삼았다.

1368년 8월 명나라 군대는 원의 수도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시)를 점령하고 원을 멸망시켰다. 그후 주원장은 다시 십 수년에 걸쳐 전국을 평정했다.

주원장은 재위 기간에 호구조사와 토지측량을 실시하여 어린도책(魚鱗圖冊: 남송 이후 중국의 토지대장)을 만들고, 수리사업과 둔전을 추진하는 등 농업을 장려하여 생산력을 증대시켰다. 건국 초기의 명나라 조정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 그는 여러 아들들을 번왕(蕃王)에 봉하고 여러 가지 제도를 신설한 것 외에도, 백관들을 엄밀히 감시 감독하여 대형 옥사를 일으키면서 많은 문무공신들을 무참히 죽였다. 그는 많은 검교(檢校)를 파견하여 백관들의 언행을 감시하고, 금의위(錦衣衛)를 설립하여 죄인을 고문하였다. 한 번은 문신 전재(錢宰)가 퇴청하여 집으로 돌아간 후에 입에서 나오는대로 시를 한 수 읊었다.

四鼓鼕鼕起着衣,   사방의 둥둥둥 북소리에 옷을 입고,

午門朝見尙嫌遲,   오문에서 알현하니 늦었다고 싫어하네,

何時遂得田園樂,   언제나 전원의 즐거움 누릴 수 있을까,

睡到人間飯熟時.   밥이 다 될 때까지 잠이나 자 둬야지.

 

이것을 검교가 몰래 엿듣고는 주원장에게 보고했다. 그 이튿날 주원장은 그에게 "그대가 어제 훌륭한 시를 한 수 지었다던데, 난 늦었다고 싫어한 적이 없으니 '걱정했다'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말했다. 깜짝 놀란 전재는 전신에 식은땀을 흘리며 계속해서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를 올렸다.

검교는 백관 가족들의 언행도 감시 감독하였다. 한 번은 검교가 한 여승이 화고(華高)와 호대해(胡大海)의 아내에게 서역의 승려를 믿어라고 유혹하면서 '금천교(金天敎)'법을 행하는 소리를 엿듣고 주원장에게 보고했다. 이에 주원장은 그 두 부인을 여승과 함께 강물에 집어던져 죽이라고 명령했다. 검교는 각 관청에 두루 배치되어 있었다.

주원장은 간혹 평민 복장으로 갈아입고 궁궐 밖으로 나가 관리들의 언행을 직접 염탐하기도 하였다. 어느날 그는 갑자기 홍문관(弘門館) 학사 나복인(羅復仁)의 집으로 들어갔다. 나복인은 성밖 좁은 골목의 쓰러질 듯 남루한 헌집에 살고 있었다. 이때 마침 사다리에 올라가서 담장을 칠하고 있던 나복인은 황제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아내에게 작은 나무의자를 가져오게 하여 주원장에게 앉도록 권했다. 주원장은 그의 집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남루한 것을 보고, "그대처럼 훌륭한 수재가 어찌하여 이런 누추한 집에 산단 말인가!"라고 한 후 즉시 그에게 성밖의 큰 저택을 하나 하사하였다.

주원장은 역대 제왕들 중에서도 가장 참혹하게 공신들을 죽였다. 그는 여러 차례 대형 옥사를 일으켰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호유용(胡惟庸)과 남옥(藍玉) 사건이었다.

호유용은 좌승상을 역임하였으나 1380년에 권력남용과 역모죄로 체포되었다. 주원장은 그를 사형에 처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연루된 자들을 1만여명이나 죽였다. 주원장은 그 틈에 중서성(中書省)을 아예 폐지한 후 다시는 승상을 두지 않고 황제가 직접 정무를 관리하였다.

남옥은 공훈이 탁월한 장수로 양국공(凉國公)에 책봉되었다. 1393년에 금의위(錦衣衛) 관리가 그를 모반죄로 밀고하자 주원장은 그를 죽이고 연루된 자 1만 오천여명도 색출하여 함께 죽였다. 용맹한 장수들은 거의 대부분 이 사건에 연루되어 몰살당했다.

서달(徐達)은 제1등 개국공신으로 두문불출하면서 매사에 소심할 정도로 신중을 기하여 주원장이 그를 제거할 구실을 못찾도록 했다. 1385년 서달은 등에 악성 종기가 났다. 당시에는 이 병에 걸리면 거위고기를 먹어서는 안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주원장은 이 틈을 이용하여 그에게 거위고기를 먹으라고 하사했다. 서달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그것을 먹었으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죽고 말았다. 주원장이 만년에 이르렀을 때 개국공신들은 거의 대부분 그에게 참살 당하고 남아있지 않았다.

주원장은 엄격한 형법으로 법을 위반한 관리들을 처벌했다. 1358년 주원장은 김화(金華)를 공격할 때 식량이 부족하여 금주령을 내렸다. 그런데 대장군 호대해(胡大海)의 아들이 금주령을 위반하고 술을 빚었다. 중원장은 즉시 그를 사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도사(都事: 도찰원, 오군도독부 등에서 문서출납 담당) 왕개(王愷)가 나서서, "호대해는 지금 병력을 거느리고 소흥(紹興)을 한창 포위 공격하고 있는데 그의 아들을 죽이는 것은 부당하오니 그를 용서해주소서!"라고 간청하였다. 이 말을 듣고 크게 진노한 주원장은 "호대해가 반발하더라도 내 명령을 취소하지 않겠다!"라고 한 후, 직접 칼을 뽑아 호대해의 아들을 죽였다.

주원장은 황제에 오른 후에 법규를 위반한 관리들을 더욱 엄격하게 처벌하여 이로써 죽은 사람이 수 만명에 달했으니, 그의 형법이 전례없이 얼마나 잔혹했는지를 알 수 있겠다. 형벌로는 일반적인 참수와 족주(族誅: 가문 몰살) 외에도, 추장(抽腸: 창자 꺼내기), 박피(剝皮: 껍질 벗기기), 알슬개(膝蓋: 무릎 후벼파기), 잡사(死: 압사시키기) 등이 있었다. 그는 관청 정문 앞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고 부정부패 등의 범죄를 저지른 관리를 사형에 처한 후 가죽을 통째로 벗겨내어 그 허수아비 위에 둘러씌워서 관청을 출입하는 관리들의 경계로 삼게 했다. 이런 잔혹한 형벌들은 조정내에서 극도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모두들 안절부절 마음을 졸여야만 했다. 조회 때 주원장이 옥대를 배 아래에 내려두고 있으면 그것은 사람을 많이 죽이겠다는 신호이기 때문에 문무백관들은 얼굴빛이 창백해져 부들부들 떨었고, 옥대를 가슴 앞으로 들고 있으면 사람을 많이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관리들이 매일 집에서 출근하기 전에 제일 먼저 아내와 이별하면서 뒷일을 부탁하였으며, 만약 이 날 살아서 돌아가면 온집안이 잔치 분위기였다.

주원장은 자신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문인들을 진압하겠다는 것을 명분으로 문자옥(文字獄)을 크게 일으키기도 했다. 예를 들면, 절강부학교수(浙江府學敎授) 임원량(林元亮)이 어떤 사람 대신 사은표(謝恩表)를 지어주면서 "作則垂憲"이란 구를 썼는데 주원장은 "則"이 그를 "賊"이라 욕한 것이라 우겼다. 또 상주부학훈도(常州府學訓導) 장진(蔣鎭)이 하표(賀表: 조정 경사에 신하가 왕실에 올리는 축하의 글)를 지어주면서 "睿性生知"란 구를 썼는데 주원장은 "生"자를 "僧"자로 잘못 보고 자기를 중이 된적 있다고 고의로 욕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임원량과 장진을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주원장은 이렇게 잔혹한 수단으로 신하들을 통제하는 것이 초기에는 필요한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일시적인 방편일 뿐 지속적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만년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방법을 본받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주원장은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황제에 오른 후에도 그는 소박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며 음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강남행성(江南行省)의 장관이 진우량(陳友諒)의 황금조각 침대를 그에게 주자 그는 화를 내면서, "이것이 맹창(孟昶)의 칠보 요강과 어떻게 다른가?"라고 말하고는 그것을 부숴 버리게 했다. 그는 신하들에게 상소문을 쓸 때도 문장을 간결하게 쓰도록 지시하였다. 형부주사(刑部主事) 여태소(茹太素)가 만 자에 이르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6370자까지 읽어도 모두 빈말 뿐 구체적인 건의 내용이 없자 주원장은 화를 크게 내며 여태소를 불러와 매질을 가하라 명했다. 그 다음날 저녁에 그가 다시 그 상소문을 계속 읽어내려가게 하였더니 16500자 이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본제가 언급되면서 5개 항의 건의사항이 나왔다. 이 중 4개 항목은 취할만 하다고 여기고 즉시 시행토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상소문을 500여자로 줄여도 충분한데 너무 번잡하게 썼다고 지적하고는 번잡한 문장을 듣기 싫어 여태소를 때린 점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여태소를 충신이라 찬양하였다.

주원장은 어린 시절에 열심히 공부를 배우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정권 초기에는 이선장(李善長), 유기(劉基), 주승(朱升) 등과 같은 뛰어난 학자를 중용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자녀들의 교육도 매우 중시하여 유명한 학자를 스승으로 초빙, 자녀들의 학문과 인성을 잘 지도하도록 하였다. 주원장의 엄격한 교육으로 자제들은 성인이 된 후에 대체로 능력이 뛰어나 일을 잘 처리하였다.

주원장은 원대(元代) 전기에 태자를 책봉하지 않아 여러 차례 정변이 일어났던 점을 교훈으로 되새기며 오왕(吳王)에 올랐을 때 이미 장자 주표(朱標)를 세자에 책봉하였으며, 황제가 된 후에는 그를 태자로 책봉하여 유명한 문인과 조정 중신들을 그의 스승으로 초빙하였다. 태자가 성인이 된 후에는 정사를 처리하게 하고 치국의 법도를 익히게 하면서, 항상 인자함(仁), 현명함(明), 근면함(勤), 결단성(斷)을 갖추어야 천하를 잘 다스릴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태자 주표는 온화하고 얌전하여 마치 서생과 같았다. 그는 천성이 진실하고 온후하여 아버지 태조 주원장이 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죽이는 것에 찬동하지 않았다. 주원장이 공신을 죽이려 할 때마다 그는 항상 아버지를 만류하며 인자함을 근본으로 삼고 친척간의 정과 형제간의 우애를 생각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때문에 부자간에 자주 의견충돌을 일으켰다. 한번은 주원장이 태자의 스승 송렴(宋濂)을 처형하려 하자 주표는 울면서 용서를 구하였다. 화가 난 주원장은 "네가 황제가 되거든 그를 사면해주라!"고 하였고, 이 말을 들은 태자는 두려움과 불안에 떨다가 결국 강물에 투신 자살하였으나 간신히 구출되었다.

또 한 번은 주표가 아버지 주원장에게 "폐하께서 사람을 너무 함부로 죽이시니 감정을 상하게 하실까 걱정됩니다."라고 하였으나 주원장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주원장은 일부러 가시나무 막대기를 땅위에 던져놓고 주표에게 주워오라고 했다. 주표가 막대기에 있는 가시 때문에 머뭇거리며 얼른 줍지를 못하자 주원장이 말했다.

"네가 가시가 무서워 얼른 줍지를 못하니 내가 가시를 뽑아 버리고 다시 네게 주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자 주표는 "위로는 요임금순임금 같은 어진 임금이 계시고 아래로는 요임금과 순임금의 백성 같은 훌륭한 백성들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크게 진노한 주원장이 의자를 집어들고 주표에게 던지니 깜짝 놀란 주표는 내실로 뛰어들어갔다. 이 때 놀란 것이 병이 되어 주표는 그 후로 우울증에 시달리다 죽었다.

주원장은 어린 시절에는 생활이 가난하였고, 중년에는 전쟁으로 고생했으며, 40세 이후에는 온종일 국사에 시달렸고, 50세에 이른 이후에는 몸은 따르지 못하는데 마음만 앞섰다. 또 자주 고열이 나면서 환상을 좋아하고 악몽을 꾸며 때로는 마음이 매우 변덕스러워졌다. 그런 상황에서 태자의 죽음으로 상심이 극도에 달한 그는 기력이 더욱 쇠약해져 머리카락과 수염이 모두 하얗게 샜다. 그는 주표의 장자, 16세의 주윤문(朱允)을 태손(太孫)에 책봉하고, 태손이 중신과 노장들을 제압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다시 공신들을 주살하였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남아있던 부우덕(傅友德)과 풍승(馮勝) 등 몇몇 개국 원로들 마저도 죽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또 아들들이 태손과 황위 쟁탈을 벌일까 염려되어 특별히 <<영감록(永鑑錄)>>과 <<황명조훈(皇明祖訓)>>을 편찬하여 자손들에게 종법제를 준수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리고 누구든 이 제도를 고치는 자는 간신으로 간주하고 때려죽여도 무방하다고 규정함으로써, 모두가 어린 황제에게 복종하여 주씨 왕조가 오랫동안 평안무구할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1398년 윤5월 주원장은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져 마침내 병으로 쓰러졌다. 계미일(癸未日) 병세가 잠시 호전된 그는 황제에 오른 31년간 "위기에 대한 근심 걱정으로 하루도 게으름을 피지 않고 부지런히 일했다."는 유서를 남겼다. 이것은 그의 고난에 찬 일생과 통치계층 내부의 격렬한 투쟁 속에 처해 있던 그의 심경을 표출한 것이다. 이 유서 속에서 그는 태손 주윤문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여러 아들들은 상례를 치르기 위해 경성으로 달려올 필요 없이 각자의 영지를 지키라고 하여 변란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을유일(乙酉日)에 주원장은 경성의 서궁(西宮)에서 병사하였다.

주원장이 죽은 후에 그의 시호를 고황제(高皇帝)라 하고 묘호를 태조(太祖)라 하였다.

주원장은 생전에 많은 화가들을 물색하여 자신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그림이 모두 대단히 사실적이었다. 주원장은 용모가 잘 생기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적으로 그릴수록 그는 더 만족하지 못했다. 후에 어떤 화가가 그의 마음을 읽고 얼굴 윤곽은 비슷하게 그리고 안색은 매우 온화하고 인자하게 그렸다. 이것을 본 주원장은 대단히 흡족하여 여러 장 더 그리게 하여 자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래서 현재 명 태조 주원장의 상은 두 종류가 전해지고 있는데, 현재 본사이트의 상은 그의 미화된 상이다.

주원장의 무덤은 남경 종산(鐘山) 기슭의 완주봉(玩珠峰)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가 생전에 직접 묘지를 고르면서 이곳이 북으로는 종산의 주봉, 서로는 현무호(玄武湖)에 닿아 있는 것을 보고, 마치 큰용이 구슬을 안고 놀고 있는 비범한 기세 같아서 즉시 이곳을 묘지로 선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완주봉 남쪽에 손권(孫權)의 무덤이 있어 주원장의 무덤 앞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에 신하들은 풍수를 위해 손권의 무덤을 파내자고 건의하였지만 주원장은 오히려 "파내지 마라. 손권도 호걸 중의 한 사람인데 그가 나의 보초를 서도록 놔두어라."고 하였다. 그래서 현재 주원장의 무덤 앞 길은 정남 정동향이 아니고 동서향로 돌아나 있다.

 

주원장의 병이 악화되자 주원장은 황태손을 불렀습니다. 주원장은 자기 옆에 있는 가시 철봉을 들고, "이 철봉을 잡아보아라." 라고 황태손에게 말했습니다. 황태손이 당황해 하자 주원장은 "내가 그 가시들을 없애줄 것이다." 라고 말한 일화가 유명합니다. 주원장이 생각한 황태손에게 해가 되는 가시는 공신이지만, 실질적으로 황태손에게 해가 되는 가시가 황족이였던 것을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입니다. 만약 주원장이 땅속에서 연왕 주체가 정난의 변을 일으켜 남경을 점령하고 3대 황제로 즉위한 사건을 알았다면, 땅을 치고 후회했을 것입니다.

 

최근 베이징커지(北京科技)신문은 역대 황제 중에서 심리적 소양이 가장 떨어지는 황제로 명(明)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을 뽑았다.
주원장은 1368년 10월 21일 안훼이(安徽)성의 가난한 집안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중팔(重八)이었으며 17살에 전염병과 기근으로 부모 형제를 잃고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절에서 청소와 심부름을 하던 주원장에게 가장 힘든 일이 사천왕상의 다리 사이 먼지를 청소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황제가 되고 난 후 주원장은 모든 절의 사천왕상은 청소하기 좋도록 반드시 한 발을 들도록 명령했다고 하니 이는 사천왕상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25살에 홍건적의 두목 곽사흥(郭士興)의 군대에 들어가 실력을 인정받으며 무수한 전투를 치르며 세력을 키워 나간 주원장은 16년간의 전쟁 끝에 1368년 난징(南京)에 명나라를 세우고 황제에 등극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서민이 황제가 된 사례로는 한고조 유방에 이어 두번째인 빈농 출신 주원장의 황제 등극에 대해 농민봉기에 의한 역사적 필연이라고 낮게 평가하기도 하고 농민군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반원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어쨌든 여기까지는 주원장에게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황제가 된 후 주원장에게 슬슬 일종의 피해망상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자신과 함께 나라를 세웠던 개국 공신들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 것을 우려하여 재상 호유용(胡惟庸) 등 1만5천여 명을 반역죄로 숙청하고 자신의 출신과 못생긴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문자의 옥'으로 또 많은 지식인들을 제거하기도 하였다.
'문자의 옥'이란 주원장이 승려생활 때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광(光)', '독(禿)'자를 쓰거나 '승(僧)'과 발음이 비슷한 '생(生)'을 쓰는 행위, 반란군 출신이란 의미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자를 쓰는 행위를 무조건 처벌한 것을 말한다.
한 선비는 "빛이 가득한 천하에 하늘이 성인을 낳아 세상을 위해 법칙을 만들도다(光天之下,天生聖人,爲世作則)"라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대머리의 '광(光)', 스님의 '생(生)', 도적을 나타내는 '칙(則)'이 함께 있었으니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당시 관료들은 매일 집을 나서며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고 살아서 집에 돌아가면 껴안고 살아 돌아온 것을 기뻐할 정도였다고 한다.
주원장은 또 <대명법>(大明法)을 제정하여 폐지되었던 잔혹한 형벌을 부활시켰는데 반역죄의 경우 주범이든 동조자든 일률적으로 팔다리, 어깨, 가슴 등을 차례로 잘라 능지처참했으며 만 16세 이상의 모든 가족까지 멸하는 족주(族誅, 가문 몰살)에 처했다. 또 60량 이상을 횡령한 관리에 대해서는 사형한 후 껍질을 벗긴 후 군중들에게 게시하기도 하였다.
주원장의 히스테리칼 한 공포정치는 26명의 아들과 16명의 딸들에게 자신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물려주기 위함이었다. 즉 미천한 출생에서 시작해 최고의 지위인 황제에 오르면서 자신의 권력과 부귀를 보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정신분열증세로 나타난 것이다.
주원장은 왕위를 물려주려던 아들이 죽자 결국 손자인 건문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러자 네 번째 아들이었던 주체(朱棣, 영락제)가 '정난(靖難)의 변'을 일으켜 조카의 권좌를 찬탈하는 골육상잔의 비극이 연출되고 만다.
결국 황제의 무소불위의 권력은 늘 부메랑이 되어 황제에게 되돌아간다. 주원장은 자신이 평생 범한 과오 때문에 자신의 무덤이 파헤쳐질 것을 염려하여 철저한 보안 속에 자신의 묘를 만들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주원장의 묘인 효릉(孝陵)의 묘도는 발굴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주원장에 대한 두 장의 초상화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인자하고 덕 있어 보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야말로 추하고 못생긴 형상이다. 주원장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농민봉기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명왕조의 기반을 다졌다는 긍정적 평가와 극단적인 공포정치를 일삼는 정신분열증세의 폭군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출처 : 오마이뉴스 / 김대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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