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의 분쟁 1200 ~ 1300 2009. 4. 28.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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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스쿠스( Damascus )의 우마이아 칼리프조( Ommayad caliphate )는 661년에 창건되었고 711년 이베리아를 침공했지만 750년 압바스( Abbasid ) 왕조에게 칼리프자리를 찬탈당했고 스페인에서만 코르도바( Cordoba ) 칼리프령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11세기에 들어서면서 동쪽의 아랍수장( Arab emir )들과 서쪽의 베르베르( Berber )수장들간의 다툼으로 칼리프국은 1031년 이십여개의 독립국가들( taifas )로 갈라졌다.
11세기가 저물무렵 이베리아 북부에는 Leon, 카스티야( Castile ), 나바르( Navarre ), 아라곤( Aragon ), 바르셀로나( Barcelona ) 백국 등 다섯개의 기독교왕국들이 있었다. 나바르의 산초3세( Sancho III )는 기독교왕국들간의 연합을 형성하여 1014년부터 무어( Moor )인들과 맞서려 했고 교황은 그가 Saragossa의 수장국을 공격하는 것을 축복했다. 하지만 1063년 전쟁 중 아라곤의 Ramiro1세가 이슬람에 의해 암살당했고 이것은 본격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결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교황은 스페인에서 십자가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은총을 약속했고 이에 북이탈리아와 프랑스 남부에는 군대가 모여들어 무어의 패배를 위해 피레네( Pyrenees ) 산맥을 잇따라 넘어갔다.
그러는동안 Leon과 카스티야의 페르디난드 대왕( Ferdinand the Great )은 1064년 전선을 Coimbra까지 전진시키는데 성공했다. 다음해 그가 죽었을때 그의 두 아들간의 내전으로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지만 Leon의 알폰소( Alfonso )는 1073년 왕국을 재통일하고 분쟁중인 수장국들로부터 조공을 받아내 재정복( reconquista )에 필요한 군대룰 육성하는데 사용했다. 이시기 스페인에는 엘 시드( El Cid )라는 칭호로 더 많이 알려진 Ruy Diaz de Bivar라는 카스티야의 용병이 있었는데 그는 발렌시아( Valencia )를 근거지로 1099년 죽을때까지 상황에 따라 유리한 쪽에 붙는 전쟁을 하였다.
1085년 알폰소는 톨레도( Toledo )를 점령했지만 이에 위협을 느낀 taifas들은 당시 북아프리카에서 베르베르 부족들을 통합하고 알제리( Algeria )에서 세네갈( Senegal )까지 정복한 Almoravide (Murabti )파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Almoravide의 칼리프인 Yusuf Ibn Teshfin는 해협근처의 Algeciras를 기지로 삼고 북진하여 1086년 10월 23일 Badajoz 근처에 있는 Zalaca( Sagrajas )에서 기독교연합군을 대파하였다. Yusuf는 반도를 에브로( Ebro )강까지 정복했으며 Badajoz와 Saragossa를 제외한 모든 수장국들을 그의 지배하에 두었고 아프리카로 귀환할 때 삼천여명의 베르베르인들을 안달루시아( Andalusia )의 무어인들을 돕기위해 남겨두었다.
이번에는 기독교측이 구원을 요청할 차례였다. 1089년 교황은 스페인에서 이교도와 싸우는 것이 예루살렘( Jerusalem ) 순례와 같은 반열에 있다고 선포했고 11세기가 끝날때까지 스페인의 전쟁은 서유럽의 많은 기사들을 끌어들였다.
Santarem과 리스본( Lisbon )은 1093년 점령했지만 같은해 Yusuf의 장군인 Seyr에 의해 다시 빼았겼고 Evora와 Badajoz도 그의 손에 넘어왔다. Yusuf는 11월 그라나다( Granada )에 입성하여 1094년에 이르러서는 Seville을 비롯한 안달루시아의 주요도시들이 그에게 점령되었다. 발렌시아만이 엘 시드가 죽을때까지 버텼지만 그뒤 톨레도를 제외한 옛 코르도바 칼리프령의 대부분이 Almoravide의 영토가 되었다.
알폰소는 1109년에 죽었고 그뒤 20년 동안 스페인의 왕국들은 내전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슬람측도 마찬가지로 모로코( Morocco )의 Almoravide 왕조가 쇠퇴하면서 스페인의 이슬람은 다시 독립수장들이 다스리게 되었다. 이 수장들 밑에는 많은 지역, 도시, 성들이 이었고 이들 역시 반독립상태였다. 수장들뿐 아니라 이들 지역, 도시, 성들은 끈임없이 서로와 전쟁을 벌였다.
1132년 카스티야의 알폰소는 Tagus 강 하류의 수장들과 전쟁을 벌였지만 1135년 Belatha의 수장 휘하의 리스본, Cintra, Santarem 도시연합군과의 Thomar 전투에사 대패하였다. 하지만 그는 Tagus강 남부와의 전쟁을 계속하여 1139년에는 Ourique 전투에서 Badajoz, Elvas, Evora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하였고 1147년에 코르도바는 그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무어인들의 분열은 1144년 Belatha의 Mertola 수장이 알폰소에게 Badajoz 수장을 견제해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쓴때에 정점에 이르렀다. 하지만 무어인들은 기독교인과 같이 같은 이슬람을 공격하는 것에 거부감을 나타냈고 알폰소는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같은 기간 아라곤의 알폰소1세( 또 알폰소냐?ㅡㅡ^ )는 계속해서 Murcia에 대한 공세를 1134년 죽을때까지 그치지 않았고 바르셀로나 백작은 그의 전선을 차차 남쪽으로 넓히고 있었다. 1137년 카탈루냐( catalonia, 카탈로니아라고 쓸까 하다가 아무래도 현지발음을 중요시하는 것이 낳다고 생각하여 카탈루냐라고 썼습니다 )와 아라곤은 정략결혼으로 통합되어 강력한 해군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으로 스페인 동북부에 대한 재정복이 수월해졌다.
한편 아프리카에서는 새로운 세력인 Almohade( Muwahhadis )가 아틀라스( Atlas )로부터 점점 강성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1145년 Almoravide를 쓰러뜨리고 다음해 스페인을 침공했다. Seville과 말라가( Malaga )가 그들에게 넘어갔고 다음 4년 동안 각지의 수장들을 복속해 나갔으며 기독교측은 수세로 몰릴 수 밖에 없었다. 안달루시아는 다시 아프리카의 지배아래 들어갔다.
1163년까지 스페인은 상대적으로 고요한 시대를 맞이했지만 곧 칼리프의 죽음으로 계승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틈을 타서 포르투갈은 1165년 Bejar와 Evora를 점령했고 1169년에는 Badajoz를 포위했지만 이것은 카스티야와의 조약을 위반하는 행위였다. 곧 포르투갈과 카스티야간에 내전( 기독교연합 내에서 생긴 일이니까 )이 벌어졌고 결과는 포르투갈의 패배였다. 이러한 기독교측의 분열때 새로이 등극한 칼리프는 재빨리 약화된 포르투갈로부터 영토를 탈환했고 포르투갈은 7년간의 휴전협정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양측의 전쟁은 1176년 기독교측이 Seville까지 진출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1184년 칼리프 Yusef2세( Abu Ya'kub )는 여태껏 Almohade가 스페인에 데려온 군대중 가장 뛰어난 정예군을 이끌고 해협을 건넜고 곧 Santarem을 공격했다. 하지만 Yusef는 전투에서 패배한체 심각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의 아들인 Yakub1세는 1188년과 89년 이베리아를 공격했지만 둘다 실패했다. 이에 그는 2년동안 기독교를 상대로 성전( jihad )를 북아프리카 각지에 설교하고 다니며 병력을 모았고 1192년 포르투갈을 침공했다. 포르투갈은 수세에 몰려 결국 Tagus를 자신들의 남쪽경계로 한다는 조약을 맺어야만 했다. 무어군의 다음 목표는 스페인이었다. Yakub는 1195년 7월 18일 카스티야군과의 Alarcos 전투에서 Leon과 나바르의 지원을 받지 못한 카스티야군을 거의 전멸시켰고 이 전투를 계기로 그는 승리자라는 뜻의 El-Mansur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Yakub는 천천히 북쪽으로 진군했고 마드리드( Madrid )와 Calatrava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톨레도는 끝내 그의 손에 넘어오지 못했다. 그가 죽자 기독교왕국들은 다시 연합하였고 Leon을 제외한 모든 이베리아의 기독교연합군은 Las Navas de Tolosa 전투에서 1212년 마침내 무어군을 대패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로 기독교측은 Guadalquivir 계곡으로의 통로를 얻게 되었고 이를 통해 코르도바의 심장부로 진군해 들어왔다. 오랜 기간 무어인들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해왔던 안달루시아는 이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안달루시아에서 Almohade의 세력이 쓰러지자 taifas들이 다시 등장했고 1225년에는 북아프리카 내에서 Almohade의 칼리프위를 놓고 내전이 한창이었다. 카스티야의 페르난도3세( Fernando III )는 이 분쟁에 끼어들어 Idris3세( El-Mamun )의 지지를 선포하고 모로코로 군대를 보내 Marrakesh를 점령했다. 페르난도의 위세는 1230년 Leon의 왕위까지 계승하면서 더욱 높아졌다. 곧 코르도바와 Murcia, Seville이 각각 1236, 1243, 1247년에 점령되거나 항복했다. 다른 기독교왕국인 아라곤의 재정복도 착착 이뤄져 마조르카( Majorca ), 미노르카( Minorca ), 발렌시아, Ibiza 등이 Jaime1세에 의해 각각 1229, 1233, 1235년에 정복되었다. 1260년에 이르러 이제 스페인에 남은 무어의 영토는 카스티야의 속국으로서 간신히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그라나다 뿐이었다.
한편 북아프리카에서는 Almohade가 한때 Alarcos와 Las Navas 전투에 참전시킨적이 있는 Zenata라는 부족의 분파인 Beni Marin( Marinides )에게 축출되었다. 1258년 마지막 Almohade의 왕자가 죽음을 당함으로서 왕조는 멸망했다.
1273년 모로코에서는 새로운 왕조가 페즈( Fez )에서 창건되었고 그라나다의 모하메드2세( Mohammed II )는 페즈의 창건자 Yakub2세에게 Tarifa를 떼어주는 대신 기독교연합의 공격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였다. Yakub는 1275년 스페인에 상륙하여 그의 광신적인 Guzat 베르베르부족을 이끌고 멀리 Jerez까지 공격하였다. 1279년에도 스페인을 침공했지만 카스티야의 산초는 Tarifa를 점령했고 지브롤터( Gibraltar )는 페르디난드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라나다는 15세기 후반까지 무어인들의 손에 남아있다가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 Isabella )의 재정복에 의해 멸망당했다.
11세기가 저물무렵 이베리아 북부에는 Leon, 카스티야( Castile ), 나바르( Navarre ), 아라곤( Aragon ), 바르셀로나( Barcelona ) 백국 등 다섯개의 기독교왕국들이 있었다. 나바르의 산초3세( Sancho III )는 기독교왕국들간의 연합을 형성하여 1014년부터 무어( Moor )인들과 맞서려 했고 교황은 그가 Saragossa의 수장국을 공격하는 것을 축복했다. 하지만 1063년 전쟁 중 아라곤의 Ramiro1세가 이슬람에 의해 암살당했고 이것은 본격적으로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결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교황은 스페인에서 십자가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은총을 약속했고 이에 북이탈리아와 프랑스 남부에는 군대가 모여들어 무어의 패배를 위해 피레네( Pyrenees ) 산맥을 잇따라 넘어갔다.
그러는동안 Leon과 카스티야의 페르디난드 대왕( Ferdinand the Great )은 1064년 전선을 Coimbra까지 전진시키는데 성공했다. 다음해 그가 죽었을때 그의 두 아들간의 내전으로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지만 Leon의 알폰소( Alfonso )는 1073년 왕국을 재통일하고 분쟁중인 수장국들로부터 조공을 받아내 재정복( reconquista )에 필요한 군대룰 육성하는데 사용했다. 이시기 스페인에는 엘 시드( El Cid )라는 칭호로 더 많이 알려진 Ruy Diaz de Bivar라는 카스티야의 용병이 있었는데 그는 발렌시아( Valencia )를 근거지로 1099년 죽을때까지 상황에 따라 유리한 쪽에 붙는 전쟁을 하였다.
1085년 알폰소는 톨레도( Toledo )를 점령했지만 이에 위협을 느낀 taifas들은 당시 북아프리카에서 베르베르 부족들을 통합하고 알제리( Algeria )에서 세네갈( Senegal )까지 정복한 Almoravide (Murabti )파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Almoravide의 칼리프인 Yusuf Ibn Teshfin는 해협근처의 Algeciras를 기지로 삼고 북진하여 1086년 10월 23일 Badajoz 근처에 있는 Zalaca( Sagrajas )에서 기독교연합군을 대파하였다. Yusuf는 반도를 에브로( Ebro )강까지 정복했으며 Badajoz와 Saragossa를 제외한 모든 수장국들을 그의 지배하에 두었고 아프리카로 귀환할 때 삼천여명의 베르베르인들을 안달루시아( Andalusia )의 무어인들을 돕기위해 남겨두었다.
이번에는 기독교측이 구원을 요청할 차례였다. 1089년 교황은 스페인에서 이교도와 싸우는 것이 예루살렘( Jerusalem ) 순례와 같은 반열에 있다고 선포했고 11세기가 끝날때까지 스페인의 전쟁은 서유럽의 많은 기사들을 끌어들였다.
Santarem과 리스본( Lisbon )은 1093년 점령했지만 같은해 Yusuf의 장군인 Seyr에 의해 다시 빼았겼고 Evora와 Badajoz도 그의 손에 넘어왔다. Yusuf는 11월 그라나다( Granada )에 입성하여 1094년에 이르러서는 Seville을 비롯한 안달루시아의 주요도시들이 그에게 점령되었다. 발렌시아만이 엘 시드가 죽을때까지 버텼지만 그뒤 톨레도를 제외한 옛 코르도바 칼리프령의 대부분이 Almoravide의 영토가 되었다.
알폰소는 1109년에 죽었고 그뒤 20년 동안 스페인의 왕국들은 내전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슬람측도 마찬가지로 모로코( Morocco )의 Almoravide 왕조가 쇠퇴하면서 스페인의 이슬람은 다시 독립수장들이 다스리게 되었다. 이 수장들 밑에는 많은 지역, 도시, 성들이 이었고 이들 역시 반독립상태였다. 수장들뿐 아니라 이들 지역, 도시, 성들은 끈임없이 서로와 전쟁을 벌였다.
1132년 카스티야의 알폰소는 Tagus 강 하류의 수장들과 전쟁을 벌였지만 1135년 Belatha의 수장 휘하의 리스본, Cintra, Santarem 도시연합군과의 Thomar 전투에사 대패하였다. 하지만 그는 Tagus강 남부와의 전쟁을 계속하여 1139년에는 Ourique 전투에서 Badajoz, Elvas, Evora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하였고 1147년에 코르도바는 그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무어인들의 분열은 1144년 Belatha의 Mertola 수장이 알폰소에게 Badajoz 수장을 견제해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쓴때에 정점에 이르렀다. 하지만 무어인들은 기독교인과 같이 같은 이슬람을 공격하는 것에 거부감을 나타냈고 알폰소는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같은 기간 아라곤의 알폰소1세( 또 알폰소냐?ㅡㅡ^ )는 계속해서 Murcia에 대한 공세를 1134년 죽을때까지 그치지 않았고 바르셀로나 백작은 그의 전선을 차차 남쪽으로 넓히고 있었다. 1137년 카탈루냐( catalonia, 카탈로니아라고 쓸까 하다가 아무래도 현지발음을 중요시하는 것이 낳다고 생각하여 카탈루냐라고 썼습니다 )와 아라곤은 정략결혼으로 통합되어 강력한 해군력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으로 스페인 동북부에 대한 재정복이 수월해졌다.
한편 아프리카에서는 새로운 세력인 Almohade( Muwahhadis )가 아틀라스( Atlas )로부터 점점 강성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1145년 Almoravide를 쓰러뜨리고 다음해 스페인을 침공했다. Seville과 말라가( Malaga )가 그들에게 넘어갔고 다음 4년 동안 각지의 수장들을 복속해 나갔으며 기독교측은 수세로 몰릴 수 밖에 없었다. 안달루시아는 다시 아프리카의 지배아래 들어갔다.
1163년까지 스페인은 상대적으로 고요한 시대를 맞이했지만 곧 칼리프의 죽음으로 계승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틈을 타서 포르투갈은 1165년 Bejar와 Evora를 점령했고 1169년에는 Badajoz를 포위했지만 이것은 카스티야와의 조약을 위반하는 행위였다. 곧 포르투갈과 카스티야간에 내전( 기독교연합 내에서 생긴 일이니까 )이 벌어졌고 결과는 포르투갈의 패배였다. 이러한 기독교측의 분열때 새로이 등극한 칼리프는 재빨리 약화된 포르투갈로부터 영토를 탈환했고 포르투갈은 7년간의 휴전협정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양측의 전쟁은 1176년 기독교측이 Seville까지 진출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1184년 칼리프 Yusef2세( Abu Ya'kub )는 여태껏 Almohade가 스페인에 데려온 군대중 가장 뛰어난 정예군을 이끌고 해협을 건넜고 곧 Santarem을 공격했다. 하지만 Yusef는 전투에서 패배한체 심각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의 아들인 Yakub1세는 1188년과 89년 이베리아를 공격했지만 둘다 실패했다. 이에 그는 2년동안 기독교를 상대로 성전( jihad )를 북아프리카 각지에 설교하고 다니며 병력을 모았고 1192년 포르투갈을 침공했다. 포르투갈은 수세에 몰려 결국 Tagus를 자신들의 남쪽경계로 한다는 조약을 맺어야만 했다. 무어군의 다음 목표는 스페인이었다. Yakub는 1195년 7월 18일 카스티야군과의 Alarcos 전투에서 Leon과 나바르의 지원을 받지 못한 카스티야군을 거의 전멸시켰고 이 전투를 계기로 그는 승리자라는 뜻의 El-Mansur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Yakub는 천천히 북쪽으로 진군했고 마드리드( Madrid )와 Calatrava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톨레도는 끝내 그의 손에 넘어오지 못했다. 그가 죽자 기독교왕국들은 다시 연합하였고 Leon을 제외한 모든 이베리아의 기독교연합군은 Las Navas de Tolosa 전투에서 1212년 마침내 무어군을 대패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로 기독교측은 Guadalquivir 계곡으로의 통로를 얻게 되었고 이를 통해 코르도바의 심장부로 진군해 들어왔다. 오랜 기간 무어인들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해왔던 안달루시아는 이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안달루시아에서 Almohade의 세력이 쓰러지자 taifas들이 다시 등장했고 1225년에는 북아프리카 내에서 Almohade의 칼리프위를 놓고 내전이 한창이었다. 카스티야의 페르난도3세( Fernando III )는 이 분쟁에 끼어들어 Idris3세( El-Mamun )의 지지를 선포하고 모로코로 군대를 보내 Marrakesh를 점령했다. 페르난도의 위세는 1230년 Leon의 왕위까지 계승하면서 더욱 높아졌다. 곧 코르도바와 Murcia, Seville이 각각 1236, 1243, 1247년에 점령되거나 항복했다. 다른 기독교왕국인 아라곤의 재정복도 착착 이뤄져 마조르카( Majorca ), 미노르카( Minorca ), 발렌시아, Ibiza 등이 Jaime1세에 의해 각각 1229, 1233, 1235년에 정복되었다. 1260년에 이르러 이제 스페인에 남은 무어의 영토는 카스티야의 속국으로서 간신히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그라나다 뿐이었다.
한편 북아프리카에서는 Almohade가 한때 Alarcos와 Las Navas 전투에 참전시킨적이 있는 Zenata라는 부족의 분파인 Beni Marin( Marinides )에게 축출되었다. 1258년 마지막 Almohade의 왕자가 죽음을 당함으로서 왕조는 멸망했다.
1273년 모로코에서는 새로운 왕조가 페즈( Fez )에서 창건되었고 그라나다의 모하메드2세( Mohammed II )는 페즈의 창건자 Yakub2세에게 Tarifa를 떼어주는 대신 기독교연합의 공격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였다. Yakub는 1275년 스페인에 상륙하여 그의 광신적인 Guzat 베르베르부족을 이끌고 멀리 Jerez까지 공격하였다. 1279년에도 스페인을 침공했지만 카스티야의 산초는 Tarifa를 점령했고 지브롤터( Gibraltar )는 페르디난드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라나다는 15세기 후반까지 무어인들의 손에 남아있다가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 Isabella )의 재정복에 의해 멸망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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