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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재판장 안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 젊은이를 주목하고 있다. 판사가 젊은이에게 묻는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젊은이는 대답한다. "아이신지료 푸이(愛新覺羅 傅儀)." 판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한다. "참 이상한 성이구나."
영화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 중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가 모택동에게 재판을 받는 장면이다. 아이신지료…, 아이신지료…. 한족(漢族)인 판사가 듣기엔 이상하기만 했던 청나라 황제의 성 '애신각라(愛新覺羅)'. 만약 '애신각라'에 '(고국인)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면.
애신각라의 비밀
최근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권세를 떨쳤던 나라를 묻는 질문에 4위를 차지한 국가가 청나라이다. 그 대단했던 청나라를-엄격히 말하면 후금(후금은 청나라의 전신이다)-세운 사람은 누루하치. 그런데 그의 성은 '애신각라'이다. 이 신기한 조합의 한자를 분석해보기로 하자.
애신각라(愛新覺羅)를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고국인)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잊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청나라를 세운 만주인들의 '근원'을 살펴 보면 신라와 관련된 성이라는 해석은 상당히 신빙성을 가진다.(뒤에 서술)
애신각라를 몽골어로 읽으면 '아이신지료'인데, '아이신'은 '금(金)'을, '지료'는 '겨레(族)'를 뜻한다. '(신라 왕실의 성인) 김씨의 겨레' 혹은 '금, 밝음을 숭상하는 겨레'라는 말이다. 청나라라면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서는 오랑캐의 나라로 불리며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나라이다. 그런데 왜 청나라 왕조의 성에 '신라'와, 신라 왕족의 성 인 '금(金)'이 포함되어있는 것일까?
"청나라는 우리나라를 어버이의 나라로 섬겼습니다. 예를 들어 일명전쟁 때 청태조 누르하치가 선조에게 '부모님의 나라'를 침략한 왜구들을 해치우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썼었지요. 또 유명한 '삼전도 항복' 때는 친명배금을 외치는 조선에 와서 '원래 우리는 고려인의 후손으로 그대들과 같은 나라였다'는 취지로 '그대는 왜 동족을 따르지 않고 명나라를 돕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청은 조선에 번번이 형제의 도리를 강조했습니다. 조선은 명분론에 매여 끝까지 청을 형제의 나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말이죠."
"왜 청나라가 끝까지 조선에 호의적이었을까요? 바로 청나라가 금나라로부터 나왔고 금나라는 신라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중원을 복속하고 한족을 지배했던 곳이 청나라입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 때 조선은 몹시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청은 충분히 조선을 복속하고도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죠."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 "우리 시조는 신라인"
역사학자들의 말처럼 여진족 추장 누르하치는 금나라를 기리며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 지었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금나라 태조와 정확히 어떤 혈연관계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누르하치가 계승한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가 신라인이라는 문헌들은 많이 존재한다. 먼저 금나라의 역사서인 '금사(金史)'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金之始祖諱函普 (금나라 시조는 이름이 함보이다), 初從高麗來,年已六十餘矣(처음 고려에서 나올 때 60세가 넘었다) 兄阿古好佛,留高麗不肯從 (형 아고호볼은 따라가지 않고 고려에 남았다)
금나라의 시조인 함보가 60세가 넘은 나이에 고려에서 왔는데, 그의 형제는 고려에 남고 혼자만 금나라로 왔다는 이야기다.
청나라 황실의 역사서 '만주원류고(滿洲原流考)'에도 금나라의 태조에 대해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송나라때의 역사서 '송막기문(松漠紀聞)'은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이었다"고 전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이야기가 비단 중국의 사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부안 김씨들은 그들의 '족보'를 내세워 '금사', '만주원류고', '송막기문' 등의 내용을 이렇게 뒷받침한다.
"함보는 법명이고 그의 본명은 김행 (혹은 김준)으로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자 경순왕 김부의 손자이다.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다른 두 형제는 고려에 남아 부안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금나라의 역사서 '금사'와 거의 대부분 일치하는 주장이다. 다만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가 김준의 직계 아들인지 몇 대를 거친 손자인지는 의견이 다양하다. 어느 것이 옳다고 딱 잘라 말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인데,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의 유민이라는 점만은 어느 이야기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예를 더 보자면,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안정복 역시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김준은 삼형제인데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고 밝히고 있어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 김함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기자는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의 왕족'이라는 주장을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청제국 제 2대 황제 홍타이치 칸은 외척이 몽골인이었다는 점을 들어 몽골민족을 설득하여 몽골황제까지 겸하여 몽골이 청제국의 지배하에 든다. 끝까지 유교명분에 얽매여 명나라를 받들고 청제국을 무시했던 조선왕조는 결국 짓밟히게 된다.
[ 금사 ]
" 금의 시조는 함보이며, 본래 고려에서 나왔고, 그 때 나이 60세였다 "
[ 송막기문 ]
"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에 여진족이 부족의 형태일 때 그 추장은 신라인이었다 "
[ 만주원류고 ]
"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金)이라 했다 "
[ 고려사 ]
" 평주의 승려 김행의 아들 김극수가 금나라의 조상이다 "
위의 여러 역사서를 종합하여 살펴보면
금나라는 신라의 김씨족이 가서 세운 나라이고
" 금(金) " 이라는 국호는 신라왕성 김(金)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역사서에 따라
금태조 아골타가 고려인 김극수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김함보의 8대손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나
신라계 김씨 출신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님이 궁금해하는 누루하치는 금태조 아골타의 16대손입니다.
고려 시대 때 윤관이 변경의 여진족을 내쫓고 동북 9성을 쌓습니다.
그 때 여진족 사신이 고려의 임금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 예전에 우리 태사영가가 말하기를 우리 조상은 귀국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
금(金)나라는 나중에 후금(後金)이 되고
이 후금(後金)이 중원을 정복하여 세운 왕조가 바로 청나라죠.
[ 만주원류고 ] 라는 청나라 사서는
신라가 만주땅을 점령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 청나라는 신라를 계승했다 ' 라는 내용의 역사책입니다.
뿐만 아니라 청태조 누르하치가 중원을 정복하고 청을 세우면서
성을 " 애각신라(愛新覺羅) " 로 바꾸는데
그 뜻은 " 신라를 사모하고 기억한다 " 입니다.
누르하치는 조선을 멸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 한수이북은 자신의 선조가 태어난 땅 " 이라 말하였고
삼전도 항복 때는
" 본래 우리는 고려의 후손으로 그대들과 같은 나라였거늘 어찌하여
동족을 따르지 않고 명나라를 돕는가? " 하였으며
우리 나라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누루하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조선왕에게 보냅니다.
" 부모의 나라를 침략한 쥐같은 왜구들을 ...수장시키겠습니다 "
청나라 멸망 후 애신각라씨들은 다시 성을 김씨로 바꿉니다.
우리나라 말 김(금)씨족이 만주어로 뭡니까?
" 아이신카라 "입니다. 바로 이게 " 애신각라 " 의 발음이에요.
그런데 그 많은 한자 중에 어찌도 이런 글자들만 골라 놓았는지.......
그것도 네자씩이나.........
좋습니다. 단 이것은 가능성의 문제이니 그냥 넘어가자구요.
하지만 분명 가능성이 농후한 사안인 것만큼은 인정하셔야 할겁니다.
또한 금족이라는 족속은
신라 김씨가 금나라를 세우기 전에는 없었다는 것도 아셔야 할겁니다.
그럼 금족이 누굴까요?
또 보자구요.
만주원류고 내용이 그야말고 기가막힌 내용입니다.
삼한을 한반도 남쪽이 아닌 만주땅에 배정합니다.
그리고 신라가 고대에 만주 전역을 차지했던 것으로 나옵니다.
왜 이렇게 신라의 역사를 과대평가했을까요?
다시 말하면 청나라가 만주 전역을 차지했는데
과거에 신라도 그랬다.
그렇다면 청나라는 어느 나라를 계승한 것일까요?
여러 가지를 포괄해 보자고요.
단지 역사서에 뭐는 뭐다 라고 나와야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실 건가요?
역사 연구 왜하죠?
역사책에 있는 내용만 보면 되는데......
마의태자로 보이는 사람이 여진 땅에 들어가서 금(金)나라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기록이 있다.
마의태자 행방과 관련해 먼저 ‘고려사’를 찾아보기로 하자.
고려 11대 문종 28년(1074) 9월,
그러니까 신라가 망하고 마의태자가 개골산으로 들어간 해(935년)로부터
139년 후의 일인데, 갑자기
“동여진(東女眞)의 추장 오고내(烏古)가 죽고
그의 아들 핵리발(劾里鉢)이 자리를 이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 오고내와 핵리발 부자가 남도 아닌 고려인이요.
옛날 신라 왕족 김씨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고려로 볼 때 매우 불길한 일이었다.
신라를 멸망시킨 고려가 볼 때 신라왕족 김씨 후손이 바로 코앞에 나라를 세워
국경을 맞댄다는 것은 여간 불안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 김씨는 누구란 말인가.
고려왕조는 그가 경순왕의 투항을 반대하고 개골산에 들어갔다는
마의태자 후손은 아닌지 바짝 긴장하고 정보를 수집하느라 혈안이 되었다.
정보 수집결과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고 한다.
정보에 따르면 동여진을 장악한 이른바 태사(총독)는 김준(金俊)이란 사람의
후손인데 평주(平州) 사람이었다 한다.
일설에는 김행(金幸)이라고도 한다.
그는 몸을 숨기기 위해 함보(函普)라는 법명을 쓰기도 하였다.
이 사람이 영흥에 숨어 살다가 여진 땅으로 월경하여 아지고촌(阿之古村)이란 마을에서
여진 여자를 취하여 극수(克守)를 낳았는데 이가 곧 금나라 시조라는 것이다.
그러면 평주는 과연 어딘가하면 황해도 평산(平山)이 평주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잘못이고 함경도 영흥(永興)이 평주라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고려 수도 개성과 가까운 황해도에서는
왕건의 눈을 피하기 어려웠고 여진 땅과 너무 멀었다.
함경도 영흥은 원산 근처에 있는 군사요지로서 여진과 접경지대였다.
여기 같으면 왕건의 눈을 피해 중으로 숨어 살거나 여진으로 망명하기 쉬웠을 것이다.
영흥을 일명 평주라 한 것은 바로 고려 문종 때 이곳에
평주진을 쌓아 여진의 침략에 대비했기 때문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영흥에는 정변진, 장평진 같은 군사기지가 생겨난 것을 보면,
고려는 이곳을 북방수비의 요지로 삼았던 것 같다.
함경도 영흥은 또 금강산과 가깝고 설악산과도 가까워서
만일 고려군과 싸워 져서 후퇴한다면
동해안을 거쳐서 함경도 원산 방면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 같으면 재기를 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의치 않았는지 마의태자는 다시 여진 땅으로 갔다.
아무리 왕건이 마의태자를 잡으려 해도 조국광복을 향한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영흥 땅은
뒷날 태조 이성계가 일어나 고려왕조를 전복한 반역의 고장이란 사실이다.
금나라의 시조가 나고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가 난 고장이 바로 영흥 땅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금나라 시조가 된 김행(金幸) 또는 김준(金俊)이란 인물이 경순왕과 어떤 관계인가.
아들인지 손자인지 분명치 않다.
물론 족보에도 나오지 않으며 나왔다 하더라도 믿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다만 그가 마의태자와 같은 외자 이름이라는 사실,
그리고 중 행세를 하며 피해 다녔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순암 안정복은 김준의 형제가 삼형제였다고 하면서,
김준이 여진으로 망명할 때 두 형제를 두고 혼자서 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증언이다.
마의태자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부안김씨 족보에 따르면 김행이 마의태자 김일의 아들이고,
김행은 여진으로 갔지만 나머지 두 형제는 고려에서 부안김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여진으로 간 김행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진은 당시 원시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행과 그 후손들은 국가를 건설할 지혜와 문화가 없는
여진족을 지도하여 나라 세우기에 진력했던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조국 신라를 잃은 마의태자의 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그곳 풍속은 흉노와 같아서 여러 부락은 성곽도 없이 산과 들에 분거하였으며,
문자가 없어 언어와 결승(結繩)으로 약속하였다.
그 땅에는 말이 많았는데 준마는 간혹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날쌔고 용맹스러웠고 아이들도 능히 활을 잡아당겨 새나 쥐를 쏘아 맞혔다.
커서는 모두 활 쏘고 말을 타고 싸움터에 나가 싸우는 노련한 병사(勁兵)가 되었다.
그러나 각 부락이 서로 자웅을 다투어 통일되지 못했다.
여진의 강역은 서쪽으로 우리나라와 경계를 접해 있기 때문에
일찍이 거란과 우리 나라를 섬겨 몇 번 와서 조회했다.
그러나 그 예물은 사금이나 짐승 가죽이나 말이었고,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은으로 후히 주어 보냈다.
고려사는 이렇게 여진이 후진 사회였다고 하면서 위치는 흑룡강 유역이었다고 기록한다.
[흑수(黑水), 즉 흑룡강의 옛 습속에는 방이 없고 땅을 파서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어 그 속에서 살며 수초(水草)를 찾아다녔으므로 언제나 정처없이 옮겨 살았다. 김행의 후손 극기라는 인물이 토지를 개간하고 곡물을 재배하면서부터 집 짓는 제도가 생겼고 사람들이 그 지역을 납갈리(納葛里)라 이름했다. 그 말은 한자로 거실이란 뜻이었다.][고려사]
당시 여진은 생(生)여진과 숙(熟)여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김행이 간 여진은 생여진이었다.
생여진은 끝까지 요의 지배를 받지 않다가
결국 요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워 중국을 지배한다.
이는 신라에서 망명해간 왕자의 힘이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마의태자 후손이 여진(女眞)에 들어가 금나라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도 산견(散見)된다.
‘고려사’ 세가(世家) 권13 예종 10년(1115) 3월조에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온다.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일컫고 국호를 금이라 했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 우리 평주(平州)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거주했으니 이가 금의 시조다’라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평주 승 김행(金幸)의 아들 극기(克己)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 태사(太師)라 하고 고을이 활라(活羅) 태사(太師)를 낳고 활라가 아들이 많아 장자를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계자(季子)를 영가(盈歌)라 했는데, 영가가 웅걸(雄傑)이어서 중심(衆心)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위를 이었고 오아속이 졸하매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고려사]
또한 ‘고려사’의 같은 예종 4년(1109) 6월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여진 사신이 고려에 와서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종이 대방(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고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고려사]
항일독립운동가요 민족사학자인 백암(白岩) 박은식은
‘꿈에 금태조를 만났다(夢拜金太祖)’는 글을 썼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얼마나 분했는지 금태조가 나타나더니 이렇게 꾸지람을 했다는 것이다.
“너는 조선의 유민이 아닌가. 조선은 짐의 부모의 고향이요 그 민족은 짐의 동족이라. 지금 조선민족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볼 때 매우 측은한 바가 있으나 하늘은 자분자강(自奮自强)하는 자를 돕고 자포자기하는 자를 싫어하시나니 이것이 천의(天意)다. 너희 조선민족은 아직도 과거의 죄악을 반성하지 못하고 있구나.”
규장각 부제학을 역임한 김교헌(金敎獻)은 소상하게 신라 왕손이 여진 땅에 가서
먼저 완안부의 지도자가 되고 어떻게 해서 금나라를 세우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의 한국사 개설서인 ‘신단민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말갈이 발해에 속했는데 발해가 망하니 그 부락의 전체 이름을 여진이라 했다. 또 백두산을 동과 서로 나누어 서쪽은 숙여진이라 하고 동쪽은 생여진이라 했다. 요에 속했으나 생여진은 나라를 스스로 다스리는 제도 아래에서 임금을 태사(太師)라 했다. 그리고 신라의 종실 김준의 아들 극수(克守)를 맞아 왕위에 앉혔는데 부락의 이름을 완안(完顔)이라 하고 그들의 성이 되었다. 완안은 여진 말로 왕자라는 뜻이다.”
납북 사학자 손진태도 ‘금태조는 황해도인야’라는 논문에서
금태조 아골타가 스스로 고려는 ‘부모 지방’이라 했고,
중국측 기록 ‘금지’에는
금나라 왕은 신라인이요 호가 완안인데 완안은 한어로 왕이란 뜻이라고 기록되어있다한다.
금태조가 신라인이라는 것은 이미 고려 때부터 전한 이야기여서
‘고려사’에 기사가 너무 많다고 말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와서 실학자 이수광이 그의 ‘지봉유설’에서
“옛날 금의 완안씨는 본시 고려인이었기 때문에 고려에 매우 후하게 대했고 끝내 침범하지 않았다. 의주는 원래 고려 땅이라 금이 요를 멸한 뒤 고려에 돌려주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하여야 할 것 같다.
여진은 신라의 후손이 모이게 했고, 금나라는 신라 후손의 나라이다.
그리고 후에 세워진 후금(청)도 여진왕족이 세운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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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금사(金史)에는 "금 태조가 고려에서 건너온 함보를 비롯한 3형제의 후손이다" 는 대목이 나온다. 또한 금을 계승한 청나라의 건륭제 때 집필된 '흠정만루원류고'에는 금나라의 명칭이 신라 김(金)씨에서 비롯됐다는 내용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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