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제국 공민황제의 북벌        1200 ~ 1300  2009. 4. 2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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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를 치라고 보낸 군대를 돌려 도리어 주군인 고려황제를 참살하고 고려황족 왕씨를 몰살한 이성계와 전라도 이씨는 천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사실상 한민족이 만주지역을 잃게 만든 주범이 이성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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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벌지 요동의 심장부 요동성을 찾다

고려는 건국할 때부터 고구려의 옛 땅, 만주를 찾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러나 그 꿈은 실현되지 못하다가 고려말에야 공민왕에 의해 비로소 이루어졌다. 공민왕 때라면 고려가 90년간 원의 지배를 받던 때다. 세계 제국 원에 시달려 고려의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진 당시 공민왕은 마침내 압록강을 넘어 요동을 장악하고 두만강으로 진출하여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았다.
공민왕의 요동 공략을 『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려군이 압록강을 건너 요성을 함락했다.'
요성은 어디일까? 중국 요녕성 요양시가 요동의 심장부였던 요성이다.
수 양제의 100만 대군을 격파한 고구려의 요동성도 바로 요양이다.
사통팔달의 요지인 요양의 전략적 가치 때문에 공민왕은 이곳을 친 것이다.
요동성은 수나라의 백만 대군도 넘지 못한 고구려의 자랑이었고, 거란의 중심 무대였으며, 원의 동북아 지배의 중심지였다. 공민왕은 바로 이곳을 장악한 것이다.
『고려사』에는 고려의 요성 정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양과 심양 일대는 고려의 땅이요, 백성은 고려 백성이다. 이제 의로운 군대가 들어와 백성을 어루만져 편안케 하노니···.'
공민왕의 요동 정벌은 고려초부터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북진 정책의 발로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구려 멸망으로 만주 지역을 잃은 지 약 600년이 지나 이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은 민족사의 일대 사건이었다. 요동 정벌은 원의 식민 지배에서 주권을 회복하겠다는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의 완성이자,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부하던 고려의 상징이었다.

★요동 장악을 위한 전초 작전, 오녀산성과 팔참 공략

공민왕은 요새 중의 요새이자 수나라 백만 대군도 함락하지 못했던 이 난공불락의 성을 어떻게 수복했을까? 이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요동의 심장부인 요동성을 공격하고 만주를 되찾으려고 공민왕은 20여 년에 걸쳐 치밀하고 끈질긴 준비를 했다.
본격적인 요동 공격을 위해 공민왕은 압록강을 건너자 마자 만나는 중국의 첫 도시 단동에 교두보를 확보한다.
『고려사』는 이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한다.
'인당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 등 3참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압록강을 건너 격파한 파사부'는 단동에 있는 원의 중요한 역참이었다. 원의 요동의 주요 도로에 역참을 설치했는데, 이곳이 바로 파사부참이 있던 곳이다.
공민왕은 요동으로 들어가는 첫 길목인 파사부를 교두보로 확보했다.
공민왕은 이후 요동으로 가는 또 하나의 교두보를 확보한다.
『용비어천가』는 조선왕조 건국의 정당성과 태조 이성계 및 그 선조들의 위업을 찬양하는 최초의 한글 서적이다. 『용비어천가』에는 태조 이성계가 요동 정벌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있다. 올랄산성 정벌. 그것은 고려군이 본격적인 요동 정벌을 앞두고 단행한 마지막 정비작업이었다. 그렇다면 올랄산성은 과연 어디인가?
올랄산성, 우라산성 등 이 산성은 이름이 여럿인데, 이는 만주어를 한자로 표기할 때 생기는 문제다. 올라, 우라는 만주어와 여진어로 각각 강을 의미한다. 즉 강가의 성이라는 뜻이다. 올라, 우라산성 등은 고구려 때에 성을 여진족이 그대로 쓰면서 이름만 바꾸어 부른 것으로, 오늘날 오녀산성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인구 30만의 자그마한 도시인 환인은 압록강 중류에서 50km 북쪽에 있다. 고구려 700년의 역사가 이곳 환인에서 시작되었다. 고구려의 첫 수도였던 환인시의 북쪽에는 특이한 모습의 산성이 있다. 마을 뒤에 우뚝 솟아 있는 산성, 오녀산성이다. 산성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바위산처럼 보이는 오녀산성은 마치 바위병풍을 펼쳐놓은 듯 산 중턱부터는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이다.
『고려사』에는 오녀산성 정벌 결과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조가 기병 3천과 보병 1만 5천으로 공격하니 이튿날 우두머리 20인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했다. 주변의 여러 성들도 모두 항복하여, 얻은 호수가 1만 호나 되었다.'
고려가 요동을 장악하려면 파사부와 함께 반드시 이곳을 확보해야 했다.
요동성으로 통하는 양대 길목 장악. 이것이 요동성 정벌에 성공한 공민왕의 승부수 였다.

★이성계와 최정예 고려군

해발 820m,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산성에서 전투를 치른 것은 믿기 힘들다. 천혜의 요새 오녀산성을 고려군은 어떻게 함락했을까? 그 비결은 『용비어천가』에서 엿볼 수 있다.
'편전'을 사용한 전투 기록이 그것이다. 이 전투의 지휘자는 당시 동북면병마사 이성계였다.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전투를 묘사하고 있다.
'이성계가 편전 70발을 쏘아 모두 얼굴에 맞췄다.'
바로 이 편전이 승리의 비결이었다.
편전은 어떤 무기일까? 우리 민족의 무기 가운데 가장 우수한 것은 활이다. 편전의 화살의 일종이다. 그런데 일반 화살의 절반도 안 되는 30cm 길이다. 이 짧은 화살에 어떤 비밀이 있을까?
편전을 쏘는 데는 아주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다. 일반 활에는 없는 덧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덧살은 작은 대나무를 반으로 잘라 만든다. 편전은 덧살을 씌워 시위를 당긴다. 덧살을 타고 날아가는 화살은 상대방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피할수가 없다. 덧살은 편전이 안정적으로 날아가는 궤도를 만들어 준다. 이 때문에 편전은 먼 거리를 강하게 날아갈 수가 있다.
화살의 사정거리는 225m, 편전은 317m로 편전이 일반 화살보다 100m 가량 더 멀리 나간다. 이것은 전쟁터에서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
일반 화살의 속도는 초당 59.8m다. 편전의 속도는 초당 71.8m로 일반 화살보다 초당 12m가 빠르다. 사정거리와 관통력이 일반 활보다 훨씬 뛰어난 편전이 바로 고려의 비밀 병기였다.
또, 고려의 군사들은 '격구'라는 운동을 즐겼다.
격구는 배지, 수양수, 치니매기 등 다양한 기술을 말 위에서 겨루는 운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에서는 격구가 기마 훈련의 한 과정이었다.
『고려사』에는 군인들이 격구로 훈련했다는 기록이 끊임없이 나온다.
'신기군사의 격구를 사열하고 (중략) 견룡군에게 명하여 격구를 하게 했다.'
편전이라는 신무기와 뛰어난 기마술을 지닌 막강한 고려군이 있었기에 공민왕의 북벌은 가능했던 것이다.

★공민왕의 자주성회복정책(반원정책, 옛 땅 회복, 쌍성총관부 탈환)

공민왕의 북벌 준비는 단지 군사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공민왕 즉위 원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재추부터 이서에 이르기까지 사람마다 활 하나, 화살 쉰개, 칼 한 자루, 창 하나를 갖추게 하여 사열했다.'
재추란 가장 높은 벼슬아치, 즉 재상을 말하고, 이서란 최하위직인 아전을 말한다. 공민왕은 이처럼 군인이 아닌 일반 사람들까지 무장을 시키고 북벌을 준비한 것이다. 이렇게 즉위 초부터 공민왕은 대대적인 만주 수복 전쟁에 만반의 준비를 했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지배에 시달리던 고려시대의 왕이었다.
그는 열 두살 때부터 12년 가까이 원에 볼모로 있었다.
1351년, 스물두 살의 공민왕은 마침내 오랜 볼모 생활을 마치고 고려로 돌아와 고려 31대 왕이 된다.
즉위하자마자 공민왕은 강력한 반원정책을 펴나간다. 당시 고려에는 몽고풍이 만연했다.
공민왕은 먼저 원의 복식과 변발의 금지하고 모든 관제를 고려의 관제로 되돌린다.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으려는 공민왕의 개혁은 신속히 진행된다. 원의 연호(지정)를 폐지하고, 모든 법률과 제도를 고려초의 전통으로 되돌린다. 그리고 원의 권력에 기대어 권세를 누리던 기철, 권겸, 노책 등 부원 반역배를 숙청함으로써 내부 개혁을 완결짓는다. 이것은 당시 원의 권력에 빌붙어 살아가던 세력에 대한 하나의 경고였다. 또한 고려의 본격적인 반원 개혁의 출발이며 상징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당시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고 원을 몰아내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과감한 반원자주화정책을 단행한 것이다. 공민왕은 원의 간섭기 이후 누적된 사회·경제적 모순을 척결하고 새로운 개혁 정치의 모델을 제시했다. 때문에 공민왕은 고려 역대 34명의 국왕 가운데 태조 왕건과 비견되는 뛰어난 정치가이자 훌륭한 군주로 평가된다.
원의 군대가 100년 가까이 고려 땅에 주둔해야 했던 치욕을 씻고 건국 이래 꿈꾸어온 북벌을 완성한 공민왕, 그는 스려져 가는 고려의 영광을 되살리고 고려의 자주성을 되살린 위대한 왕이었다.

★공민왕이 확보한 북방한계선

쌍성총관부를 점령한 이후 수복한 땅이 어디까지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대략 일제시대 일본 학자들이 주장한 함경도 일대라고만 알려질 뿐이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과연 공민왕은 어디까지 북진했을까?
조선왕조 『태종실록』에 공민왕이 수복한 땅에 대한 기록이 있다.
'지정 16년에 이르러 공민왕이 공험진 이남을 본국에 환속하고 관리를 정하여 관할하여 다스렸다.'
지정은 원나라 순제의 연호로, 지정 16년은 1356년,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친 그 해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치고 수복한 땅은 공험진 이남이라는 얘기가 된다.
고려 국경 최북단에 있었다는 공험진은 어디일까? 세종 때 실측한 자료를 토대로 만든 지도 「조선국희도」가 있다. 공민왕이 공험진을 회복한 때로부터 100년 정도 지난 시기니까 상당히 정확한 지도인 셈이다. 특히 두만강 유역 북방 지역을 자세히 그려놓았다. 그런데 백두산과 두만강에 공험진과 선춘령이 표시되어 있다. 놀랍게도 공험진과 선춘령은 두만간 너머에 있었던 것이다.
공험진이 두만강 이북이라는 근거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찾을 수 있다.
'경원도호부에서 북쪽 700리에 공험진이 있고 동북쪽으로 700리에 선춘현이 있다.'
이 기록만 따르더라도 최소한 공험진은 두만강 이북 340리 지점이다. 공험진이나 선춘령은 지금의 연길 지방인 옛날 간도 지방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고려의 최북방 경계, 공험진은 과연 연길 지역일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연길 뒷산이다. 이 산은 연길의 북쪽을 막고 있는 산으로, 북고대성이라고도 불린다. 산 정상에는 토성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중국 사학계에서는 이곳을 고구려 산성으로 보고있다. 그렇다면 후대에도 당연히 주요한 군사시설로 사용되었을 곳이다. 고려군이 이쪽으로 들어왔다면 이곳은 아주 중요한 군사시설이 되었을 것이다. 공험진의 선춘령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임에 틀림없다.
고려의 최북방 경계인 공험진의 정확한 위치는 좀더 깊이 연구해야 할 과제다. 그렇지만 최소한 두만강 건너 연길 북방에 공험진이 있었다는 사실은 명확해진다.
동으로는 두만강 너머 간도 지역까지, 서쪽으로는 요동의 심장부인 요성까지, 고려의 공민왕은 원나라를 내쫓고 옛 땅을 되찾는 북벌을 성공리에 마무리지었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든 고려제국.

팔만대장경도 금속활자..

선박제조술이 뛰어나 원거리 해상무역도 하고..

유교의 억압을 받지 않아 과학과 상업이 발달하고..(사진에 나오는 승복은 소박한 조선시대 억불숭유 승복인데 복원한 사람이 검증을 엉터리로 했구만, 저런 이상한 승복은 정통 승복도 아니고 조선에서나 쓰이던 승복.)

패션, 도구도 유교조선처럼 미개소박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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