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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마 한나라에 처맞고 뵈지도 않는 청동거울이나 쓰는 고조선따위가 한나라와 대등하게 싸운 훈누족과 연관이 있으라는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없길 바란다.(대륙백제 이딴 환타지 소설이나 써대는 골빈 환빠새끼들때문에 한국이 발전이 없다.)

  홍산문명이라고 환타지 소설을 쓰는 환빠들이 있던데 그 잘난 홍산 문명이 어째서 고인돌이나 처짓고 청동거울이나 만드는 미개한 고조선 문명으로 전락했는지는 설명하지 못 한다. 그리고 홍산 돌무대기가 문명이라 치자. 근데 수메르와의 연관성, 유태인 십지파와의 연관성을 지껄이는 환빠들이 있언데 수메르인들인 피라미드를 안 지었어. 피라미드는 이집트, 아즈텍이 지었지. 수메르,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지구라트를 지었다. 엉터리 환빠 소설만 읽어대고 머리는 열등한 환빠들이니 그런 국수주의적 환/한단고기 미친 소설만 지어내는 것이다. 또 이집트 피라미드는 기원전 2500년에 지어진 반면에 홍산 돌무대기는 기원전 600년대라더군. 기원전 600년이라면 이집트는 이제 피라미드 안 짓고 미개한 에티오피아 족속들에게 피지배 받을 때야. 이집트가 몰락해서 미개해졌을 때란 말이야.

고조선은 말이다. 미개국인데 중국 춘추전국시대 나라중 하나인 멸망한 중국 연나라의 유민 위만이 와서 중국문화를 전해줘서 그나마 사람꼴 된 나라가 고조선이다. 즉 위만조선때부터 중국인의 지배를 받은게야. 위만이 조선으로 도망쳤다는 말을 들은 한나라 한무제는 곧 도망간 위만이 세운 고조선을 치러 조선반도로 달려가 고조선을 멸망시켜 버린 것이다. 고조선이 강대국이니 이따위 소리하는 멍청이들은 왜?! 그 강대한 고조선에 대해서 한나라측에서 기록을 남기지 않았는지를 설명하지 못 한다. 진제국도 유목민족인 흉노에 관해서는 그렇게 자세히 설명했는데 고조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고조선도 정복하지 않고 천하통일을 이루었다고 진시황이 말한 걸 보면 사실상 고조선을 관심가질 가치도 없는 야만족이라 본 것이다.

 고인돌은 조선반도에서 고유한 문명을 가졌다는 증거는 될 수 있어도 그것이 선진문명이라는 증거는 결코 될 수 없다! 오히려 야만적이었다는 증거만 될뿐이다!! 왜? 전세계적으로 고인돌 따위를 만든 민족은 거의 없다. 그리고 조선반도에서 고인돌 만든 시기에 세계의 상황을 본다면!

고인돌 [(지석묘), dolmen]
요약
한국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
본문
강원도 고인돌 / 강원도.

지석묘()라고도 부른다. 북유럽·서유럽·지중해 연안·북아프리카·서남아시아 일대의 신석기시대 묘제로 분포하나, 한국의 고인돌과 직접적인 문화적 관계는 없는 듯하다. 중국 랴오닝성산둥반도 및 일본 규슈[]에도 분포하나, 한국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미미하다.

고인돌은 크게 나눠 지상에 4면을 판석으로 막아 묘실을 설치한 뒤 그 위에 상석을 올린 형식과, 지하에 묘실을 만들어 그 위에 상석을 놓고 돌을 괴는 형식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대체로 한반도 중부 이북 지방에 집중되어 있고, 후자는 중부 이남 지방에서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들을 각각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이밖에도 지하에 묘실을 만들었으나 남방식 고인돌과는 달리 돌을 괴지 않고 묘실 위에 상석을 바로 올린 고인돌도 있는데, 이를 개석식 혹은 변형 고인돌이라고 한다.

고인돌의 연구에서는 지하의 묘실 구조와 축조방법을 중시하는데, 연구자에 따라 약간의 견해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이렇게 북방식·남방식·개석식 등의 3종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북한 학계는 고인돌에는 한 구역 안에 2~3기의 고인돌을 나란히 세우고 상석 높이까지 돌을 덮어 묘역을 구성한 형식의 고인돌과,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의 두 유형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을 각각 침촌리형과 오덕형 고인돌로 부르며 전자가 시기적으로 더 이르다고 본다.

고인돌 각 형식 간의 시간적 관계에 대해서는 크게 북방식이 앞선다는 설과 남방식이 앞선다는 설이 있으나, 시간적 관계 판단에 필요한 유물이 워낙 미미하기 때문에 확실하게 단언하기 힘들다.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점에 대해서도 아직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혹자는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치를 근거로 신석기시대에 이미 고인돌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기원전 8~7세기 이전에 시작되었다거나, 아무리 이르게 보아도 기원전 5세기를 넘을 수 없다는 주장 등을 하여 이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고인돌이 마지막으로 사용된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인 움무덤[]이 등장하기 이전인 기원전 2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 고인돌이 만들어진 문화적 연원에 대해서도 역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데, 지하에 설치된 돌널무덤[]이 지상화되어 고인돌로 발전하였다는 자생설, 만주지방에 분포한 대석붕()의 영향을 받아 발생하였다는 설, 남아시아거석문화()의 유입으로 발생하였다는 설 등이 있다.

고인돌은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국에 분포하나, 황해도·전라도에 가장 밀집되어 있으며 한 곳에 수백 기의 고인돌이 군을 이루어 분포한 경우도 있다. 북방식 고인돌은 한강 이남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데, 전라북도 고창에서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이 최남단의 것이다. 남방식 고인돌은 전라도 지방에 밀집 분포하며, 경상도와 충청도 등 한강 이남 지역에서도 많이 보인다. 한편, 개석식() 고인돌은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일본 규슈[]지방에 분포하는 고인돌은 죠몽[]시대 말기에서 야요이[]시대 초기에 걸쳐 등장하는데, 그것들이 한국계 유물과 함께 발견되고 있어, 일본 야요이문화가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암시한다. 고인돌에서는 간돌검과 돌화살촉이 주요 부장품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민무늬토기와 붉은간그릇 등 토기류와 청동기가 부장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많은 고인돌에서는 유물이 전혀 없거나 있어도 매우 미미해, 고인돌이 세골장() 혹은 이차장()용의 무덤일 가능성도 언급되고 있다. 또한 고인돌 축조에 필요한 거대한 돌의 운반에는 대규모의 인력이 필요로 하였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이것이 족장() 등 지배계급들의 묘()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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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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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풍리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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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령리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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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동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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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 고인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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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읍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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