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2세기에 지어진 트로이 성벽.
트로이전쟁 [Trojan w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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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문명(Troian Culture)
트로이는 마르마라 해에 가까운 소아시아의 힛사를리크 언덕으로서, 거기에는 9층의 주거지(시:市)가 있었다. 제1시는 이미 성벽을 만들고 금속 문화를 가졌으며, 제2시(B.C. 3천년기(紀)의 후반경)는 장경(長經) 120m의 높고 견고한 성벽을 가졌으며, 성내에는 4개의 메가론이 서 있어 최초의 융성기를 보여 준다. 이 곳은 흑해와 에게 해, 유럽과 아시아의 두 대륙이 접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교역과 부근 평야의 농산물, 배후지의 광산 등으로 부를 안겨다 줄 수 있었다.
술레이만이 발견한 「트로이의 보물」은 제2시에 속하며, 황금제의 관과 장신구와 용기·은제품 등으로 국왕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였다. 도기는 조잡하지만 사람의 얼굴을 나타낸 안호나 동물호가 특색이다. 이 문화는 에게 해의 유럽 쪽, 레스보스 섬, 소아시아의 내지로 퍼져 갔으나 에게 세계의 동북부에 한정되어 있고, 크레타와의 접촉은 찾아볼 수 없다. 제2시의 붕괴 후, 제3시부터 제5시가 같은 문화를 갖고 부흥되었으며 제6시는 두 번째의 전성기로서 성벽은 최대의 영역을 둘렀는데, 그 유구(遺構)로서 남아 있는 것은 적다. 그러나 그 유구나 유물은 완전히 미케네 문명으로서 호메로스의 트로이는 이에 이어지는 제7시이다. 그러므로 참다운 트로이 문명은 제2시가 대표하게 되는데, 그 문화와 타문화와의 관계·기원은 분명치 않으며, 그 연대에도 여러 설이 있다.
트로이는 19세기에 독일인 슐레이만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소년 시절 슐레이만은 아버지로부 터 선물 받은 "아이들을 위한 세계사" 라는 책에서 붕괴하는 트로이 성을 묘사한 그림 한 장을 보고 전 설 속에 파묻힌 트로이를 자신이 찾아 낼 것을 결심하고 생애의 절반을 발굴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데 보냈다. 마침내 그가 49세에 그 꿈은 실현되어 트로이 문명이 허구가 아닌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게 된다.
(사진) - 트로이 유적지 모습
한편 고대에는 이 전쟁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으나, 19세기의 비판적 역사 연구에서는 허구적인 신화로 취급하는 풍조가 강하였다. 그러나 하인리히 슐리만이 1870년부터 트로이 유적지를 발굴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는 역사적인 근거를 얻게 되었다. 1930년대에 미국의 블레겐이 트로이 유적에 대한 과학적인 재조사를 시행한 결과, 트로이전쟁이 사실성을 갖는다면 9층으로 이루어진 유적 가운데 BC 125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제7층 A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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