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실패와 몽골 진출 방어 실패 등으로 왕권이 강화되고 그리스도 교세가 추락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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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 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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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 유수는 13세기 로마 가톨릭의 교황청의 자리가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옮겨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머무른 시기를 말한다. 고대 유대인의 바빌론 유수에 빗대어 교황의 바빌론 유수라고도 불렸다.
[편집] 경과
1303년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대립이 있던 중에 아나니 사건(프랑스군이 아나니의 별장에 있던 교황을 습격한 사건)이 터져 이후 교황은 프랑스 국왕의 꼭두각시가 되어 갔다.
프랑스인 추기경 베르트랑 드 고트가 교황 클레멘스 5세로 즉위하면서 필리프 4세의 요청에 따라 1308년에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로 이주하였으며 1309년에 아비뇽에 거처를 두었다. 아나니 사건 이후의 처리를 위해 비엔 공의회를 열기 위한 준비를 하던 사이에, 이탈리아 반도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7세의 침략을 받아(1310~1313) 교황은 이탈리아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결국 프랑스에 계속 체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아비뇽은 프랑스 왕국의 영내가 아니라 교황의 가신인 프로방스 백작의 영지였다. 아비뇽 유수기에는 프랑스 출신의 추기경들이 대거 등용되었으며 교황 또한 모두 프랑스 출신이었다.
덧붙여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아비뇽 체재중에 교황 클레멘스 6세로부터 성직 또는 사절의 지위에 임명되었지만, 교황청의 부패상과 교황이 로마를 떠나 있는 것에 대해 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교황에게 종종 로마로의 귀환을 호소하였으며 그의 작품에서는 아비뇽을 서방의 바빌론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대략 70년 후인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드디어 로마로 귀환함으로써 아비뇽 유수기는 종식되었다. 그레고리오 11세는 다음해에 선종하였으며, 로마에서 새로 선출된 교황 우르바노 6세가 등극하지만, 머지 않아 프랑스인 추기경들이 콘클라베가 무효라고 선언하고 일방적으로 탈퇴하여 대립 교황을 선출하였다. 그리하여 로마와 아비뇽 두 곳에 교황이 있는 서구 대이교가 일어난다.
[편집] 아비뇽 유수기의 교황
- 교황 클레멘스 5세 (1305년-1314년)
- 교황 요한 22세 (1316년-1334년)
- 교황 베네딕토 12세 (1334년-1342년)
- 교황 클레멘스 6세 (1342년-1352년)
- 교황 인노첸시오 6세 (1352년-1362년)
- 교황 우르바노 5세 (1362년-1370년)
-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1370년-13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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