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예지드 1세 (오스만 제국 황제)        1200 ~ 1300  2009. 4. 11.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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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예지드 1세

오스만 제국 술탄
재위 1389년 ~ 1402년
이전 왕 무라드 1세
다음 왕 메메드 1세

바예지드 1세(오스만 터키어: بايزيد الأول, 터키어: Beyazıt)(1360년 ~ 1403년)는 오스만 제국의 제4대 술탄이다(재위: 1389년 ~ 1402년)이다. 무라드 1세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그리스그리스도인으로 생각된다. 젊을적부터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 아버지의 군대를 이끌고 과감하면서도 신속한 움직임에 번개라는 뜻의 ‘일디림(오스만 터키어: ییلدیرم)’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편집] 생애

1389년 코소보 전투 직후, 아버지 무라드 1세가 세르비아 귀족에게 암살당할 때 수행하던 바예지드 1세는 즉시 동행한 동생들을 죽이고 즉위했다. 즉위 후 적극적인 원정에 나서 세르비아, 보스니아, 왈라키아 등을 굴복시키고 발칸반도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었다.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기 위해 보스포루스 해협에 여러 성채를 쌓았다. 바예지드 1세의 위협을 받자 동로마 제국은 서유럽에 도움을 요청했고, 1396년 헝가리의 지기문트를 중심으로 결성된 서유럽 십자군이 결성되었으나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군에게 격파당했다.

바예지드 1세가 아나톨리아에 할거하던 튀르크계 여러 제후국을 차례로 병합해 나아가자, 1400년 아나톨리아 세력은 동아나톨리아에 진출한 티무르을 의지하게 되었다. 티무르는 바예지드 1세에게 "아나톨리아의 여러 제후에게 옛 영지를 돌려주어라"란 요구를 했다. 이것을 거절한 오스만 제국은 티무르 왕조와 대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1402년 바예지드 1세는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대패해 포로가 되었고, 다음해 1403년 티무르에게 정중한 대우를 받았지만 실의속에 감옥에서 병사했다. 바예지드 1세의 죽음에 대해선 자살설과 살해설이 각각 있다.

그후 발칸반도 주변은 오스만 제국에게 복속했던 제후들이 하나둘씩 이반하기 시작했고, 아나톨리아에서는 바예지드 1세에게 멸망당했던 여러 제후국이 티무르의 손에 의해 부활하였다. 오스만 제국에게 남겨진 영토는 티무르에 의해 바예지드 1세의 세 아들들에게 분할하였다. 무라드 1세 이전의 지배영역 뿐이지만 이것도 루멜리아를 통치한 장남 쉴레이만 체레비가 유럽쪽을 지배하고, 아시아쪽은 그의 동생들인 아마샤를 통치하게 된 메메드와 부르사에 위치한 이사에 의해 분할지배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분열과 공백기간은 1413년 바예지드 1세와 더불어 티무르에게 잡혔다가 석방된 막내동생 무사를 합쳐 4형제의 다툼 끝에 메메드(1세)의 승리로 돌아갔다.

전 임
무라드 1세
(재위 1359 - 1389)
오스만 제국술탄
1389년~1402년
후 임
 
메메드 1세
(재위 1403 - 1421)
 


니코폴리스 전투 [Nicopolis, Battle of]

 

 

투르크가 유럽 십자군과 싸워 이긴 전투(1396. 9. 25).

발칸 반도와 유럽 중부에 대한 투르크의 세력 팽창을 막으려는 강력한 국제적인 노력을 종결시켰다.

술탄 바예지드 1세(1389~1402 재위)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자(1395), 비잔틴 황제 마누엘 2세 팔라이올로구스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국가 왕들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헝가리의 왕 지기스문트가 십자군을 조직하여 이에 호응하자, 1396년 7월 프랑스·부르고뉴·잉글랜드·독일·네덜란드에서 온 기사들이 부다에서 지기스문트와 합류하여 먼저 발칸 반도에서 투르크 세력을 몰아내고, 그다음 아나톨리아와 시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진군했다.

십자군은 8월에 투르크의 영토에 진입하여 비딘과 라호바의 수비대를 격파한 후, 도나우 강가에 있는 투르크 본거지인 니코폴리스를 포위했으나 니코폴리스는 식량과 장비가 충분히 비축되어 있었으며 방비도 잘되어 있었다. 십자군이 니코폴리스의 항복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바예지드가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진군해 와 몇 마일 떨어진 언덕에 진을 쳤다. 지기스문트는 그의 동맹자들에게 수비진영을 유지하도록 요청했으나, 기사들은 그 언덕을 공격해서 투르크 기병대와 보병의 최전선을 흐트러뜨렸다. 그러나 바예지드는 세르비아 군대에 의해 증강된 또다른 기병분대를 거느리고 그들을 맞았고, 십자군은 너무 지쳐 잘 싸우지 못했다. 처음 공격에 가담하지 않았던 지기스문트가 그들을 구하려고 했지만, 휘하에 있던 블라키아와 트란실바니아 부대는 탈영하고 헝가리 부대로는 역부족이었다. 투르크는 십자군을 대부분 학살하고, 남은 세력마저도 도나우 강 쪽으로 내몰았다. 지기스문트를 비롯하여 십자군 중 소수는 탈출했으나 생존자들은 대부분 바예지드에게 잡혀서 처형되었다.

니코폴리스 승리로 투르크는 장차 그들에 대항할 유럽 연합의 형성을 막았다. 그들은 여전히 콘스탄티노플에 대해 압력을 가했고, 발칸 반도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했으며, 중부 유럽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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