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으로 진공한 몽골 원정군의 전황은 대략 다음와 같다. 1235년 카라코룸에서 개최된 대 쿠릴타이는 유럽원정문제를 숙의, 주치의 장남 바투에게 이 대과업의 수행 임무를 부여하기로 결정한다. 바투가 총지휘한 몽골제국의 유럽 원정군은 1236년부터 거의 5년 동안 키예프를 포함한 러시아의 여러 공국들을 차례로 괴멸하고, 이어 1241년부터 2년 동안 폴란드, 헝가리, 몰다비아를 굴복시킨다.
바투는 비교적 소규모 병력으로 장거리 원정을 감행하여 적을 일패도지케 하며, 또한 진군 경유지역을 평정, 제압함으로써 파죽지세의 전과를 거둔다. 칭기스칸의 자손들에 의한 동유럽 심장부 공략은 여러 측면에서 그 성공 요인을 조명할 수 있다.
먼저 바투의 연전연승을 단순히 그의 효율적 용병 능력, 그리고 몽골군 특유의 일당백의 전투력, 즉 '주먹'에만 결부시킴은 부당한 오류다. 그는 무엇보다도 '머리'를 쓸 줄 알던 바, 자신이 대적할 상대들의 적전분열을 적절히 조작, 활용하는 모공을 최우선적으로 택하며, 그의 이러한 정세 판단과 대응 조치는 결과적으로 거의 적중한다.
중앙 아시아와 러시아 지역의 상당수 통치세력들은 각각 그들 나름의 복잡하고 다양한 내부상황으로 인하여 새로운 거대 세력으로 급성장하는 몽골 제국에 편향, 의존하는 추세를 보인다. 특히 점령지역의 기득권층에 속하는 통치 세력과 대지주, 그리고 영향력 있는 사제와 부유한 상인계층들은 자신들의 부와 특권의 비호를 구걸하며 몽골에 적극 부역한다. 이러한 내부 진동을 충분히 감지한 몽골군의 선무공작과 외교활동 역시 활발하여, 그들은 상대들의 취약점 및 애로점을 정탐하는 한편, 내부의 적대관계를 기술적으로 조성한다.
바투의 유럽공략은 오고타이칸의 사망으로 급작스럽게 중단된다. 게다가 전초와 후방이 과도히 이격되는 취약성의 노출, 특히 초원지대로부터 무리하게 이탈하여 서유럽의 삼림지대로 침투하는 것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득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을 한다. 결국 1242년 몽골군은 볼가강 유역의 원거점으로 철수한다. 그러나 오고타이칸 통치의 말기에 이르러 칭기스칸의 자손들은 서쪽으로는 드니예스트르 강, 그리고 동쪽으로는 한반도 사이의 방대한 영토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2. 러시아 주변의 상황
이제부터 한낱 전설이나 우연처럼 흘려져 오던 이런저런 말들의 타래를 한 올씩 풀어 명확한 사실, 그리고 그 필연의 줄기를 천천히 당겨 보기로 하자.
금의 정복을 마무리한 이듬해인 1235년, 대칸 오고타이가 카라코룸에 소집한 쿠릴타이는 칭기스칸이 장남 주치에게 남겨준 땅인 카스피해 북부의 볼가 강을 중심으로 한 광활한 스텝에 대한 느슨한 <사용>의 올가미를 바싹 조이기, 즉 <실제적 전용>의 '확인'을 주요 목표로 서진 대정벌을 결정한다.
주치의 아들이자 킵차크 초원의 사용 권한을 승계한 바투가 선봉에 나서 용약진군한 이 정예 원정군에는 뒷날 대칸의 자리에 오르는 구유크와 몽케 등 황태자들이 직접 가세하여 몽골군 최고 실력자들 휘하 정예 주력이 대거 투입된다. 특히 칭기스칸의 최고 명장인 백전노장 수부타이의 위용은 가히 이 황태자 군단의 불요불굴의 장도를 예고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1237년 가을부터 몽골군은 드디어 러시아 공국들의 동부에 위치한 볼가강 인근의 볼가르인과 대 헝가리의 바시키르인들을 향하여 본격적인 최초의 공세를 펼친다. 당시 강추위가 불어닥쳐 단단히 얼어붙은 강줄기 위를 따라 거침없이 말을 달리며 베로네즈와 모스크바 인근의 도시들을 연이어 함락시킨다. 그리고 1238년, 블라디미르까지 점령하게 된다.
이 해 겨울, 바투는 러시아측에 붙어 몽골군 사신을 살해한 투르크계 유목민 쿠만족(킵차크족)을 집요하게 추적, 1240년 현 우크라이나의 수도 인근이자 모든 러시아 도시들의 어머니라고 일컬어지던 키예프마저 점령한다. 이로써 현 페테르부르그와 흑해의 오데사까지 죽 그어내리는 선상의 좌우에 위치한 동유럽 평원 전역은 몽골제국의 완전한 지배하에 들게 된다.
몽골군은 봄철에 얼음이 녹으면서 사방이 진창으로 변해버린 노보그라드 일대가 말 달리기에 수월치 못하자 퇴각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체르니코프의 키예프 공국 등 전 지역을 철저히 유린함으로써 러시아 지역 전체는 실질적으로 몽골의 지배 하에 들게 되며, 러시아는 몽골에 대하여 군사적으로 결코 적수가 되지 못함을 통감한다.
당시 러시아 일대의 제후장상들은 고질적인 지역 내부의 세력다툼과 아귀 같은 이권 쟁탈전, 이에 따른 유동적이며 불안한 정정에 휩싸여 있던 만큼, 몽골군을 저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연합세력의 구축은 사실상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러시아인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노예 이야기 잠깐 해보자. 프랑크Frank인들은 그들 왕국의 동부 국경 건너편의 러시아 일대에서의 노예 사냥에 한참 맛 들여 이미 수세기 동안 솔솔 재미를 붙여 왔다. 여기서 프랑크인들이란 대체로 유럽 남부의 피레네 산맥으로부터 북쪽 스칸디나비아 이남지역에까지 살던 서유럽인들을 통칭한다.
그들은 지금의 스페인과 포르투칼이 자리한 이베리아 반도를 휘어잡고 있던 이슬람 군주들에게 이 '포획물'들을 전투노예로 선물하여 비위를 맞추기도 하는 한편, 코르도바 등의 노예 현물시장에 적정 물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한다. 이 '포획물'은 라틴말로 포로를 뜻하는 sclavus 또는 slavus라 불렸고, 이것이 슬라브slav로 와전되면서 어이없게도 한 종족의 고유명사로 정착하거니와, 또다시 어물쩡 노예slave로 바뀌어 싹수없게도 천하 제일 신사들의 말씨에 달랑 끼여든다.
러시아 일부 지역은 줄여 잡아도 17세기말까지는 유럽인들의 공공연한 노예 사냥터가 되며, 때로는 남녀노소 없이 한꺼번에 2만명 이상이 끌려가기도 한다. 주로 지중해 연안의 강제노동, 그리고 교역 및 전쟁 목적의 선상 노역 등 다양한 용도로 혹사당하던 이들의 숫자가 너무 엄청난지라, 한때 서유럽에서는 러시아의 슬라브족이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적도 있다.
다시 돌아가서, 러시아가 몽골을 즐겁게 하는 일은 그것뿐이 아니다. 당시의 강국 헝가리와 폴란드, 그리고 리투아니아 등 인접 카톨릭 국가들의 위협 앞에 두려워 하며 떨던 러시아는 새로운 보호자로 몽골은 선택하고 그 품에 안긴다.
더구나 몽골은 러시아의 문화와 종교에는 관대한지라, 러시아 정교는 몽골의 세력 안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고 이후 제정시대까지 크게 발전하기에 이른다.
3. 알렉산더 네프스키와 벨라
너의 보이고픈 용기, 나의 보여지는 용기
몽골군의 침입이 러시아 공국들에 남겨놓은 파괴와 공포감은 다른 침공지역에 비하여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다른 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극적인 저항에 그치거나 자발적으로 투항한 지역들, 또는 몽골군이 급히 스쳐버린 여러 도성들은 대체로 참변을 모면한다. 이를테면 몽골군에 의한 키예프 함락을 제외한 당대 북부 러시아 지역의 자료에서 파괴와 학살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몽골군이 물러가고 얼마 안 되어, 후일 블라디미르 대공에 오르는 알렉산더 네프스키가 이끌던 러시아군은 막강한 스웨덴군(1240년)과 튜턴 기사단(1242년)을 맞이하여 그들을 크게 격퇴한다. 러시아군의 이러한 승전 결과들을 놓고 볼 때, 몽골군의 퇴각 이후 어쩌면 러시아 지역의 신속한 원상회복의 탄력성을 유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각도를 약간 달리하면, 몽골의 러시아 지역에 대한 파괴와 약탈이라는 것이, 그 정도에 있어서는 부분탈모처럼 듬성듬성하고 방법상으로는 이 빠진 낫과 같이 엉성하던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볍씨 한 보퉁이라도 남겨둬야 내년 가을걷이 때 다시 와서 훑어 갈 수 있다고 몽골인들이 거시경제 뭐시기 하면서 머리를 좀 썼던지.
얼핏 들으면 "러시아는 결코 균열되지도, 압도당하지도, 의기 저상되지도 않았다."는 장수 네프스키의 이 거창한 호기가 몽골의 침입 초기상황에는 제법 들어맞는 듯하나, 러시아의 이 일그러진 영웅은 몽골상전 모시고 온갖 재롱 다 보였다.
그러므로 몽골이 그 후 수세기 동안 러시아땅에서 갖은 행패부리며 죽치고 버틴 사실은 생각만 해도 닭살 돋는 동거 혹은 사실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이래 성행한 '유럽닮기'라는 특수 성형기술이 킵차크 칸국을 '황금 호르드 Golden Horde'라는 기이한 유럽식 미인으로 둔갑시켰다. 그러나 덕지덕지 분단장 했다 한들 그 지겨운 역사의 황색 피하지방마저 흡입하여 어디다 살짝 폐기 처분할 수 있었겠는가?
헝가리와 비잔틴에서는 쿠만, 페르시아땅에서는 킵차크로 불리며 흑해 연안의 초원 지대에 살던 투르크계 유목민, 러시아인들은 이들은 폴로비치라 불렀다. 이 투르크인들은 몽골의 위협에 직면하자, 유목민족 생존 전형에 따라 대부분 서슴없이 이 새로운 강자에게 복속한다. 그러나 그 중 일부는 칸의 지휘하에 근거지를 헝가리로 이동, 헝가리 국왕 벨라 4세에게 비호를 요청함에, 벨라는 기독교로의 개종과 군역을 대가로 치를 것을 약속한 그들의 제안을 수락한다.
벨라는 이 쿠만인들이 헝가리땅으로 들어오도록 허용했다. 이는 이미 같은 방향으로 추적, 진군하는 불청객 몽골군도 함께 모시는 격이었다. 벨라는 이보다 앞서 키예프 공국이 몽골에 함락될 즈음 체르니코프 공에게도 비호처를 제공한 적 있는 자신감 강하고 담대한 군주이다.
그런데 헝가리에 유숙하게 된 이 쿠만의 나그네들, 문간방에서 찬밥이나 한술 털어넣고 배가 따스해지자 언감생심, 이 대갓집을 송두리째 집어먹을 궁리를 했다.
지금은 다뉴브강 고수부지에서 한가하게 캔맥주나 까며 뒹둘다, 뻐근하면 가끔 조기축구 정도로 몸이나 풀며 지낸다지만, 헝가리라는 나라는 한참 때는 중앙아시아 벌판에서 먼지깨나 일으키던 초원 유목민의 후예였다. 그래서 처량한 고향 후배 처지 정도로 생각하여 곱게 이해하고 받아줬거늘, 이 쿠만의 얼빠진 녀석들, 헝가리 바닥에서는 속임수 포커나 간지러운 다트 게임으로 귀족 노릇하는 줄로 크게 잘못 알고서 어디서 잔머리를 굴린단 말인가? 이들의 간사한 책동에 격분한 헝가리 귀족 무사들이 쿠만의 왕자들을 닥치는 대로 마구 베어 버리자, 쿠만의 칸은 주변머리 없는 제 목숨 제 손으로 확실하게 끝장낸다. 결국 그들의 어설픈 생주접만은 거기에서 마감을 했다.
헝가리에서 도망나간 쿠만의 무리들은 오스트리아와 불가리아땅으로 분탕질치며 뛰어드는 몽골군의 길잡이 노릇 자청한 셈이었다.
이즈음 헝가리 국왕 벨라 4세가 키예프 공국의 군주 미하일 체르니코프와 쿠만족의 잔당의 도피를 허용하자 몽골군은 후환을 방지하기 위해 더욱 서쪽으로 진격하게 된다.
4. 리그니츠 대첩과 헝가리 섬멸
카이사르의 갈리아, 나폴레옹의 아우스텔리츠 말고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 1241년 1월, 키예프의 남서부 지역 할리츠에 집결한 몽골군은 전열을 재정비한 후, 폴란드의 바르샤바와 현 루마니아 북부 산악지대의 양끝을 쥐고서 토끼몰이하듯 들이닥친다. 몽골군은 몽골군은 특유의 전술 고전에 따라, 손가락 깍지 끼듯 상호 조율된 두 갈래의 공격선을 따라 동유럽의 침공을 개시한다. 우선, 비교적 소규모의 몽골군 신속 별동대가 먼저 폴란드와 몰다비아 일대를 훍어내며 게르마니아 동부지역을 마구 후벼버리니, 요즘 말로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기동정찰에 주요거점 함포사격이 바로 이런 모양일 것이다.
동유럽 일대에 적의 연합세력이 결집됨을 저지하고자 총공세를 가함에, 마치 부챗살을 펼치는 형태의 도리깨질로 전격전을 감행한 것이다!
이와 거의 동시에, 폴란드와 보헤미아로 진격한 카이두와 바이다르가 이끄는 몽골군 별동대는 폴란드와 체코 사이에 끼여 있는 현 프랑크푸르트 남동 방향 1백 마일 남짓한 지점의 독일 영토인 리그니츠를 몰아침으로써, 바투의 주력이 무난히 카르파티아 산맥을 통과하여 헝가리를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도록 우측을 견고히 엄호한다.
(여기서 카이두는 나중에 쿠빌라이칸과 무려 40년에 걸친 내전을 벌이는 인물입니다. 이때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죠.)
북해를 향하여 흐르는 현 중부 독일의 엘베강 중류 지점에서 불꽃 튀긴 '리그니츠 대회전', 몽골군은 동유럽 침공 작전 중 가장 치열하던 이 전투를 완벽한 승리로 장식한다. 파죽지세- 이 역사적인 전투에 임하여 몽골군 우익이 측면에서 감싸듯 엄호하는 가운데 주력 부대는 폴란드의 크라코프와 브레슬라우를 차례로 깨부수며 리그니츠를 내리찌르는 것이다.
그해 4월, 몽골군은 당시 폴란드 지역인 실레지아의 헨리 2세가 지휘하는 폴란드와 튜턴 기사단 등 게르만계 연합군과 격돌한다. 그들은 페스트 함락에 조금 앞선 이 전투에서 역시 유럽의 연합세력에 처절한 패배를 안겨 준다. 몽골군은 헨리의 머리를 창끝에 꽂아 승리의 트로피로 삼았다. 재기 불허의 압승으로써 동유럽 최대 격전의 대미를 장식한다.
이리하여 텡그리 귀신 씌운 몽골군 별동대는 온갖 축복과 호사로 목욕한 사실상 전유럽 최정예와 대접전을 치르나 하였더니! 순식간에 이를 모두를 그토록 가고파 했던 하늘 나라로 보내버린다.
곧이어 헝가리 지역의 다뉴브 강변에서 몽골군과 대치하던 국왕 벨라 4세 휘하의 헝가리군은 바투의 중앙 공격선이 뒤로 빠지며 벌이는 기만전술에 유인되어 몽골군을 사조강 유역의 평원 지대까지 맹렬히 추적한다.
그러나 헝가리군의 후미가 몽골군의 측면 공격에 의해 즉시 퇴로가 봉쇄되고, 전방이 카르파티아 산맥에 차단되는, 그야말로 독 안에 든 형국에서 당대 유럽 최강의 군대가 완벽하게 궤멸당하고 만다! 여러 사서들에 의하면 전투가 벌어진 모히 초원에서 헝가리의 수도 페스트까지 무려 7만명의 헝가리와 다른 연합국 병사들의 시체가 널려 있어 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한편 리그니츠 전투에 투입된 몽골군의 일부 별동대가 현 독일의 뮌헨을 약 2백 마일 거리로 스치며, 기민하게 비엔나 인근을 빠져나와 헝가리 평정작전에 합세, 페스트마저 즉시 점령한다. 이로써 헝가리도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몽골제국에 합병되는 것이다.
지리멸렬, 헝가리의 살아남은 패잔병들은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이남을 가로질러 알프스 산맥 동단의 수림지대로 도주한다. 이를 추격하던 몽골군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2백여 마일 거리의 크로아티아 남부 평원를 경유, 발칸 반도의 북단을 가로지르며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로 이어지는 다뉴브 강을 따라 퇴각한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허황과 자만에 도취된 유럽의 기사단들은 전투용이기보다는 의장대나 곡마단처럼 요란한 광택의 둔중한 금속제 갑옷과 장비를 과시하듯 전투복 야외 패션 쇼를 연출한 것이다. 그들은 먹이 쫓는 이리떼마냥 신출귀몰하는 몽골군의 기동성, 변화무쌍한 전투 대형의 신축성에 넋이 달아나 이리 엎어지고 저리 자빠지는 예쁜 리본 두른 비육돈의 신세를 면치 못한다. 게다가 그들의 견고한 성채마저 특히 중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단련된 몽골군의 공성 전술에는 이내 돌무더기로 변하고 만다.
전 유럽이 극도의 공포감 속에 전전긍긍, 게르만의 성 십자군 편성은 여의치 못하고 조직적인 집단 저항 또한 부진했다. 그러나 몽골 점령지 이서지역에서의 이렇듯 부실하고 소극적인 태도와 패배의식은 되레 몽골군을 더 이상 자극하지 않았고, 그 결과 서유럽은 다른 지역에서 벌어진 대참화를 모면하였다는 것이 근래에 다소 솔직해진 서구 전문가들의 일반 견해다.
이때 몽골군은 최초의 2개 공격선 중 북방 침공선을 다시 둘러 나누더니 그 한 갈래는 정면공격용 직격병단을 편성, 전격 공세를 취한다.
그리고 다른 한 갈래는 신속정확한 전진을 보조하기 위한 지속적인 윤할제 공급과 장애요소 제어를 목적으로 우회하는 엄호병단을 편성한다.
그리하여 리그니츠의 안면과 측면을 거의 동시에 받아버리도록 정교하게 조정, 몽골군은 순식간에 적을 소나기 맞은 라면상자 꼴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한편, 이와 별도로 대규모의 몽골군 주력부대는 독립 공격선을 그으며 헝가리로 파고든다. 마침내 몽골군은 리그니츠 승전 이틀 후 사조 강 인근에서 다시 대전투를 벌이거니와, 당시 벨라 왕이 직접 지휘하는 헝가리군을 평원으로 유인하여 완전 섬멸, 헝가리를 즉시 접수한다.
이때 몽골리아의 이 불청객들은 옛날 그들의 먼 조상인 훈족의 대왕 아틸라가 터를 잡았던 헝가리의 저 푸른 초원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그림같은 집을 짓고 그곳에 아주 눌러앉고 싶은지라, 헝가리를 몽골 제국의 일부로 영구 병합하자는 이 간절한 염원은 그들이 화폐를 서둘러 주조한 사실을 통하여 능히 짐작된다.
몽골군의 불벼락을 피하고자 호라즘의 무하마드 술탄이 카스피해로 튀었듯, 헝가리의 벨레 왕 또한 몽골군의 추격을 피해 아드리아 해로 도주하되, 이내 그의 왕국으로 돌아와 1270년 사망할때까지 몽골인들과 사실상 공동 통치하니, 이 친구 옛날 알타이 바우고개 언덕 복사꽃 골짜기에서 헤어진 후 실로 얼마 만의 해후인가?
벨라는 한참 동유럽의 왕초 노릇하는 판에 느닷없이 날아든 핵주먹에 안면 뭉개지는 이러한 청천벼락의 와중에도, 이와 같은 쉬운 듯 어려운 탄력적 판단, 즉 벌이기와 끝내기의 시범을 보인다.
적시적소를 능히 읽던 벨라의 진정한 용기는 침략자의 예봉을 잠시 뒤틀어, 뭇 백성에게 스스로 살아남을 방도를 선택할 시간적 여유라도 챙겨 주었다고나 할까.
하여, 크롬웰에 당한 아일랜드, 그리고 몽골에 당한 호라즘과 같은 인구 통계가 휘청거리는 대학살만은 면하도록 바삐 손을 쓴 벨라 왕, 그는 진정 사람을 닮은 군주라, 풀루타르크가 전하는 미남 장군 알키비아데스의 의연한 배포를 연상케 한다.
(여기서 딴지, 당시 몽골 침략을 기록한 헝가리 역사서에 의하면 당시 헝가리 전국민 2백만명 가운데 무려 3분의 1이 몽골군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가 몽골군이 물러간 이후에도 극심한 일손 부족과 인구 감소로 인한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저자가 약간 잘못 알고 있는 것일까?)
5. 오고타이 칸의 죽음
"나는 계집애처럼 물지 않는다. 나는 사자와 같이 문다."
지속적으로 서진하여 비엔나 외곽의 노이슈타트까지 이른 몽골군 주력은 헝가리에 주둔, 월동한다. 1241년 겨울, 몽골대칸 오고타이가 몽골리아에서 사망하자 유럽 전선은 소규모 교전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소강상태에 놓인다. 다음해 초 그의 형인 차가타이마저 사망하니, 후계자 선정문제를 둘러싼 칭기스칸 일족 내부의 첨예한 대치와 의견충돌은 이제 불을 보듯 뻔한 이치.
당시 바투의 갑작스러운 철군 이유를 따지자면, 먼저 몽골의 황실 내막에 대한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하리라. 오고타이의 사망을 한 해 앞서, 바투는 전투 중 친척인 부리와 심하게 다투어, 특히 오소타이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구육과는 충돌이 격심하여 거의 절연의 지경에 이른다. 따라서 새로운 대칸의 선출이 임박한 마당에 구육의 급부상은 바투에 있어 생사가 걸린 일대 위기를 뜻하는 것이다.
사정이 그러한 지라, 머나먼 유럽 전선에서 전투를 지속하느니 차라리 제바닥인 킵차크 초원으로 돌아가 제 땅이라도 잘 지키는 것이 바투 자신에게는 남는 일이며, 신상안전과 이권유지에도 보탬이 된다는 판단이라. 그러나 실제로 구육의 대칸 등극은 7년 가까이 지연되며, 구육은 제위에 오르고도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기에는 너무 짧은 고작 2년 정도 통치하다 말았으니, 공연스레 서두른 유럽 철군은 결과적으로 바투의 과잉 대응이 되고 만 셈이다.
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몽골군은 침공 병력과 후방의 본진 사이에 크게 벌여져 적지속에 고립될 가능성을 경계한다. 동시에 그들은 서유럽의 삼림 지대와 소택 지대에 깊숙히 침투하는 것은 지형, 통신망, 마초의 공급 등을 포함한 전술 전반에 차질만 일으킬 뿐 별로 얻어낼 것이 없다는 판단에 따라 총공세적 재침은 유보하기에 이른다.
이어 동유럽의 패권 장악에 관심이 지대하던 대국 헝가리가 킵차크 칸국에 붙어 실질적인 공동지배자가 되자, 몽골은 1290년대에 이르도록 특히 헝가리를 이용하여 주변지역을 다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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